제자는…

누가복음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August 31, 2024. SaturDevo

여기서 “무리”는 제자들이 분명합니다. 17절 부터의 문장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 이라든가, 제자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무리”라고 번역 했는지 성경번역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보통 “무리”라고 번역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일컬을때 사용한 용어였습니다 (예, 18절).

그러나 여기서 “무리”를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컽는 말이라면, 22절에서 문장이 끝나고, 23절부터 새로운 문장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제자가 되려면”을 가르친다는 말이 어색한 말이 될수 뿐이 없다는 점을 마음에 둔다면, 무리는 제자들이 아니고 무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22절과 23절을 연결하는 말, “하시고, 또”가 영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리”는 제자들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라는 말은 그것을 언급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세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인격을 부인한다거나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지정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두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종종 이것을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끌어 안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자신의 고통이라기 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준 목적에 헌신하는 것이 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석가래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각각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수행하는데, 물론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핵심은 그 사명의 완수일 것입니다.

세째, 예수님을 “따르는”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예를 언급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사역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는 일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사역하는 견습 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랙 로리 목사님의 쓰신 믿는 사람과 제자의 차이를 적어 봅니다.

“모든 제자는 믿는 사람이지만,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믿는 사람은 편리할 때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제자는 결과에 상관없이 순종합니다.

믿는 사람은 한 번 결정합니다. 제자는 매일 결정합니다.

믿는 사람은영생(천국에 가는 것)에 집중합니다. 제자는 영원한 보상(천국을 가져오는 것)에 집중합니다.

믿는 사람은 일이 힘들 때 기도합니다. 제자는 상황에 상관없이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은 교회를 참석해야 할 예배로 봅니다. 제자는 자신을 교회로 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삶을 삽니다. 제자는 부름 받은 삶을 삽니다.

믿는 사람은 천국을 만듭니다. 제자는 역사를 만듭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당신은 믿는 사람입니까 제자입니까? †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세례

고린도전서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

August 24, 2024. SaturDevo

이 구절은 여러가지 다양한 해석이 회자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또는 “죽은 자를 대신하여”라는 의미인데, 죽은자를 위하여 세례를 주거나 받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합치되지 않을 뿐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도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단 종파의 하나인 몰몬교는 이 구절에 의거하여, 죽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그 친척이나 친구가 세례를 받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 말을 이곳에서 쓰고 있을까하는 것을 의아해 하며, 바른 해석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의견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의 내용(Context)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부활이 분명이 있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온 구절입니다. 세례를 어떻게 받아야 한다든가, 세례가 무엇이라든가 하는 주장이 아니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가운데, 한 예로 들어 ‘죽은 자를 대신하여 받는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해석중 그럴듯한 세가지는 이런 해석입니다.

  1. 부활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바울은 당시 행해지던 풍습을 언급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즉 바울의 욧점은 죽은자를 대신해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당시 오늘날 몰몬교인들 처럼, 죽은 사람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들을 예로 들어 부활이 없다면, 왜 그들이 그런일을 행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죽은자 (the dead)’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죄인이라는 의미라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아직 살아있는 듯 하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죽은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죽은 몸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아, 그 몸은 죽을 것이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새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소망을 29절 처럼 표현했다라는 주장입니다.
  3. 또 다른 견해는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죽어가는 또는 죽은 육체를 위한 세례는 쓸모없는 헛일이라고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구절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이지, 어떤 세례가 합당한 세례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텍스트는 아직도 무엇이 정확한 의미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16도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은 최선을 다하여 이해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때, 우리는 기다리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믿어 집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성경의 모든 것을 이 말씀은 이런 말이다라고 단정하여 해석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게 하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구원 받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아직도 분명한 의미를 모르는 것은 그냥 그런대로 받아들이면서 기다리며 공부하면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분명히 그 뜻을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바울의 충고입니다.†

더욱 큰 은사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August 17, 2024. SaturDevo

고린도전서 12:31은 앞뒤장(12장과 13장)을 연결하는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30은 크리스천을 한 몸으로 비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두신(18절) 한 몸에 붙은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할이 틀리다고 서로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화합하고 분쟁없이 서로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8-30절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뒤를 잇는 질문식 수사법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며, 첫째, 그것은 그들 은사에 높고 낮은 계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자존심을 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와, 자신이 받은 은사보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하며 불화를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 31절은 위의 내용과 다음 13장의 내용을 잇고 있습니다. 많은 영어 성경은 ‘그러나 (But)’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2장의 내용과 12:31절 앞부분의 내용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이 상반되는 내용임을 나태내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δὲ데)를 한국어성경과 NIV성경은 생략했는데, 물론 모든  δὲ가 다 But 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지만, But이 들어가는 것이 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말에는 ‘어떤 사람이 은사를 이미 받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것인데, 자기가 받은 은사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일하라는 충고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는 말은 분명히 상반되는 듯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내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데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두번째는 내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31절 말씀에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또는 성경)은 주신 은사에 충실하라는 말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두가지를 모두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12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은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Spiritual gift)입니다. 야고보 1:5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은사(gift)를 구하느냐는 중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자리에 가고, 더 큰 결정권을 갖고, 더 큰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자랑이나 자존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동기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고전 14:5, 12, 17, 26) 위하여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사도 바울이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b)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보이는 가장 좋은길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이라는 13장의 내용입니다. 사랑없이 하는 어떤 은사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은사가 진정한 또는 영원한 가치를 갖으려면 사랑으로 행하여 져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섯을때, 예언의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방언이 무슨 가치가 있겠으며, 지식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 만은 예수님 앞에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랍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은사는 이 땅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형제와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한다는 말은 더 큰 사랑- 성경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을 보여 주기를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도망치는 위대한 승리자

열왕기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

August 10, 2024. SaturDevo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열상19:1-3)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위대한 승리자’ 엘리야가 도망친 이유는 이세벨의 위협적인 전갈입니다. 그러나 선뜻 이해가 안가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마치 웃기는 한국 드라마같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작가들이 이야기를 배배 꼬다가, 다시 풀기는 풀어야 겠는데 스릴있고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풀 방법이 꽉 막혀 버렸을때, 유치한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심리학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도 그런 특별한 사람중에 하나로 친다면, 무슨 행동을 하든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수퍼 능력을 체험한 선지자로써, 그래서 그 열심으로 사악한 왕 아합을 당당히 대면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많은 백성 앞에서 증명하며 바알의 선지자 450인까지 처형한 위대한 믿음의 용사가 그까진 왕비의 협박 전갈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는 것은 만화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엘리야를 이세벨의 협박에 정신못 차리고 도망가게 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고, 또 하나는 불완전한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명철입니다.

엘리야는 진정 믿음의 사람이었고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불완전한 타락한 인간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7:1부터 그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름없는 한 여호와의 선지자로 왕의 길을 가로 막으며 바알신을 따르는 왕에게 도전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아합왕 앞에 내 보내기 위하여 삼년반동안 훈련시킵니다. 그후 그는 다시 아합왕 앞에 나타나,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시합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 앞에서 진정한 신을 가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자리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열상 18:22). 이 말에 숨어있는 뜻이 의미 심장합니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기 혼자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이 바알을 따른 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서는 다윗같은 의연함이 보이지만, 나중에 하나님앞에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열상 19:10, 14)과 같이 보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감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엘리야입니다. 이 불안감은 이세벨의 위협적인 전갈을 받았을때, 갑자기 솟아나와 그를 두려움에 감싸이게 하고 허둥대며 순식간에 200km를 달려 브엘세바로 도망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모든 상황을 공시적으로 보시는 하나님은 엘리야가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 도망친 엘리야를 신실히 대하시어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막 1:2-3)의 선지자로 보내십니다(열상 19:15-18). 하나님은 엘리야를 왔던길로 다시 돌려 보내며, 하사엘과 예후를 기름부어 왕으로 만들고, 엘리야를 기름부어 그를 대신할 선지자로 만들어 아합집안을 심판하고 숨겨 놓으신 칠천인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시는 준비자로 삼으심니다. 하나님의 명철 하심입니다. 실패한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백성을 애굽노예에서 구해 내신 것처럼,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통하여 유럽을 복음화 시키는 선구자가 되게 하신 것 처럼, 도망친 엘리야를 사용하시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가 되게 하시었습니다.

군사를 잘 쓰는 장군에게는 버릴 군졸이 없고, 글 잘쓰는 사람에게는 버릴 글자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믿는 사람은 천국을 세워 나가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인줄 의심할 바 없습니다.†

Let it be 평안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August 3, 2024. SaturDevo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평안을 갈구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며 도전과 성취의 욕망을 자극하는 속담도 있지만 그 말도 궁극적으로는 평안을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무엇이며, 참 평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질문으로 떠오릅니다.

평안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을 말한다고 합니다. 즉 삶의 주위에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슴으로 마음에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읽컽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과거에 흠이 없어야 할것입니다. 현재 육신이 건강하고, 주변에 자신을 어지럽히거나 위협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복지가 보장되어 있어야 할것입니다. 최소한 이런 상태가 되어야 현재 어떤 사람이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라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그래도 괜찬은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마음에 ‘무슨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평안의 상태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 평안은 깨지기 시작합니다. 물리적으로 표현 하자면, 공이 굴러가다가 가장 낮은 곳에 가서 멈춰섰는데 바람이 분다거나, 누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거나, 개미가 공밑에 흙을 옮기거나 한다면, 그 공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평안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그래서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 상태로 평안할까요? 바다물은 끝임없이 출렁입니다. 한 순간도 쉬지않고 끊임없이 크고 작게 출렁입니다. 어디에 평안이 있습니까?

동기부여 전문가라는 멜 라빈스 라는 사람은 “Let Them Theory”(냅둬 이론)을 주장합니다.

“주말에 친구들이 당신을 브런치에 초대하지 않는다면, 냅두세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과 한 약속에 관심이 없다면, 냅두세요. 아이들이 이번 주에 당신과 함께 약속한 일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냅두세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강요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뀌도록 강요하지 마십시요. 그들은 당신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냅두십시요. 그런 다음,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이 무엇을 할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요. 대신 “그들을 냅둬” 이론을 적용해 보세요.”

주위 상황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평안을 구하는 세상적인 지혜입니다. 비틀즈가 노래한 “Let it be”입니다. 그러면 혼자 평안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더 많은 택스를 요구합니다. 더 많은 법으로 구속하고, 더 버릇없이 굴며 압박해 옵니다. “Let it be”라고 노래하던 비틀즈가 결국 해체된것 처럼, “Let them theory”는 ‘let them’하며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요한복음 14:27 평화(Hb. shalom)라는 표현은 영어 단어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갈등과 혼란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축복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6:24-26; 시 29:11; 학개서 2:9 ). 그리고 그 결과로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며 의미입니다. 이것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shalom)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제의하는 평안은 모든 것이 온전한 가운데에서도 갖을까 말까한 평안인데 반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온갖 어지러움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환란을 걱정하고 근심하는 대신, 그 혼란스러운 세상을 사랑하는 평안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는 것은, 밑둥 잘린 거목위에 집을 짖고 있는 새와 같습니다. 그 나무는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나무입니다. 비틀즈처럼 let it be 하지 마십시요. 비틀즈는 Let it be 후 해체되어 끝장이 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복음을 나누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속에  크리스천

마가복음 6:14-15.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July 27, 2024. SaturDevo

마가복음 6장 7-13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6:30에는 그 전도여행 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뜽금없이 헤롯이 등장하며 그가 세례요한을 죽이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잘 진행도고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헤롯이야기는 맥을 끊기는 기분입니다. 나와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는 외국분이 제기한 이의 입니다.

마가는 이야기를 아무 의도 없이이 렇게 배치한 것은 아닐것입니다. 왜 이야기를 여기에 넣었다고 마가가 설명한 것은 없습니다. 마가 복음과 성경 전체의 구성과 일치하는 구성이 유효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잠시 예수님의 제가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능력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헤롯 이야기는 이런 사건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실체와 미래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사방에 퍼졌고, 그 소문은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선지자도 아닙니다. 세상의 눈 높이가 그곳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에 비유할려고 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것을, 그리고 세상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헤롯도, 이들도 저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전도하고 있는 세상의 상태입니다.

두번째는 세상의 잘못된  추구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며, 비유로 얘기해주며 당신들이 추구하고 들어가서 살게될 세상임을 설명해 주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추구는 전혀 방향이 틀립니다. 그들은 정욕을 추구합니다. 헤롯은 형제의 아내까지 욕심내며 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헤로디아는 남편까지 배반하며 세상권세와 향락을 추구합니다. 그 딸 살로메는(성경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삶에 ‘나몰라’라 하며 대중의 눈길을 즐깁니다. 요즘 연예인들과 흡사합니다. 헤롯의 고관들, 군대장관들, 지역유지들은 왕(사실 헤롯은 왕이 아니라 분봉왕(Tetrach), 위임 통치자로 그 지역에 제한된 권력만을 갖는 사람입니다)의 파티에 초대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리를 탐하고, 안목의 정욕을 즐기고 허황된에 자부심을 추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세째는 전도자들이 부딪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한 암시입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싫어하면서도 잘못된 의협심에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어린아이인 살로메는 눈하나 깜박않고 소반에 얹혀진 세례요한의 머리를 자기 어머니에게 갖다 줍니다. 그런 끔찍한 장면을 보며, 헤롯의 사람들은 말 한마디 안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권위가 무참히 무시되고 짖밟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속에서, 세례요한으로 잘못 간주되고, 엘리야로 간주되고, 선지자로 간주되는 예수님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도 어떤 일과 마주해야 할지를 암시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다행 스럽게도 우리는 결국이 어떻게 될 줄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실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악을 초월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위한 것인줄 압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여야 할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울 지라도, 우리는 그 종국을 알고 있기에 자신있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악인

열왕기상16:2: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July 20, 2024. SaturDevo

열왕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바쁘셨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을 고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 10지파를 떼어서 주권자를 삼습니다. 그랬더니, 이 느밧을 아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때문에 자신의 주권이 위태롭게 될까 염려하여, 북 이스라엘땅에 두개의 성전을 지어 그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워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가는 대신, 이 금 송아지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하는 엉뚱한 짓을 합니다. 이 일은 자신에게 주권을 주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도 하나님을 배신하게 만든 죄로,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또 이 여로보암을 징계하기 위하여,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여로보암의 집을 벌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을때, 바아사는 나답를 죽이고 여로보암의 집을 잔인하게 지워버리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바아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왕이 되어, 다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됩니다(열상 16:2).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어 술에 취해 있을때, 시므리는 엘라를 죽이고, 왕이 됩니다. 왕이된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아사의 집이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여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합니다.

이런 일을 행한 시므리는 다시 오므리에게 당하고 오므리왕조, 또는 오므리 아들이름이 따서, 아합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아합은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 유다까지 엉망으로 만들게 되며, 하나님은 예후를 세워 아합집안을 징벌합니다.

이렇게 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된 자가 그 징벌하기 위하여 행한 악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 받는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성경은 여러 군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시지만, 바벨론은 유대에 행한 그 악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습니다. 현대 진화된 눈으로 보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하나님 놀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계획을 진전시키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애굽 바로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을 유대지도자들에게 넘기기 위하여 유다를 사용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하여 빌라도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죄없다 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Be sure of this: The wicked will not go unpunished, (NIV))” (잠11:21). 그들이 반듯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선을 위하여 지은 죄든, 의를 위하여 지은 죄든, 어떤 죄든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선한 사람이든, 권력있는 사람이든, 이븐 그것이 하나님일지라도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으신 것일까요? 바로를 사용하신 것이, 바벨론을 사용하고, 유다와 빌라도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죄있으신 것인가요? 바울의 언어로 “그럴수 없느니라(By no means)”…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까? 인과(cause and effect)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사람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역을 맡길 만한 성정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만한 성정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일을 그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유다 만큼 휼륭히 그 일을 해낼 성정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되길 원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 맞을지 기도하며 성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요즘 미국과 한국의 정치판이 어지럽습니다. Crooks의 역을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역을 맡을 지라도 여로보암이나 바아사, 시므리처럼, 잔인하게 처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가 필요한 곳에 사용하고, 반듯한 나무는 반듯한 나무가 필요한 곳에 사용합니다.†

두란노 서원 

사도행전 19:9-10.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July 6, 2024. SaturDevo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러 어떤 도시에 가면 보통 제일 먼저 시나고구를 찾아갑니다. 유대인 회당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3차 여행으로 에베소에 갔을때도 역시 그는 에베소의 시나고구를 찾아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곳의 어떤사람들이 믿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도를 비난하고 일어나자 그는 그곳에서 나와 복음을 전할 다른 곳을 찾다가 회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의 두란노서원을 찾게 됩니다.

두란노 서원은 바울이 만든 성경 학교가 아니라, 그 건물에 있는 강의실의 이름이었습니다. 그곳이 헬라어로는 두라노스의 강의실( the lecture hall of Tyrannous)였습니다. 두라노스라는 사람이 소유한 강의실이었는지, 그가 강의한 곳이 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장소를 돈을 내고 빌렸든지, 또는 내도 작은 돈을 내었든지 또는  거져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사용하였다고 믿어집니다. 어떤 성경 카피본에는 제5시부터 10시까지 강의했다고 시간을 적고 있습니다(ESV note). 즉 바울이 성경을 강의한 시간은 매일 오전11부터 오후4시까지 다섯시간을 강의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날씨 관계로 모든 사람들이 한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갖었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텐트 만드는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자비량 선교사였지만(행18:3), 그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그 시간에 복음을 전했고, 또 그 복음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역시 그  휴식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그 곳에 와서 복음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공부한 사람들은 그 복음을 그들 주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두해 동안 계속 되었을 때,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10)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동북부를 여행하다 보면, 유럽 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곳이라서 그런지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는 대부분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관광객들이 부산하고 어수선하게 드나들고 있는 상황속에서도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 앉아서, 또는 무릎까지 꿇고서 잠간씩 이나마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그들의 신심은 말씀의 확신에서 나온 마음일까, 하나님이 계실 만한 웅장한 교회당이기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일까  궁금해 집니다. 과연 이 곳에 하나님은 계실까?  돈을 내지 않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성당이나 교회는 많지 않은데, 종종 있다고 해도 들어가 보면 쇠락해가는 부자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암울하게 하곤 합니다. 어마 어마한 돈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물질의 희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전들이 예배와 전도와 선교의 센터가 되는 대신, 돈버는 장소로 바뀌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를 가지 않고 건물을 보기 위해 갑니다.

바울은 시나고구를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기에 제일 먼저 찾아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수 없음을 알자, 사설 강의실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변증하였다고 합니다. 바울과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아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즐기는 휴식을 포기하고 성경 공부를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온 아시아사람이 예수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갑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크리스천과 십계명

사도행전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June 8, 2024. SaturDevo

사도행전 15장은 소위 말하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2:4)로 교회가 생겨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를 향하여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부터 오는 핍박과 고난이었다면, 15장의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은 내부 분열의 징조였습니다. 복음이 열심히 전파되고 있는 이방 도시 안디옥에 유대에서 온 바리새파 계열 크리스찬이 새로운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좋은데, 진정 구원을 받으려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아마 당시 예수를 믿던 이방인이었다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모세도 빼놓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나와 같이 성경을 읽으며 복음을 나누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현대 이방인입니다. 그분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 옵니다. 십계명은 강조하면서 왜 네번째 계명인 안식일은 성경대로 안지키고 선데이로 하냐고 합니다. 구약에 어떤 계명은 크리스천의 중요한 가르침과 일치하지만, 어떤 계명은 안지키고, 지킬 수가 없는 것이 있는데 그런것은 누가 결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데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되어 구원받는 것은 간단한 것 같은데, 계속 공부해 들어가다 보면 걸리는것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는 강조하면서 음식법은 무시한답니다.

이런 질문들은 수도 없이 제기 되었고, 여러가지 방법과 여러가지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설명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제이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도, 할례는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20) 라고 하면서, “다만”를 넣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첫 번째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또, 갈라디아서도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3:24-25)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율법이나 선지자, 즉 구약성경은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크리스천은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던 율법은 더이상 그 역할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신약의 백성이 구원받고 새 생명을 살아가는데 구약에 매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신약의 크리스천은 구약의 어떤 율법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요1:14)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구약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든가,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읽고 이해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레위기의 제사법, 정결법, 의식법같은 율법도 우리는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적용할 수 없는 계명으로 주신 말씀 속에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하나님과 더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갖을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신도들에게는 십일조를 내느냐, 십일일조를 내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구약의 율법에 매일 필요는 없지만,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는 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에 매여 노예처럼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공부하여, 그 분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동하며 산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훨씬 더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줄 확신합니다. †

하나님의 고집스런 구원 의지

마태복음 12:38-39.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June 1, 2024. SaturDevo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힘을 얻어가며 번창하여 가자 의심하고 시기하며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중에 몇 사람이 “힐난하며,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부탁하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8:11은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며 ‘요나의 표적을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얼뜻 보기에 요나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게합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요나를 예수님을 예표한 사람으로 말하기도 하여,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요나는 예수님이 인용할 만큼 중요한 사건에 관계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12:41절의 말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는 말씀은 요나를 예수님 버금가는 사람쯤으로 간주한는듯 합니다.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할때,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오직 보여줄수 있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라니…? 

요나서를 읽어보며, 요나의 표적과, 요나의 인격은 구별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나의 행적은 간단합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배를 타고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풍랑으로 인해 사공들에게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며, 기도함으로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대로 니누웨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니누웨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고 그들을 구원해 주지만, 요나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아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 항의는 고집스럽습니다. 그 고집에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4:10-11)하는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 이야기에는 회개, 선교, 하나님의 주권, 긍휼 등 여러가지 주제가 있을 수 있고 교훈이 담겨 있지만, 요나의 인격은 칭찬할 만한 것이 단 한가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있다면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바른 지식은 갖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도 의심입니다. 오히려 안했다고 확신이 드는 상황은 이후 얼마되지 않아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와,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이 그 완고함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이란 말이 결코 요나의 사람됨을 칭찬한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는 말씀을 요나서와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가 밤낮 사흘도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은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간 죄로 요나에게 강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요나의 전도’도 요나가 원한 일이 아니라, 간신히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거절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실행한 일에 불과 합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말 보다는 ‘요나를 통하여 보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의 표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이 말이 너무 길어, 간단히 ‘요나의 표적’이란 말을 쓰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사실 요나의 인성은 제로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간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드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 담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궁지에 몰려서 하는 기도에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듯, 요나에게 똑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더는 도망하거나 거부할수 없었던 요나는 니누웨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악에서 돌아섰을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이를 심히 싫어하여 성내며 하나님께 대듭니다. “나를 죽이십시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겠습니다”라며 대듭니다.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의 이 성질과 하나님의 질문은 박넝쿨 사건을 통하여 또 한번 거듭됩니다. 요나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시기와 질투로 꽁꽁 뭉쳐진 인간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며, 죄성에 물든 인간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와 긍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나서는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는 요나를 끝내 잡아와 전도자로 만들듭니다. 음란하고 악한 세대로 대표되는 니누웨를 끝내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