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March 12, 2022. SaturDevo
복음서의 줄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 우리중에 오시어, 자신이 누구인지 또 왜 오셨는지를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PR(Public Relations)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러 왔으니, 자신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하는 것을 알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는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잠시 우리를 당혹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또 병자를 고치시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부분이 여러번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그런것을 알려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가복음 특히 전반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침을 받은 사람들, 구경꾼, 제자들, 심지어 귀신들에게 잠잠하라고 자주 명령하십니다(1:25, 34; 1:44; 3:12; 5:43; 7:36; 8 :26, 30; 9:9). 자신을 알리러 오신 예수님이 왜 숨어서 자신과 엇갈리는 일을 하시는지 당시 예수님을 쫓아다니더 사람들과 제자들은 어리둥절 하였을 것이고, 또 성경을 읽는 우리들도 의문스럽게 만듭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이유를 분명히 “이래서 그랬습니다” 하는식으로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고, 복음서의 내용과 부합하며, 복음서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거짓 메시아적 기대로부터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 받고(45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라는 명령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메시아” 또는 “구원자”는 점령된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군주를 몰아낼 다윗 왕과 같은 군사 영웅의 이미지를 기대하고 있었고, 연상케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메시아적 왕으로 오신것을 받아들이고(2:25; 12:35-37) 그것을 인정하시지만(“다윗의 자손”, 10:47-48; 11:10), 그의 왕국에 영향을 미치는 무력적 방법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음을 압니다. 이것은 귀신의 입을 막는 구절에서 볼수 있는데, 악의 세력을 물리 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로마군을 몰아낼 다윗과 같은 군대 지휘자로 연상될수 있었기때문이고, 예수님의 소문이 귀신들린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가므로 예수님이 와전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 입을 열지 못하도록 경고 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전사의 칼, 무력이 아니라 종의 수건이 그가 수용한 모형이었습니다.
둘째, 예수께서 자신의 기적적인 능력을 숨기신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구경하는 것으로 믿음이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을 구경했다고 구원의 믿음이 주어지진 않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 자기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만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임으로 일어나는 문제로 그의 봉사의 직무의 진정한 목적(즉, 복음선포 선포하는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예수의 삶과 목적에 대한 통찰력만이 진정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떤 공식이나 지위, 또는 놀라운 일에 대한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 체험을 통해서 얻는 구원의 지식이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온전히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는 경계를 사용합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질 수 있지만(1:44), 예수께서는 그가 예수를 단지 기적을 행하는 일꾼으로 선포하지 않도록 잠잠하라고 명하십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3:11-12)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그분의 전령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잠잠하게 합니다. 베드로조차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 잠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8:30). 이는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백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위대한 선생이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사람으로써가 아니라, 또는기적의 선지자 또는 세상의 이것 저것의 질문에 답 할수 있는 최고의 지혜자가 아니라, 예수님은십자가 위에서만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고통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되었으며,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승리를 나타냅니다.기꺼이 자신을 부인하고 값비싼 제자의 길로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은밀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직 골고다에서만이 올바르게 알려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 생활속에서도, 너무나 종종 왜 라는 질문은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부합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고 전혀 생각할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3:14,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시는 원칙이 됩니다. 성경 말씀과 항상 함께 하며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중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해하고 찬양하는 믿음을 얻게 될것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6:40)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삶 중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4:13)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 예수님을 체험하는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일 성경을 읽고, 그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