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ugust 13, 2022. SaturDevo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모든 사건에 같은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윤회사상을 믿는 사람은 또한 또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처럼, 하데스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든가 또는 알라신의 뜻에 따라 파라다이스로 가게된다든가 또는 영혼으로 허공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힌두교와 불교는 현생의 선악간의 삶이 다음생에 어떤 삶을 살게 될것인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카르마(Karma) 사상에 묻혀 있는 사람도 있고, 무신론자들은 죽으면 모든것이 끝이다(Annihilation)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들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때,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이 나타났을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죽음은 산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어떤 영향도 줄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그럴듯한 괴변이지만,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중에도 지옥과 천국같은 사후세계를 막연히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정말로 매우 독특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경험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라고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책 <Immortality>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에 대한 모든 생각을 억누르고 마치 시간이 무제한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쿤데라의 말처럼,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17:27-30).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막연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경험과 논리에 따라 분명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종교입니다. 약속은 미리 정해 두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실일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함께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는 성경을 말합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켜서 그 약속을 이행하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핵심을 얘기한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 구원 할 사람을 정하셔서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입습니다(요6:39).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들에게 그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계십니다(요7:9). 그의 복음을 통한 구원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할 사람은 지금까지 산 사람들과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 사람들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요 7:20).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하셔야 할일은 성경에 약속대로 모두 성취되었지만, 단지 안된것이 있다면, 아직 아버지가 선택한 구원받을 백성 모두가 예수님의 그 복음을 접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이 그날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날,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러 오실텐데(재림), 그 모습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이세상 종말의 날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안에서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근거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하신 약속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죽으심과 부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1:10) 사도 바울은 경험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게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은 그 재림의 상세함을 설명합니다. 재림때는 초림처럼 조용히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4:16).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부활) 그리고 살아난 사람과 죽지않은 믿는자 모두가 “구름속으로 들어올려”(휴거) 예수님을 영접하고(4:17), 그리고 주님과 온성도는 땅으로 내려올것(3:13)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소망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을 맞았을 지라도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들이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그 소망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행복에는 불멸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삶은 영원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멸도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애매하고 모호한 불확실한 생각은 우리의 완전한 자유에 걷어 낼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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