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March 26, 2022. SaturDevo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한 위격, 아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100% 하나님),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고 (100% 사람) 영원히 그러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위격적 결합(Hypostatic Union)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이기 때문에, 이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이 사람이시라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예수님 자신도 그 사실을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믿게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계시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해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는듯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복음서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는데 할애된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또한 온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1:24-25, 눅2:7, 요19:28). 그리고 게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에서 많큼 예수님이 100% 사람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구절도없을 듯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3년동안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 시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사역의 정점이 되는 십자가 사건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드시며, 마지막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평소처럼 제자들과 같이 밤시간을 보냈던 감람산 (Mount of Olives)에 오십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에게 닥칠 순간을 아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게세마니의 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누 22:40-46)라고 알고 있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게 됩니다.
이곳은 정확히 올리브 라는 산에 게세마니라는 장소입니다. 게세마니라는 말은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밤에 숙소로 사용했던 장소를 감람산 (올리브 동산)이라는 말로 표현하다가 갑자기 ‘게세마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단어의 의미와 예수님의 기도와 죽음의 의미의 유사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은 복음서의 저자들의 의도가 들어 있을 줄 압니다. 부서지고 으깨어 져서 나오는 기름의 이미지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의 이미지, 세상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멸시와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한가지로 아우르는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유월절음식을 제자들과 드신 그날은 목요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긴 하루였습니다. 요한 복음 13:1절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자니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고 바쁘고 안타까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렇게 하루를 마치신 예수님은 지치셨을 몸으로 이제 게세마니동산에서 도착하시어 “고민하시고,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 이 마지막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엔 전혀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때 떠오른 영상은 차라리 아모리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보이고,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던 야곱의 모습이 보입니다. 절박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처절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떠오르고(마 6:5-15), 그 기도가 어떻한 기도여야 하는가를 100% 사람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는 기도는 공감 하지 못하면 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삼년을 제자들과 지내며 예수님의 모든것을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왜 저렇게 고민하시고, 놀라시고 슬퍼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고 하시지만, 예수님을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Inner circle의 세 제자 조차도, 예수님이 특별한 부탁을 3번씩이나 하시는 데도 졸음에 빠집니다(마 26:38-45, 막 14:34-41). 예수님이 마태복음 6:13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외워서 읍조리는 기도는 아닌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제자들이 잠에 빠지는 행동보다 나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또 부탁 받습니다. 그러나 또한 너무도 종종 막연한 기도부탁에 마주합니다. 기도 부탁을 주고 받지 말든지, 할려면 공감할수 있는 기도부탁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는 진실한 내면 표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기도합니다.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한 예수님이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26:39). 성경에서 ‘잔’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운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성경에 예언된 것을 상징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그 일을 하셔야만 하는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이 저런 기도를 드릴수 있나 의심스럽습니다. 말씀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아들이 하실수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연약해도 나보다 더 연약할것 같은 그런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꾸밈없는 진실한 연약한 사람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마6:7) 같은 기도를 세번씩이나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중언 부언의 기도가 아니고, 절실한 기도임을 압니다. 바울이 했던 세번기도를 기억합니다(고후 12:8). 안타깝고 절실한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앞에서 감출것 없습니다.
세번째,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내 의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안에서 관철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민하시고 놀라고 슬픈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아버지께 그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자신의 뜻을 기도로 아뢰지만 (막 14:36),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트레셔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완고함과 경건한 인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기 뜻이 하늘에서 이루지게 고집하는 것이고, 후자는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도록 결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Dr. W. Thrasher). 이것은 기도의 최선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의도를 맞춘다는 것은, 내가 루저가 되고, 아버지가 윈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기도했고 그렇게 된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영광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도를 맞추는 것은 윈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너무도 인간적인 게세마니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화합하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는 가르침이시며, 또한 100%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시라는 예수님의 위격이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00% 사람으로써 예수님이 하신 게세마니 기도는 우리도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