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말하는 것

마태복음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December 3, 2022. SaturDevo

복음주의의 첫번째 특징은 오직 말씀(Sola Scriptura)입니다. ‘말씀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이 사전식으로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에 따라, 또는 저자에 따라 그 사용한 어휘가 다르다 보니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른 현대 미드라쉬 (성경 해설서/ 강해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신약 미드라쉬 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한권인데 이 현대판 미드라쉬(Midrash)는 창고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우리의 성경이해를 돕기 위해서 만들어 지고 있는 글들이지만, 이런 현대판 미드라쉬에 익숙해지고 권위을 부여하면서 우리는 유대인들 처럼 유전을 만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뽑아서 같이 생활하며 자신의 복음전파와 능력을 보이시며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때, 선생(master)이 그 견습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듯, 제자들을 실습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전도를 내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승천후 그들이 맡게 될 그들의 궁극적인 사명을 위한 견습이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0장 5-15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마가 (막6:7-13)와 누가도(눅9:1-6) 각각 같은 얘기를 자신들의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디는 ‘지팡이도 가지고 말라’(눅9:3, 마10:10) 하고, 어디는 ‘지팡이 외에는 가지지 말라’(막6:8)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나갈때 먼지를 털어야 하는지, 성에서 나갈때 먼지를 털어야 하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차이나 불일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가면 이런 언어가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복음을 들려주고 전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들려주고, 전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몰두하며 복음은 간곳이 없어집니다. 교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리더들도 복음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한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음으로’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교인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왜 그를 믿어야만 천국에 가는지는 생략합니다. 입맛에 맞게 말씀을 요리하여 받아 들입니다. 그런 상황은 선교에도, 전도에도 예외가 아닐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10:5-15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절을 읽으며, 무엇이 제일 중요한 말씀인지는 생각해 보며 읽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방인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이방인에게 가라고 했는지 하는 의미, 천국 선포, 병든자 귀신들린자를 고쳐주는것, 간편하게 떠나야 하는 전도여행, 가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 가르침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 중요한 내용이지만 이 말씀이 가르치는 욧점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일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천국선포 ‘천국이 가까왔다’라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병든자 귀신들린자를 고쳐주는 것도, “천국이 가까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려고 하는 일이고, 간편한 여행을 떠나라는 것도 “천국이 가까 왔다”라는 사실을 더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사실들로 미루어 보건데(마 13장), 이때까지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도 그 사실을 몰랐고 (마 11:1-19), 제자들도 이 사실을 잊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중 많은 사람은 이 제자들처럼 자기 취향에 맞게 말씀을 받아 들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말씀하고 계신데,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는데만 정신이 팔려 천국선포는 잊어 먹고 있다면 우리는 욧점은 놓치고 허공만 치고 있는 모양이 될것입니다. 이런이들은 종종 말씀보다 경험과 연구를 통한 해설서나 강해서에서 자신들을 합리화 하는 구절들을 찾아내곤 합니다.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면 환영도 받고 칭찬도 받고, 어쩌면 돈까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만족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적한 유대인들 처럼 슬그머니 이단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방해합니다.

해설서나 강해서는 성경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적용하기 위하여 읽는 것입니다. 해설서나 강해서는 성경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성경 말씀의 욧점을 놓친다면, 유대인들같은 실수를 범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욧점은 빼놓고 지엽적인 문제로 우리의 힘을 낭비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교회 출석에만 열심이고, 왜 교회에 다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욧점은 없고 교회 마당만 밟는 사람입니다 (사1:12). 봉사는 열심히 하는 교인인데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향방없이 달음질하는 사람이며, 허공을 치며 싸우는 사람일 것입니다. †

방콕에서 볼것

사도행전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October 8, 2022. SaturDevo

지금이 방콕은 장마철이라고 합니다. 장마철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내렸다하면 단 시간에 쏟아붙는 비는 삽시간에 찻길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립니다. 열흘간의 일기예보는 한날도 거르지 않고 비를 예보하고 있습니다. 일상을 비와 함께 사는 사람들 같아도 비에 피해때문에 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합니다. 비때문에 이번주 계획되었던 일들이 모두 취소되고 미루어 졌습니다.

그래도 아침나절에는 날씨가 좋은것 같아서 방콕으로 탐험을 나서 보기도 합니다. 유명하다는 곳은 대부분 절이었습니다. “왓 (Wat)”자로 시작하는 곳은 모두 “절”입니다 (Wat Pra Kaew, Wat Pho, Wat Arun, Wat Yannawa, Wat Mangkon, etc).  템플이 이곳의 문화이고 유산이니 어쩔수 없겠지만 하여튼 눈에 띄는 곳이 대부분 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나에겐 꽤 특별한 광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MRT(Metropolitan Rapid Transit), Hua Lamphong 역에서 내려 Chinatown으로 가려고 길을 건넜는데 한 여자분이 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손짓을 하며 뭐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정신나간 사람인가 하며 옆을 지나치는데 귀에 익은 단어가 하나 들렸습니다. “예수”라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는 태국말로도 예수입니다. 무엇하는 사람인가 궁금하여 옆에 앉아 말을 걸어봅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지, 못하는 척 하는지, 또는 나를 태국사람으로 보는지, 그냥 태국말로 쉬지 않고 말을 합니다. 전화기의 구글 번역기로 몇마디 나눈것은, 그 여자분 이름이 캄랑이라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라는 말을 하며 책을 펴서 보여주는데, 구글 번역기로 번역해보니, 창세기를 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라는 말이 종종 들렸습니다. 그리고 작은 책자를 갖고 있어서 무엇이냐고 묻자, ‘거룩, 거룩, 거룩’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귀에 익은 노래라서 나도 같이 영어로 불러줍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장면에 힐끗거리며 지나갑니다. 내가 듣든지 안듣든지 상관안하고 너무 열심히 태국말을 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화가 안되었지만, 그전에 책에서 보았던, 초창기 한국목사님들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쳤다는 말이 생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길을 찾다가 우연히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신교 교회는 아니고 Romanesque Church라는 성당이었지만, 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를 보는 것도 신선한 조우였습니다. 으리으리하게 황금으로 도색된 불교 사원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지만, 결국은 태국에서도 복음이 승리할것 이라는 믿음의 씨앗들이라는 확신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4-25). †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October 1, 2022. SaturDevo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입니다 (마9:9, 10:3).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4복음서 중 어느 것도 원본 사본에는 저자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모두 익명입니다. 저자들은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복음서를 쓰고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역사를 기록한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Papias (c. A.D. 135) 나, 갈리아 리옹의 주교인 Irenaeus(c. 175)같은 초대교부의 문서는 복음서의 저자에 대한 믿을 만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태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는 그리스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이집트의 톨레미(Ptolemy) 시대부터  통치자들을 위하여 세금을 대신 징수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금을 통치자에게 내주고 어떤 지역을 할당 받아 그곳에서 자신이 받아낼수 있을 만큼의 세금을 받아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지만 또한 구약성경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에 직.간접적으로 인용된 구약성경이 99번이나 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는 일을 하던 마태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자신이 세금을 걷어 들이고 있던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불렀을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나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새로운 삶을 삽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교회의 부정과 목사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위선을 보고, 또는 자신에게 일어난 설명할수 없는 비극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할수 없는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고 극복할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한번 새겨 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따르라든가 목사를 따르라든가, 잘믿는 사람을 따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먼저 따르는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옳바로 믿는 사람, 옳바른 목사, 바른 교회는 서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이지 누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망설임 없이 “일어나 따”른 마태는 베드로나 요한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은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

주의 구원을 열방에 알리소서

시편 67: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September 24, 2022. SaturDevo

호가호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앞서고 호랑이는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러자 그들이 가는 길앞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여우보다도 훨씬 큰 곰이나 들소들까지도 도망을 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물론 그 동물들이 도망을 간것은 여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뒤에 오는 호랑이를 보고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권력자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신이 능력자인것 처럼 행세하는 것을 호가호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종종 성경을 읽다보면, 그 성경에 주인공이 “나”인것 같은 착각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기나 한 것처럼 모든것에 자신이 있어집니다. 내가 갖은 믿음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처럼 생각됩니다 (마 17:2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못할것이 없다고 믿어집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막9:23, 요 14:14). 그러나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던 것 처럼(마14:30), 우리는 다음 순간 진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방콕에 온지 두주째 입니다.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단명팀 팀원들을 만나 인사하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길을 익히고, 버스와 교통편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사역지인 선교 센터와 교회를 방문하고, 또다른 파트너팀의 팀원들을 만나 인사하고 얼굴을 익히고 하는 일로 한주를 보냈습니다.

이제 어렴풋이 나마 지역에 대한 윤곽도 잡히는 듯하여, 그 분들의 도움으로 가 봤던 곳을 혼자 가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시도해 보지만, 역시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특히 이나라의 문화 때문인지, 내가 어려움에 쳐했을때 외국인인 나에게 기꺼이 친절하게 도움은 주지만, small talk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대화를 해 보려는 나에 시도에는 무색하리만큼 거리를 두는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며 절벽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과 부딪히고, 그들과 스쳐가고 얼굴을 마주하며 드는 생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사람들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저들에게 다가가야 할지 서툽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천국예배에 참석해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이들은 복음에 마음을 열고 있지 않은지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줄수 있을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다는 믿음과 확신을 제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컴뮤니케이션의 80% 이상이 말이 아니라 제스쳐와 표정과 감성이라고 합니다. 방콕 홈에서 아침마다 나오며 인사하는 아주머니가 생겼습니다. 차타는 곳까지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주겠다는 젊은이를 알게되었습니다. 오늘은 쏭테오를 탔는데 어떤 연세드신 분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분은 태국어로 나는 영어로 했지만, 단명까지 간다는 것은 분명히 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나보다 먼저 내리셨는데, 내 차비까지 내 주시었다고 하며 손을 흔들고 가십니다. 얼떨결에 차비 신세를 졌습니다. “와우, 이런 분도 계시구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쏭테오 차를 다시 그 분과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는 차비는 내가 낼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내가 다가 갈때 얼굴을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생각지도 않게 만나는 영혼도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나에 일인줄 믿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열방이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하나님의 큰 계획의 이야기인줄 믿습니다 (계7:9). 주인공인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큰 그림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그림의 어떤 부분에 놓여 있는지를 볼수 있을 것입니다. 붓 끝이 스쳐간 한 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인것은 우리가 온전하신 하나님의 큰 계획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어 그분의 일을 마치실 줄 믿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을 등에 업고 걸어가는 여우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합니다.

시편 67:1-2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한 이유는 단지 그들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메세지가 열방에 전파되도록하게 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열방에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려는 줄 믿습니다. †

I am nowhere

고린도전서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September 17, 2022. SaturDevo

이틀에 걸쳐 열 여덟시간의 비행후 방콕 공항에 내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세좋게 오헤어공항을 출발하였지만 홈리스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내린 나를 거들떠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때문에 길이 끊겨 다음날 아침에나 나를 픽업하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고 공항에서 또 여덟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모습이야 어느 공항에서 이건 익히 보는 모습이니 어색할것은 없었지만 피곤은 한데 잠이 오지 않고 정신은 점점 맑아졌습니다. 분명히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선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땐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선교는 문화를 넘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몸은 문화를 넘어 왔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I am nowhere.

아침에 주위도 돌아보고 운동도 할겸 거리를 나가 보았습니다. 부산하고 정리되지 않았지만 바쁩니다. 집집마다 무언가를 팔고 있습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섞여서 질주하는 좁은 거리를 간신히 비켜 사람들이 오갑니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는 삶에 냄새가 납니다. 나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고, 내가 말을 붙일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난감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I am nowhere.

빌립보서 2:6-8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자신이 거하시던 하늘을 떠나 이땅에 오셨을때 얼마나 어색하셨을까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I am nowhere라고 생각하지 않을셨을 것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줄을 확실히 아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알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디에 와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I am nowhere.

20세기 초 중국선교사 였던 James Frase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자라게 하는 것은 중국이나 영국에서 드리는 믿음의 기도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실제 현장에서 하는 만큼 해외선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리고 내가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간절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태국은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이고, 4.5%가 모슬렘, 그리고 1.5%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포함한 수치고, 개신교는 0.7%라고 합니다. 그런데 태국에서 그 개신교의 선교역사가 거의 200여년이 된다는데 아직 0.7%뿐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I am nowhere.

이 아침 기도합니다. 제게 길를 가르치시고, 확신있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라고…(시119:33).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못 믿는 사람

에스겔3:17-19.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September 10, 2022. SaturDevo

궁극적으로 세상은 둘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마태복음 25:31-46은 그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그들을 구분할 수 없으나, 주님의 눈은 그들을 분명히 구분하실 것이며, 구별된 의인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고, 안 믿는 사람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마25:31), 즉 재림하셨을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하실 일이고, 지금 우리의 할 일은 셋으로 나누어진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못 믿는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 마가복음 16:15-16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눈은 안타깝게도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을 분명히 구분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인줄 알지만 안믿는 사람일수 있고, 안믿는 사람인것 같지만 선택받은 사람일 수 있고, 저 사람이 복음을 들은 사람인지 안들은 사람인지 구별하기 힘듭니다. 주님이 구별하실 일입니다. 단지 믿는 사람은 그 삶에서 믿는 사람의 증거가 나올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그 삶에서 안믿는 증거가 나올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의 논리로 세상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도표는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C). 또하나는, 복음을 들었지만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U).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O).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복음이 들려진 후면, 세상은 둘로 갈라질 것이고, 그때 예수님은 다시 오실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에스겔서 3:17-19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운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 믿는자들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후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인해 영벌에 처해질 것이나, 너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듣지 못하여, 믿지 않음으로 인해 영벌에 처해진다면, 그 피값을 너희 손에서 찾을 것이다.’

계시록 마지막에서 두번째 절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하루속히 온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낙원에 들어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래 링크는 OMF에 있는 저의 웹 페이지 입니다. 링크를 누르시면 저의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partnerhub.omf.org/servejj2

가시채

사도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September 3, 2022. SaturDevo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 했다가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맞아 죽을 위기를 맞으나, 천부장에게 구조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암살 당할 위험에 놓이자,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바울은 가이샤랴로 이송됩니다(행 21-23장). 이후 24장부터 26장이 가이샤랴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샤랴는 헤롯대왕에 의해 건설된 항구 도시로 로마 황제 시이저(Caesar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로마를 오가고, 또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오가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가이샤랴로 옮겨진 바울은 2년(AD 57-59)을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그 동안에 세번의 변론을 하는 장면이 이 세 장에(24-26) 나와 있습니다. 이 세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건이 있던 시기는 벨릭스(Felix)가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의 아내는 두루실라로 헤롯왕(행12:1)의 딸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죄가 없는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을 거스르는 것이 싫어서 그를 2년동안이나 감옥에 넣어 놓고 있었습니다(행 24:27). 당시 유대총독은 그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통치하며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기때문에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기회있을때 마다 뇌물을 받아 자기 주머니를 챙기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AD 60년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고 대신 베스도(Festus)가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유대 상황에 익숙지 않은 그에게 뇌물을 주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을 하려고 합니다(행 25:3). 베스도가 유대인들과 가이샤랴에 갔을때, 그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행 25:9). 이에 바울을 베스도와 유대인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이사(황제)앞에 가서 재판받을 것을 호소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AD 54-68 통치) 였습니다. 네로는 처음 5년은 그래도 평화롭게 통치하지만 그 후에는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통치자도 됩니다.  가이사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기전, 베스도는 황제에게 바울의 사건에 대한 편지에 쓸 인포메이션 필요하여,  유대 풍속과 종교에 익숙한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가이샤랴에 방문한 동안 바울을 불러 그의 변론을 듣게 됩니다. 이 아그립바 왕(Agrippa II)이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 왕의 아들이고, 헤롯 대왕의 증손자가 됩니다. 아그립바왕은 자기 아버지가 다스리든 땅의 대부분을 로마에 빼았기고 주변의 작은 땅을 다스리던 왕이었지만, 크라우디우스 황제때에 그로부터 예루살렘성전을 통치하고 대제사장을 임명할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세번째 변론(26장)을 아그립바와 베스도와 베스도의 참모들 앞에서 하는데,  이 변론에서 바울은 복음과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확신에 찬 연설로 왕과 총독과 고관들을 사로잡는 장면입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조상들에게 한 약속의 소망을 바라는 많은 유대인 중에 하나 라는 것을 말합니다(행26:6).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한 약속은, 메시야를 말합니다. 자기와 유대인들이 바라는 소망은 메시야가 이룰 소망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이 죽은자를 사리셨다것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묻습니다(8절). ‘너희가 바라던 메시야/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왔는데 왜 못 받아들이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거부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도 예수의 도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빛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히브리어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히브리어로 말했다는 말은 아람어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은 그리스 속담입니다. 운명을 역행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꼬집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짐승을 모는 막대기로 가시처럼 끝이 뾰족한 찌르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짐승을 모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방향으로 안 가겠다고 저를 찌르는 가시채에 뒤발질 해 보니 저에게 고통만 더해질 뿐이지 결국에는 모는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갈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즉 바울을 향한 하나님이 뜻이 정해졌는데 그것을 거역하고 있는 바울(사울)에게 하는 비유적인 경계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때, 예수님은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17-18)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9:15절 말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반응은 조롱과 교만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였고,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입니다. 이렇게 왕과 총독은 구원을 잃었지만, 300년후에 오는 콘스탄틴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황제가 되며, 로마를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고 축복된 새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6). 그것이 우리을 향한 하나님이 뜻인데 (렘 29:11) 거부하며 몸부림 친다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입니다

요한일서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August 27, 2022. SaturDevo

젊은 부부을 처음 만나면 종종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냐?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는 아이스브레킹(Ice breaking)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럴때 어떤 사람들의 대답은 ‘저 사람이 나를 먼저 좋아했어요. 그래서 노총각/노처녀를 내가 구제해 주었습니다.’라고 과장을 하며 같이 웃곤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의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하나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먼저 죄인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요일 4:19)’.

요한의 편지를 읽다보면, 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는지 알게 됩니다. 그는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의 눈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설명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떻게 사랑하나(How to love)를 가르치고 있다면,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사랑의 실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우리와의 관계성입니다. 즉 사랑은 상대을 아는것과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유한준이란 사람은 “아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知則爲眞愛 지즉위진애)”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보다 2000년전에그의 편지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성경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 만큼 사랑하시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시었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우리를 구원할수 없음을 아시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8:21)하고 노아에게 약속하십니다. 죄인이면서도 어처구니 없게 인간은 죽음이라는 숙제를 놓고 수천년을 갈등합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실체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 자체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9-10).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히 아셨고,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원하는 문제를 풀어주시기를 기뻐 하시어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람의 사랑>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알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요일 4:7-8) 하십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것 만큼 하나님을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를 통하여 알려주고 계십니다. 자신이 아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듯,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실지 한번쯤 생각을 정리해 보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게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0-21). 형제를 사랑하는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것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온전한 사랑>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만날때, 그곳에는 온전하고 충만한 기쁨이 있게됩니다(빌2:4).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를 행하는 것이고, 이것이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 복음에 완성이 됩니다(요일 4:14-15). 즉 세상에 있는 우리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his love is perfected in us), 세상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By this is love perfected with us)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될때 온전한 사랑의 완성을볼수 있습니다 (요일 4:12, 17).  

이 온전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게하고(4:18), 심판의 날에 대하여는 담대함을(4:17) 가지게 합니다. †

<아래 링크는 OMF에 있는 저의 웹 페이지 입니다. 링크를 누르시면 저의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비전과 선교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August 20, 2022. SaturDevo

“비전이 없으면 우리는 망하고 선교가 없으면 길을 잃을 만큼 비전과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잠 29:18; 왕하 21:1-9). 비전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와 자원을 함께 제공합니다(행 9:1-19). 비전은 또한 우리의 사명을 위한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보여줍니다(행 16:9-10). 비전은 침묵하고 싶을 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행 18:9).”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미래에 “우리가 무엇이 될수 있는가”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지금 현재로써의 그들이 처한 상황과 상태만 보는것이 아니라, 미래에 그들이 될 수 있는 상황과 상태도 함께 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비전이 없는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14:2-4). 하나님의 명을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40인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 하는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입니다. 잠언 29:18절의 말씀을 KJV 성경으로 보면,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but he that keepeth the law, happy is he”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과 상태만 보고 행동하다가, 40년을 광야에서 헤메게 됩니다(Perish). Perish 라는 히브리 단어는 ‘to go back’이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이 있는 비전은 하나님 안에 있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비전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것이 비전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전한 확신으로 그 약속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결코 변하지 않는것을 알기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믿는 사람은 기도안에서 그의 약속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비젼입니다. 시편 32:8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비젼을 갖을수 있게 되고, 어떤 상황아래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영혼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0:28).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될 때 까지 우리를 지켜 보실것입니다(마29:18-2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인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도 십자가에서 그의 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리스도안에서 새 삶을 주시고, 복주신것 처럼, 또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듣지 못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삶을 주시고 복주시길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에서 이렇게 디모데에게, 그리고 또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우리의 비전은 Making disciples who make disciples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예수님의 제자을 만드는 것입니다). OMF는 이 일을 하는 선교단체이고, 저의 비젼은  그 단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리신 태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들이 또 다른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비젼을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래 링크는 OMF에 있는 저의 웹 페이지 입니다. 링크를 누르시면 저의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기독교적 태도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ugust 13, 2022. SaturDevo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모든 사건에 같은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윤회사상을 믿는 사람은 또한 또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처럼, 하데스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든가 또는 알라신의 뜻에 따라 파라다이스로 가게된다든가 또는 영혼으로 허공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힌두교와 불교는 현생의 선악간의 삶이 다음생에 어떤 삶을 살게 될것인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카르마(Karma) 사상에 묻혀 있는 사람도 있고, 무신론자들은 죽으면 모든것이 끝이다(Annihilation)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들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때,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이 나타났을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죽음은 산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어떤 영향도 줄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그럴듯한 괴변이지만,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중에도 지옥과 천국같은 사후세계를 막연히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정말로 매우 독특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경험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라고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책  <Immortality>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에 대한 모든 생각을 억누르고 마치 시간이 무제한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쿤데라의 말처럼,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17:27-30).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막연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경험과 논리에 따라 분명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종교입니다. 약속은 미리 정해 두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실일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함께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는 성경을 말합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켜서 그 약속을 이행하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핵심을 얘기한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 구원 할 사람을 정하셔서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입습니다(요6:39).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들에게 그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계십니다(요7:9). 그의 복음을 통한 구원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할 사람은 지금까지 산 사람들과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 사람들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요 7:20).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하셔야 할일은 성경에 약속대로 모두 성취되었지만, 단지 안된것이 있다면, 아직 아버지가 선택한 구원받을 백성 모두가 예수님의 그 복음을 접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이 그날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날,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러 오실텐데(재림), 그 모습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이세상 종말의 날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안에서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근거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하신 약속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죽으심과 부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1:10) 사도 바울은 경험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게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은 그 재림의 상세함을 설명합니다. 재림때는 초림처럼 조용히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4:16).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부활) 그리고 살아난 사람과 죽지않은 믿는자 모두가 “구름속으로 들어올려”(휴거) 예수님을 영접하고(4:17), 그리고 주님과 온성도는 땅으로 내려올것(3:13)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소망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을 맞았을 지라도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들이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그 소망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행복에는 불멸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삶은 영원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멸도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애매하고 모호한 불확실한 생각은 우리의 완전한 자유에 걷어 낼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요.†

<아래 링크는 OMF에 있는 저의 웹 페이지 입니다. 링크를 누르시면 저의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