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채

사도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September 3, 2022. SaturDevo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 했다가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맞아 죽을 위기를 맞으나, 천부장에게 구조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암살 당할 위험에 놓이자,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바울은 가이샤랴로 이송됩니다(행 21-23장). 이후 24장부터 26장이 가이샤랴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샤랴는 헤롯대왕에 의해 건설된 항구 도시로 로마 황제 시이저(Caesar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로마를 오가고, 또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오가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가이샤랴로 옮겨진 바울은 2년(AD 57-59)을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그 동안에 세번의 변론을 하는 장면이 이 세 장에(24-26) 나와 있습니다. 이 세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건이 있던 시기는 벨릭스(Felix)가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의 아내는 두루실라로 헤롯왕(행12:1)의 딸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죄가 없는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을 거스르는 것이 싫어서 그를 2년동안이나 감옥에 넣어 놓고 있었습니다(행 24:27). 당시 유대총독은 그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통치하며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기때문에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기회있을때 마다 뇌물을 받아 자기 주머니를 챙기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AD 60년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고 대신 베스도(Festus)가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유대 상황에 익숙지 않은 그에게 뇌물을 주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을 하려고 합니다(행 25:3). 베스도가 유대인들과 가이샤랴에 갔을때, 그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행 25:9). 이에 바울을 베스도와 유대인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이사(황제)앞에 가서 재판받을 것을 호소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AD 54-68 통치) 였습니다. 네로는 처음 5년은 그래도 평화롭게 통치하지만 그 후에는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통치자도 됩니다.  가이사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기전, 베스도는 황제에게 바울의 사건에 대한 편지에 쓸 인포메이션 필요하여,  유대 풍속과 종교에 익숙한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가이샤랴에 방문한 동안 바울을 불러 그의 변론을 듣게 됩니다. 이 아그립바 왕(Agrippa II)이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 왕의 아들이고, 헤롯 대왕의 증손자가 됩니다. 아그립바왕은 자기 아버지가 다스리든 땅의 대부분을 로마에 빼았기고 주변의 작은 땅을 다스리던 왕이었지만, 크라우디우스 황제때에 그로부터 예루살렘성전을 통치하고 대제사장을 임명할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세번째 변론(26장)을 아그립바와 베스도와 베스도의 참모들 앞에서 하는데,  이 변론에서 바울은 복음과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확신에 찬 연설로 왕과 총독과 고관들을 사로잡는 장면입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조상들에게 한 약속의 소망을 바라는 많은 유대인 중에 하나 라는 것을 말합니다(행26:6).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한 약속은, 메시야를 말합니다. 자기와 유대인들이 바라는 소망은 메시야가 이룰 소망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이 죽은자를 사리셨다것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묻습니다(8절). ‘너희가 바라던 메시야/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왔는데 왜 못 받아들이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거부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도 예수의 도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빛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히브리어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히브리어로 말했다는 말은 아람어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은 그리스 속담입니다. 운명을 역행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꼬집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짐승을 모는 막대기로 가시처럼 끝이 뾰족한 찌르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짐승을 모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방향으로 안 가겠다고 저를 찌르는 가시채에 뒤발질 해 보니 저에게 고통만 더해질 뿐이지 결국에는 모는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갈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즉 바울을 향한 하나님이 뜻이 정해졌는데 그것을 거역하고 있는 바울(사울)에게 하는 비유적인 경계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때, 예수님은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17-18)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9:15절 말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반응은 조롱과 교만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였고,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입니다. 이렇게 왕과 총독은 구원을 잃었지만, 300년후에 오는 콘스탄틴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황제가 되며, 로마를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고 축복된 새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6). 그것이 우리을 향한 하나님이 뜻인데 (렘 29:11) 거부하며 몸부림 친다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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