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린도후서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May 4, 2024. SaturDevo

과학 문명이 크게 발전한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를 기복신앙 또는 고대 수호신앙과 동일 선상에서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복을 받을 것이라든가, 또는 사업이나 자녀들이 잘 될 것이라든가, 또는 모든 불행이나 재앙으로 부터 보호 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독교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행태를 예견하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건전한)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4:3-4). 진리를 찾고, 진리를 믿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조종하고 진리를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려고 시도합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 최고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복음 전파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른팔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육체의 가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하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위하여 세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고후 12:8). 사도 바울도 자신의 불편함을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기도로 부탁하여 고치고 싶었는가 봅니다.  사욕은 아닐지라도 인간적인 생각은 예수님이 들어 주실줄 믿을 만한 간구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번영이나 치유 또는 어떤 혜택이 믿음이 깊고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가르침은 비영적일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입니다. 바울의 경험은 사람의 허탄함이 아무리 정교하고 합리적으로 꾸밀지라도 하나님을 조종하고 움직이게 할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드러냅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우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탄의 사자(12:7)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과 종들을 괴롭히려는 그들의 시도는 하나님의 정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사용된 가롯 유다가 그렇고, 빌라도가 그렇게 사용됩니다.

둘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하나님의 전체를 포괄하는 큰 뜻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달라는 간구에 그 고통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든 아니든에 상관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더 의지하도록 돕는 다면,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정확히 믿는 사람들 안에서 성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믿는 사람들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이세상의 삶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믿는 사람들이 가장 약한 곳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약한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강해지도록 허락하고, 우리가 그 약함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분명한 “아니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의 목적이 겸손을 유지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삶에 있는 이러한 지속적인 약함은 그가 자만하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는 사도 바울이 최고의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격려였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조종하고 이용하여 강해지려고 하는 대신, 우리를 비우고 하나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우리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가시도록 겸손하게 허락하는 것이, “내가 약한 그때에 내가 강함이라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과 요나

열왕기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April 27, 2024. SaturDevo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최 전성기를 이룬 왕입니다. 이스라엘왕들 중에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의 왕이 두명 나오는데, 먼저 나오는 여로보암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솔로몬 사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쪼깨어 가진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조가 됩니다(열상13:20). 그리고 두번째 나오는 여로보암은 첫번째 여로보암과 핏줄로는 아무상관 없는 인물로, 오므리왕조(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를 멸하고 새 이스라엘 왕조를 연 예후의 후손입니다.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하여 첫번째 여로보암을 여로보암 1세로 부르고, 두번째 나오는 예후의 증손자 여로보암을 여로보암 2세로 부릅니다. 그리고 이 여로보아2세(BC782-753)가 이스라엘의 최 전성기를 누린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를 누리기 전에 이스라엘은 고통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13:3-4은 그의 할아버지 여호아하스 왕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어려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 앞에 기도하므로 여호와 께서 긍휼히 여기서서 이스라엘을 구원자를 보내 구해 주십니다. 그 구원자가, 앗시리아왕 아다드 니라리였습니다. 그가 아람왕과 싸운것이 이스라엘이 아람의 학대로 부터 벗어나는 기회가 된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열하13:23). 여로보암 2세의 아버지, 여호아스(요아스라고도 함) 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라를 부흥시켜 나갑니다(열하13:25). 여호아스는 유다왕 아마샤와 좋은 관계를 구축합니다. 그래서 그 둘은 사돈관계까지 맺습니다. 그리고 유다왕이 에돔과 싸울때,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스라엘은 기꺼히 승락하고 군대를 출동시키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아마샤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마샤가 출동한 이스라엘 군대를 돌려 보내는 사건의 갈등으로 둘의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돌아가던 이스라엘 병사들은 유다 촌락을 약탈합니다. 그러자 혼자 힘으로 에돔을 이긴 아마샤는 자신감에 충만하여 여호아스에게 싸움을 겁니다(열상 14:9-10). 그러나 아마샤는 포로로 잡혀 이스라엘에서 여호아스가 죽을때까지 잡혀있게 됩니다.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도 결코 여호와 앞에서 선한 왕은 아니었지만(열하14:24),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에게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는 땅을 넓히는데,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경계까지 이스라엘의 땅을 넓혀 나갑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왕, 여로보암2세의 영화를 요나의 입의 통해 알게하십니다(열하 14:25).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열하 14:26-27). 요나는 악한 왕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받는지를 목도한 선지자 였습니다.

그 요나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니느웨에가서 그들의 죄악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요1:2). 그러나 그는 들은 체도 않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여호와도 모르며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이방인들의 손에 들려 여호와를 알면서도 여호와를 거부하는 자자 되어 바다속에 던져지는 참변을 격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욘4:1-2).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고서야 다시 여호와의 말씀대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약하고 고통받는 상태였습니다. 아람과 또 다른 주변국들과 전쟁으로 약해졌기에 강대국으로써 그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이스라엘에게는 번영을 누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선포에 니느웨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욘3:10)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성을 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4:2-3).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물음은 요나를 생각해 보게 되고, 우리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요나는 자기와 남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요나에게 자기는 자신이고, 이방인은 남입니다. 요나에게 이스라엘은 자기이고, 니느웨는 남입니다. 요나는 풍랑속의 배에서 아우성치는 선원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지만, 물고기뱃속에서 자신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합니다(욘 2:3).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여로보암이 악한 왕일 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신실히 전하지만, 니느웨를 위해서는 그들이 잘될것을 시기하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합니다. 자기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것을 주는 것을 그토록 싫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요나였습니다. 요나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요나입니다. 요나를 생각하며 우리를 생각해 보게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서 나셨지만, 이스라엘이 독점할수도, 해서도 안되는 분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복음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도 전해야 할 좋은 소식입니다. 믿는 사람은 요나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

요한 복음 12: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April 20, 2024. SaturDevo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사람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들과 있을때는 믿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표하기를 꺼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공표할 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존중이나 존경의 꺼리가 되지도 못할 뿐아니라, 오히려 어떤때는 조소의 미끼가 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전도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주시는 축복과 기쁨과 감사를 자기는 알면서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죽어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12은 하나님이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있고, 13-20은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12:42은 첫 부분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 12:42).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삼년 사역을 하시는 동안 일곱번의 이적을 통하여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나다’라고 말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극구 부인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요 12:37-8). 이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옳았고, 그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도 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었지만, 같은 패거리인 다른 믿지 않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의 비난이 두려워 내놓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행태를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5:44).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보다 그들이 속해있는 단체 또는 그룹의 사람들로 부터의 칭찬과 인정을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한 사람은 날 때 부터 맹인 되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된 사람의 부모 일 것입니다 (요9).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날 때 부터 맹인 되었던 당신의 아들이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묻자, 자기 아들이 맹인으로 난 것은 사실이나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며 자기의 아들도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으라고 하며 답을 회피합니다. 이에 주석자는 덧 붙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요 9:22). 사도 바울도 이런 사람들을 질책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다른 사람들 앞에 고백하지 않은 신앙은 진실한 신앙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롬1:16).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은 신앙은 제대로 열매맺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가짜 신앙이 됩니다. 거짓 선지자와 다름 없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내놓지 못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의 또 다른 말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신수 왕권

열왕기상 2: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April 13, 2024. SaturDevo

솔로몬은 왕권신수설을 믿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용한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은 왕권신주설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절대 군주들은 이 설을 주장하였고, 또 성경의 인물들도 왕권신수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왕권신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는 유언과 죽음, 그리고 솔로몬이 왕권을 세워나가는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2장에는 솔로몬의 왕권을 ‘세운다’(Establish <ESV>)라는 말이 네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럴때 마다, 하나님이 함께하고, 도와주고, 인정해 주심으로 그의 왕권이 견고하게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열왕기상 6:12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삼하 7:13, 열상 1:17) ) 왕권이 견고하게 세워져 갔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세상말로 하면 정적 숙청인데,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의 지혜로 해결해 나가는 상황을 들어, 이 숙청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하고 도와주는 형태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숙청 대상은 아도니야입니다. 아도니야는 어리석게도 아버지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아내로 갖기를 청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의 첩과의 성관계는 왕권에 대한 주장이나 요구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장관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의 문제로 이스보셋왕과 갈등했고(삼하 3:8),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다윗의 첩과의 관계를 온 이스라엘에 알게하며 다윗에게 왕권을 요구했습니다(삼하16:22). 기회를 잡은 솔로몬은 놓치지 않고 그를 죽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열하2:24).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제거한 것입니다. 두번째 숙청은 아도니야를 도와 왕권을 도모했던 요압입니다. 요압의 죽임은 다윗의 유언으로 정당화 됩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열상 2:5-6). 요압이 다시 아도니야를 도와 왕권도모를 공모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둘을 하나로 치부하여 요압도 죽입니다. 이렇게 하여 힘있고 능력있는 장군, 그래서 어떤 왕자를 도와 왕권에 위협이 될수있는 요압도 제거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를 제거합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의 명령을 무시합니다(열상 2:37). 이것은 사울이 지배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이며 온전한 제압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그를 제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열상 2:44). 솔로몬이 왕권신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을때, 성경은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열상 2:46)라고 하며, 솔로몬의 왕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솔모몬이 자신의 왕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정적제거를 합리화하며 왕권을 견고히 했는데, 솔로몬은 이것을 믿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왕권확립에 앞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왕상2:2-3). 믿었다면, 솔로몬은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온갖 부와 명예와 지혜로 가지고, 그가 한 것은 성전 건축입니다. 사실 성전 건축도 아버지가 쌓아놓은 부와 명예의 그늘에서 한 것이고(역상 22), 그는 아버지 유산을 누리며 산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언어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단한 권리와 축복으로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성전보다 더큰 자신의 집을 짖고, 호사를 누리며 여러 이방여인들을 사랑하였으며(열상11:1) 아내와 처첩을 천명이나 두며, 이방신이 예루살렘 구석구석에서 섬겨지는 것을 방관합니다. 그는 다른 모든 절대 권력자들 처럼 왕권신수설을 믿은 사람이 아니라 이용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왕권을 받은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 (마 29:18, 요 17:2))를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대신, 약한자 병든자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쓰시고, 온 세상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그 제자들에게 또 물려 주십니다(요 17:8).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복음과 축복과 하늘의 평강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수권자들입니다(막16:15-18).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믿는 자들에게 맡겨주신 그 일을 충실히 이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을 이용했던 절대군주들 처럼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믿는자에게 주어진 혜택만 받고, 믿는자가 해야할 일은 무시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이용하는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증인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April 6, 2024. SaturDevo

어떤 성경 학자들은구약의 출애굽이야기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를 설명하는 모형으로 보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정찬인 유월월 식사에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눅22:20)을 언급하며 출애굽기 24:8의 모세의 말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를 떠오르게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눅9:31)사건으로  이야기하며, 죄에서 자유를 얻게하는 것을 암시하는 출애굽으로 언급합니다.  모세의 순종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 낸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의 순종과 죽음이 온 세상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내어 영생으로 인도하는 사건이 구약의 출애굽을 기억나게 하며 병렬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안에서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홍해를 통과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일시하게 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그리스도들의 성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 경험과 동일시 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든것 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시어서 뭐 어째야 하는 것인데’ 하는 혼란에 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을 놀라게 했고, 또 그들을 한껏 부풀게 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으며 이스라엘을 재건할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님이 죽었을때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잡으러 떠나고, 엠마오로 떠나던 제자들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그들은 놀라고 또 그리스도를 확신하며 이제야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한껏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행 1:6). 그들은 아직도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재건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지 않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7-8).

사도행전 1:8은 이후 이어지는 전체 사도행전으로 부터 오늘날 까지 모든 믿는자의 삶을 주장하는 핵심 주제가 됩니다. 그 범위는 제자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을 훨씬 넘어섭니다.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이 일의 주체는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성령입니다. 비록 사용된 단어는 틀리지만 내용은 마태복음 28:18-20과 마가복음 16:15-18과 같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먹을것을 주시고(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을 주시고, 적으로 보호해 주십니다(출 16-17). 하나님이 백성을 만들어 나간 것은 모세도 아니도, 백성들도 아니었고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은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이 온 세상의 구원받은 사람을 우리 믿는 사람을 사용하여 땅끝까지 찾아가서 영생으로 이끄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March 31, 2024. SaturDevo

부활절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 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었습니다. 왜 다시 살아 나실것을 그냥 죽지 말지 왜 죽으셨을까요? 그 대답이 요한복음 12:24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첫 열매로 살아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논리를 자연의 이치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 중요한 원리를 신학적 논리로 설명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대속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대신 죽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죄를 대신 해서 죽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영원히)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죽음으로 자식이 조금 더 오래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자식도 결국은 죽습니다. 투사들이 동지를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로 인해 살아 남은 동지도 결국은 죽습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적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어떤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어 어떤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위하여 고통받으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영생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 5:10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셔서 그들을 영원히 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을 온전한 사람이시고 또한 온전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위격적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위격적 결합이란 말은 나오지 않지만 성경의 내용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5:21).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이 죄를 사할 능력이 있음을 그들 앞에서 증명합니다 (눅5:24).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은 모두가 압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사람이십니다.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모두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어줄 목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사람이시기에 예수님에게 사망은 없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기 전에는 죽음을 생각지도 않았던 것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을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있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아도 되는 예수님이 믿는자를 위해 죽으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아도 되게 된것입니다. 영생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대신 죽은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에서 살아나셨을까요? 예수님이 단순히 하나님이기에 살아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공정 공평하신 자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2:24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사람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십니다. 누구든지 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죄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셨기에 다른 사람들 대신 죽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이 대신 지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게는 하였지만, 원래 죄 없으신 분이 시기 때문에 죽음은 예수님을 죽음에 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나실수 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었습니다.

이제 이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히브리서 9:26은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 4:9-10도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5).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으십니다. (벧전 3:18, 요일1: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가 없어집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됩니다. 요한복음 14:3은 이런 약속을 주고있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어 죽음을 이기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은혜의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오시기까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까지 우리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죽음은 믿지 않는 사람의 죽음과 같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잡아둘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사람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는 모든 믿는 자는 첫 열매에 이어지는 열매들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예수님은 꼭 죽으셔야만 했는가?

요한복음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꼭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성금요일만 되면 경외와 감사와 회한과 찬양과 함께 머리속을 스쳐가는 질문입니다. 전지 전능하시다고 하는 하나님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구글에게 물어봐도 AI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목요일날 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이 말씀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내가 꼭 죽어야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까?’ 하는 절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이런 절규에도 불구하고 그 잔을 옮기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죽는 방법이 하나님의 속성에 모순되지 않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또 다른 의문은 예수님을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며, 사람을 구원해야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되기 위한 조건에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아야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송아지가 없어도 사람은 사람인것 처럼, 러시아 노래를 듣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인것 처럼,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배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이유를 성경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어긴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시었고 사랑하시기로 결심하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실천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실 방법은 하나님의 그 많은 거룩하고 선하고 공정하고, 공평한 속성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어야 했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실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대속을 택하게 됩니다.

대속(Atonement)은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모든 죄지은 사람이 가야만 하는 죽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원래 죄인 이었던 우리는 죄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원인이고 결과는 예수님의 죽음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다.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대속적 구속에 인간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하나님께서 하신일입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혜택은 인간이 받습니다. 은혜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호산나

요한복음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March 23, 2024. SaturDevo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최소한 네번 이상을 예루살렘에 가신것으로 보입니다. 한번은 초막절에 (요7:2, 10), 또한번은 수전절에(요10:22), 그리고 두번은 유월절에(요 2:13, 12:12) 예루살렘 성전에 가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사건은 12장에만 나옵니다. 이 사건은 다른 세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일컬어  The Triumphal Entry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세 복음서(공관복음서)에서는 이후 유월절 만찬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리고 유대인들(제사장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서기관들)과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들을 뭉뚱그려 믿지 않는자들로 치부해 버리고, 오히려 제자들과의 관계를 깊이 일궈가는 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의 승리의 입성은 크게 세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복음입니다.

빈틈없는 하나님을 보며 다시한번 놀랍니다. Scotty Smith목사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홍보하실 줄 아는 홍보회사이시며, 자신의 해설자이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며 나귀를 타기로 하신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홍보 이벤트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주실 구원자,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한 구절이 사도요한이 12:15에 인용하여 적고 있는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걸어 들어오시지 않고 동물을 타고 들어오시므로 승리자이며 왕이심을 공표하고 계십니다. 삼년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호산나(Save us/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받듭니다. 그러나 왜 백마가 아니라 나귀였는지는 숙고하지 않은듯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정치적 왕이 아니라, 공의의 왕(슥9:9), 평강의 왕(열상1:38)이라는 것과, 군사적 정복자가 아니라 죽음과 고난과 질병의 정복자라는 것을 나귀를 타심으로 은연중에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후, 헬라인들이 뵙기를 원할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아직, 아직’(요2:4, 7:6) 하시던 예수님은 때가 되었음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키시고, 빈틈없이 이루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부족함은 이 사건에서도 여지 없이 나타납니다. 요한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12: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만 예수님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년동안 따라다니며 배운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못 해석합니다. 로마서 3:10-11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깨닫는다라는 것을 ESV는 “understand”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씁니다. 예수님이 왜 나귀를 타셨는지, 영광을 얻을 때가 무엇인지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삼년을 밤낮없이 배우고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 땅위에 죄인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라도 예수님을 깨달은 것은 축복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창세기3장의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때가되어 성취되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사람이 죄인되게 한 그 원수를 물리치고 다시 죄인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수 있게 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죄인들을 어떻게 자신과 화해시키시는지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또한 모든 거짓과 욕심과 질병과 악인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을 이기신 예수의 승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상한 발꿈치로 뱀의 머리를 밟으셔서 상하게 하고 이기시어 복음 약속을 성취하신것입니다.

머리를 상한 사탄의 패배는 누구나 알수 있습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할지라도 종말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시대, 은혜의 시대를 Already,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헬라인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승리와 통치가 유대 예루살렘을 넘어 온 세계에 까지 미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입니다(요12:21). 그래서 이 말씀이 복음이고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춘분과 부활절

춘분은 영어로 Spring Equinox입니다. Equinox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Equal Night이라고 합니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밤의 길이가 같고, 낮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동지(Winter Solstice)가 지나며 밤이 점점 짧아지다가, 춘분이 되면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 춘분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하는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 입니다.  밤이 길이가 제일 긴 동지(22일) 근처입니다. 예수님이 밤이 제일긴, 제일 암울한 동지에 소망의 빛으로, 태어 나셨다는 것이 우연일까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요1:4).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유다의 한 작은 마을에서 부터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십니다. 그 빛은 예루살렘을 밝히고 유럽을 밝히고 온 세상을 밝히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하십니다.

일년중 춘분은 빛이 어둠을 앞지르기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는 시기와 맞먹습니다. 매년 부활절은 춘분 후, 만월후, 첫번째 일요일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을 이기었습니다.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사도요한은 말씀합니다. 그 생명의 빛은 점점 길어지고 사랑의 온기는 점점 뜨꺼워집니다. 그 사랑과 빛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 세상을 풍성하게 꽉 채워나갑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8-20).

그래서 사도행전이 시작되고, 그 사도행전은 오늘도 믿는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넘치도록 풍성히 이루어 지고 있음을 믿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말씀으로 확신하는 믿음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March 16, 2024. SaturDevo

“내가 만약 집과 자동차를 모두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하면 천당에 갈까요?”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뇨,”라고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교회 청소를 매일 열심히 하면 천당엘 갈까요?” “아뇨.”

“그럼 내가 반려 동물들을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면 천당엘 갈까요?” “아뇨.”

“그럼 어떻게 해야 천당엘 갈 수 있을까요?”

그때 뒤에 앉아 있던 한 사내아이가 외쳤습니다. “죽어야 갑니다.”

항간에 카톡을 통하여 떠도는 웃스게 소리입니다. 웃스게 소리이지만 단지 한번 으쓱 웃고 말 이야기는 아니기에 옮겨 적어 봅니다.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또한 이 어린아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때 어떤 사람이었건 상관없이 교회 목사가 집례하는 장례식장에서 죽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의인이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잘 돌봐 주었는지, 죽은 사람에 대한 갖가지 찬사는 이어집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이 어린아이처럼 죽어야 천당에 가겠구나라고 확식할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롬5:1)는 사도 바울의 말이 무색합니다. 사람은 오직 죽음으로 의롭게 되는 듯 합니다.

마태복음 7:2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예수님은 거짓 믿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의 공동체에서 열심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놀라운 은사까지 발휘하는 사람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고, 그들의 교회를 향한 열심이 진실하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확신하는 그 믿음이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르다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졌으나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눅10:41-42).

자신이 확신하는 믿음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6-27).

하나님의 뜻은 말씀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확신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으로 확신하는 믿음이 아버지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