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레미야 20:2-3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January 24, 2026. SaturDevo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상황을 판단하여 진위를 인지하는 힘을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기계 문명이 최고로 발달된것 같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얼마 만큼 더 발전되고 발달될지 짐작도 할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고와 모든 방식을 인정하고 참아내든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메타모더니즘이니 하이퍼모더니즘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혼동과 혼란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공존을 얘기하지만, 선과 악이, 옳고 그름이, 흑과 백이 그리고 빛과 어둠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공존이라는 말로 미화하지만, 모든 사고와 주장과 행위가 뒤섞인 혼란한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기껏해야 생존에 불과 합니다. 세상은 생존의 기술을 외치고 찬양하고 부러워합니다. 이런 세상이 2500여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목이 곧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없수이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렘 19:15).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신흥세력인 바벨로니아에 망합니다. 앗수르로 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이 자신들이 처신을 잘해서 또는 이집트의 세력을 잘 이용해서라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이집트는 상한 갈대(열하 18:21) 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여호와도 부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는 이방신도 섬기고, 아들딸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일도 합니다. 원칙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잘 살수 있고, 부를 늘릴 수 있다면, 또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이든 어떤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있었습니다. 인식의 혼란이고 방식에 혼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모든 사람이 잘 살 수는 없습니다. 공평할 수 없고, 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레미야는 불행히도 여호와 하나님에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역을 맡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성전뜰에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을 본, 성전 총 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잡아 매질하고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둡니다. 바스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원한는 말을 여호와의 뜻인양 들려주던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불의한 권력에 밉게 보여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를 차고 성전 문 위층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수치를 당합니다. 다음날 풀어난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을 전한 바스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백성들에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들려주며, 선지자를 창피주며 자기 권세나 과시하고 쉽게 배만 불리는 전형적인 유대인 종교지도자 바스훌을 봅니다. 한편, 수치와 멸시를 참아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오르게 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를 잡아 매질하고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으로 채워두었다는 말은 곧바로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과 수모를 연상 시킵니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위는 오늘날의 광장(public square) 격이 됩니다. 그곳에서 왕은 공의를 모으고 포고를 공표하는 등 통치 행정을 이행하였고, 때로는 백성을 재판하는 자리로도 쓰였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든 사람이 볼수 있는 곳입니다. 바스훌은 그곳에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을 채워 예레미야를 밤새 세워 두었습니다.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으로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로는 마페켙(מַּהְפֶּ֗כֶת)인데, 영어로는 ‘stock’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pillory’라는 단어가 더 적합합니다. 스탁은 발목에 채우는 나무고랑이라면, 필로리는 목과 양 손목에 나무로 만든 고랑을 채워 세워놓아 사람들 앞에 수치스럽게 만드는 기구입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제외하면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당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풀려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바스훌에게 ‘두려움에 둘러 쌓인자’라는 의미의 새로운 이름 ‘마골밋사빕’이라고 하며, 바스훌과 그의 모든 집, 그의 거짓예언을 들은 모든자가 바벨론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합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종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합니다. 푸르다고 다 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마7:16).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과 그 죄악을 따라올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진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판을 자세히 들으면, 심판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 분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속에도 항상 피할 길이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절망인것 처럼 보여도, 그 속 어딘가에는 소망으로 가는 문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도그마(Dogma)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21:8).” 혼탁한 세상에서 일수록, 넓은 길보다 좁은길이, 쉽게 보이는 길보다 어렵게 보이는 길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눅13:23).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눈앞에 이익에만 유혹되지 말고, 좀 더 멀리보고, 생명의 길을 선택할 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한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