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그는 누구인가?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October 30, 2021. SaturDevo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전체을 단순 명료하게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기대

복음서: 나타나심

사도행전: 선포

서신서: 설명

계시록: 완성

유명한 신학자 브라이언 채펠(Bryan Chapell)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은혜는 깜짝 놀라게 하는 jack-in-the-box (뚜껑을 열면 어떤 물체가 튀어나오는 장난감)처럼 신약성경에서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백성들은그리스도의 은혜를 이해하고 받을 준비를 수천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히브리서는 성경의 큰 줄거리인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연속과 진보를 한 눈에 보게하는 훌륭한 한편의 설교 편지입니다. 수천년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중해 왔던 모세보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제도보다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더 우월한지를 현대인의 사유에 맞는 논리 정연한 신학 에세이처럼 쓰여진, 신약에서 가장 세련된 책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1장-10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하는 이유를 말하고 (10장 중간부터 12장), 마지막으로 어떻게 적용할지를 말하는(13장) 설교 같은 책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온전한 사람이십니다 (1:1-14, 2:5-18).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존재(person)으로 봅니다 (마26:63). 같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가치와 능력과 권위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른것은(1:5)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치와 능력과 권위에서 하나님과 같다(1장)는 것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로 부르십니다 (2:11).  여자에게 나시고, 육신을 가지시고, 생각하고 느끼시고 행하시는 모든 면에서 사람이십니다. 그 이유를 2:17-18절에,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죄를 대신 값으시기 위하여 100%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두 본성(100 %하나님, 100%사람)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을 우리는 Hypostatic Union (위격적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2.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한 대 제사장이십니다(1:3; 2:10–18; 4:15–16; 9:11–10:19).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선언되는 비교 모티브는 이 책의 주요 수사 전략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비교급 언어을 25번이나 사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집에 종인 모세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의 희생으로 드려진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 매년 드리는 구약의 희생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모든 사람의 죄을 대속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단 한번의 제사(십자가)로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하나님과 화해케하여 믿는 자들로 담대히 하나님앞에 나갈수 있게 하신 제사장이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십니다(1:1–14).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도 ‘나를 본자는 (하나님)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시었던 분으로 창조사역에서 아버지의 일을 손수 하신분이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운데 계시며 이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하는것 손끝하나 움직이는 것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수 있도록 일하시고 간섭하시는 온 세상의 주인이고 통치자이십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을 예수님은 ‘형제’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형제라면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빠 챈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빠의 지위와 능력과 권력를 아들이 그 삶을 살아가는데 편의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아빠 찬스’를 사용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빠찬스는 세상 아빠찬스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고 파워있는 찬스입니다. 어떻게 이 찬스를 우리 삶에 적용할지는 13장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불의를 벌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불의를 저지른 사람를 기뻐하십니까?

스바냐3:15,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October 23, 2021 SaturDevo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 어거스틴이 처음 말하였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써서 더욱 유명해진 말입니다. ‘참으로 괜찬은 말인것 같은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이 그렇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다른 말로 하면 ‘마지막 날’이 되고, 심판의 날, 또는 종말의 날이 됩니다. 1:2-3:8까지는 무시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스바냐 선지자는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1:2)라고 선포하시고, 그 뒤로 상세하게 어떻게 벌하실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도 심판을 받고, 모든 열국 백성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의 언어로하면, ‘이 땅위에 죄인 아닌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롬3:10)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1:7) 하십니다. 총을 들고 ‘모두 꼼짝 마’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냥 난사하지 않고 잠시 틈을 줍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1:18). ‘빠져 나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겸손한 자는 숨김을 얻을 것이라’(2:3)고 귀뜸합니다. 작은자부터 큰자까지, 지도자, 재판관, 제사장까지 모두가 불의를 행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부끄럼없이 행한 죄악을 인해 벌할 것을 정해 놓고 벌 받을 날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3:8).

스바냐 선지서는 3장의  짧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 선지서는 대선지서의 축약판입니다. 스바냐선지서는 성경의 보편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심판(1:4–13; 2:2; 3:7)과 미래 심판(1:1–3, 14–18; 3:8)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언어 (히 9:11–14, 27–28; 10:11–14)가 있습니다. 대선지서에서 다루는 중심주제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1장과 2장에서 언뜻 언뜻 비춰지던 작은 소망이 3:9-13절에서 구체화됩니다. 죄에 잡혀있는 모든 사람들을 잠잠케 하신 하나님은 “내가”(여호와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3:9),  내가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3:11)이고,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3:12), 내가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 (3:13)이 하리라고 하십니다. 불의 한 자들을 벌하시려고 잡아놓고, 회개하여 겸손케 하시고, 그들이 벌받지 않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내가”) 모든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그스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바 된 바로 그 일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 사람들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즐겁게 노래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3:17).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받을수 있는 모든 일을 이루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받는 일에 우리가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은 죄와 죄를 지은 사람을 분리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본질입니다. 영과 육이 분리될 때, 영에서 분리된 육은 더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죄는 영이 육을 사용하여 짓습니다. 따라서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죄인이 사람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 이유는 죄인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겸손케 되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써 죄인 대신 죽으심으로 그 ‘가능성’을 실체화시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내릴 벌을 제하시고, 그 원수인 죄의 영를 내어 쫓으시고 하나님의 의의 영을 소생시키시고, 이들의 왕이 되어 그 가운데서 이들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즐거이 노래하십니다.

스바냐 선지서의 하나님은 이렇게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시며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October 16, 2021. SaturDevo

기독교의 매력은 second chance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역대기는 열왕기서 다음에 나오는 역사서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에는 이 역대기가 성문서 (Ketubim)로 분류되며 제일 마지막 책이 됩니다. 역대기의 히브리성경 이름은 ‘역대지략’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대상27:24). 이 역대지략이 칠십인역(Septuagint)로 번역될 때 ‘유대왕에 관하여 빠진 것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고, 이 이름은 기독교성경에서 역대기가 열왕기 다음에 놓이는데 한 역할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제롬이 번역한 Vulgate 성경에서 ‘총체적인 신성한 역사의 역대기’라는 제목을 얻게되고, 여기에서 ‘역대기’라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책제목을 갖게됩니다. 이 위치와 제목의 변경은 내용은 같을 지라도 역대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문학적 해석에서 여러가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서와의 관계를 보면, 기독교성경에서는 역대기가 에스라-느혜미야서 앞에 나오는가 하면, 히브리성경에서는 에스라-느혜미야서가 역대기 앞에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성경을 읽는 사람은, 칠십인역의 책 제목대로, ‘열왕기와 반복되는것도 있지만, 열왕기에서 빠진 것들을 쓴것이로구나. 이스라엘 왕정에 역사는 열왕기와 역대기 두가지가 있고, 이에 이어, 에스라 느혜미야로 이어지는 구나’ 하고 생각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을 읽는 사람은 ‘우리가 다 아는것을 성경 끝에다 왜 다시한번 읽게 만들었을까?’를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에 질문이 ‘무엇이 잘 못 되었나?’였다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씌여진 역대기의 질문은 ‘이제 어떻게 하지? (Now what?)’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고레스 왕의 공포로 (대하 36:22-23, 스1:3)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생활에서 자신들이 떠났던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종교적인 일에서는 자치권은 허락 받았으나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는 총독의 감독하에 있었습니다. 온전한 독립국가는 아니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은 BC 538년에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입니다(에스라 1장). 이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스3:8).   그리고 2차귀환은 457년에 에스라와 함께 이루어지고 (스7:1-10), 3차귀환은 445년 느헤미야와 이루어집니다(느1:2).  유다백성이 포로로 잡혀 떠난 땅은 모든것이 무너진 황폐한 땅이 됩니다. 다른 민족들이 들어와 살았지만 건설하고 정비한 땅은 아니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의 정착은 많은 난관과 부디쳐야 했습니다. 성전도 세워야 했고, 살집을 세워야 했고, 정비된 공동체를 마련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538년 시작된 성전건축은 유다백성이 잡혀간후 그땅에 살던 들어와 살던 사람들의 방해로(스 4장)  20여년을 지체해서 515년에야 완성하게 됩니다(스6:15).  에스라는(스7장)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진통을 격어야 했습니다(스 10장).  느혜미야는 성벽을 건설하지만, 사마리아의 산발랏과 에돔사람 도비야와 아스돗사람들은 방해공작을 합니다 (느4:1-8). 느헤미야의 용기와 지혜로 52일만에 성벽 공사를 끝내지만, 그 성벽이 오죽하였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와서 여러 공사에 내 모는 지도자들을 원망하고 유다와 차별한다고 불평하고, 배고프다고 부르짖습니다, (느5:1-5).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땅은 그들이 떠났던 땅과는 딴 판입니다. 그들의 삶도 생각했던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Now what?’이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왔는데, 포로 생활보다 더 힘듭니다. 절망합니다. 의욕도 잃었습니다. 성전도 세우고, 성벽도 세웠지만 그것때문에 더 나아진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을 억누릅니다. 부자는 가난자를 핍박합니다. 불공평이 판을 칩니다 (말라기서).

이런 상황에서 역대기는 씌여집니다. 역대기는 크게 세파트로 나눠집니다. 역대상 1-9장까지는 끝없는 족보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에서 찾아내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두번째는 역대상10장부터 역대하9장까지 는 다윗과 솔로몬과  성전 이야기가 자세히 언급됩니다. 마지막 세번째 파트는 역대하 10-35장까지 나머지 유다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포로에서 돌아와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역대기기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헤메고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를 들려주었던 모세처럼, 이스라엘 역사를 들려주며 그들의 역사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한번 일깨웁니다.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과 성전은 열왕기에서 보다 더 자세히 촛점이 맞춰집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아사와 여호사밧 히스기야와 요시아에 대하여도 다른 왕들에 비해 더 많은 설명을 할애합니다. 열왕기에서 므낫세는 유다를 망친 역적이지만, 역대기에서는 그런 죄인중에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설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하33:12-19). 이렇게 역대기는 다윗 왕과 솔로몬 성전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끝없는 족보에서 찾아낸 다윗과 <첫째 파트>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기억나게 하고 솔로몬 성전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7:14) <두째 파트>. 그리고 세째 파트에서는 하나님앞에 신실했던 왕들보다 불신의 왕들이 더 많지만, 불신의 왕중에도 유다에 돌이킬수 없는 심판을 가져오게 한 므낫세도 회개하였을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모습도 언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장의 끝부분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이야기합니다. 70년후의 유다에 관한 일(렘 25:12-13)과 믿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역대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 희망과 가능성을 알고 다시 일어서라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구절은 슬럼프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약속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올라 갈 지어다”(Let him go up/ESV) 라는 말로 끝납니다.

신약으로 이어지는 마태복음은 또 족보의 나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내는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예 31:31-33)의 성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를 맺으신 유다집, 다윗의 자손이시고,  진정한 왕이고, 대제사장이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성전,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수 있는 힘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올라갈 지어다 (Let him go up).” 히브리말로는 “ וְיָֽעַל (와야알)”입니다.

복음과 상관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빌레몬서 1: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October 9, 2021 SaturDevo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댈때 / 당신은 나를 들어 올리십니다, 내가 될수 있는 나보다 훨씬 나은 나로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Secret Garden의 “You raise me up”은 오네시모가 읊었을 법한 노래입니다. 빌레몬서는 한장 뿐이 안되는 짧은 책이지만 복음의 작동원리와  복음이 어떻게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는지의 실제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빌레몬서의 주제는 용서와 화해입니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갔습니다 (15절). 그러나 어찌 어찌하여 오네시모는 로마에 있던 사도바울을 알게되고, 크리스찬이 되어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절).  그리고 변화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편지를 써서 들려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 편지는 빌레몬에게 그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이 나은 아들처럼 대해 줄것을 부탁합니다 (17절). 빌레몬이 그 편지을 읽고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주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 편지가 초대교회들에서 계속해서 읽혀지고, 성경의 정경이 된것으로 보아,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오네시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요1:1) 이땅에 오시어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엡1:7)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를 (창3:22-24)  다시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고 (엡2:16), 새삶으로 인도하시고(롬 6:4) 또 영생으로 인도하시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작동원리입니다. 빌레몬서는 이 원리가 우리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망에 대해 매우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으나 (15절, 18절) 빌레몬에게 책임 (accountability)있는 종으로써 도망친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망간 오네시모는 로마로 가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입니다. 즉 바울을 만났다는 말은 오네시모가 복음을 접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 (11절)”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에 가서도 자신있게 말 할수 있는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복음을 접한 사람은 변합니다. 죄인이 의인이 됩니다.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이 됩니다. 사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됩니다. 미움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되고,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이 됩니다. 복음을 만나고도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가짜 복음에 연결되었거나, 그 연결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앞에 서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도망 노예이고, 주인 앞에 죄인입니다. 1세기 로마 사회에서는 도망 노예가 잡히면 그 주인에게 보통 매질을 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갇히고, 심지어는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 노예이기에 분명히 벌을 받아야 마땅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내민것은 바울의 편지였습니다. 복음의 사도인 바울의 편지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16절) 영접할 것을 부탁 합니다.

성경에는 그 종들을 회계, 또는 심판 하는 주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마 18:21-35, 눅19장). 히브리서 9:27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며 우리가 죽은 후에 제일 먼저 맞다트릴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창조주 하나님께 책임(accountability)가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 주인 빌레몬 앞에서 도망갔던 것에 대하여 회계 (잘, 잘못을 따지는것)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하여 회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0)라고 단정합니다. 요한 복음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붙잡아다 놓고, 예수님께 심판할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돌로 치라’라고 율법대로 판결하시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9)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도  사람중에 ‘나 죄없소’하고 손들고 나올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불 연못에 던져지는(계20:15) 영벌입니다 (마25:46). 그러나 죄인 오네시모에게 복음의 사도 바울의 편지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믿는자에게는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킵니다. 바울의 편지로 말미암아 빌레몬이 종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했던것 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모든 믿는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히 2:11-12),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십니다.

C. S. Louis는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할을 말하며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회개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용서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복음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복음은 자신이 오네시모라고 생각하는 용기있는 사람에게 만 상관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것이 정당한가?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October 2, 2021. SaturDevo

‘라일리’는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 다른 차를 들이 박고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길바닥에 앉아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다른 차를 운전 했던것 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고 구급요원들은 인공호흡을 열심히 시도하다가 포기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일리는 절망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합니다. 라일리의 상처를 보러온 경찰은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합니다. “기도하는 길에, 술 취해 음주 운전하던 녀석은 상처만 약간 나고 멀쩡한데,  죄없는 젊은 애들을 왜 자꾸 데려가는지 하나님께 물어봐라” 라고 이숙거립니다.

그 경찰관처럼, 하박국 선지자도 이해할수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따지고 있습니다. 죄악과 패역으로 팽배한 세상, 강포가 난무하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설 자리를 잃고 하나님의 율법은 헛소리가 되고 정의는 전혀 시행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1:2-4)하고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평하고, 선하시고 자비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욥이 경험한 하나님이 그렇지 못한것 처럼 보였듯이, 하박국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도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작은 욥기이고, 큐티 노트입니다. 내용면에서는 작은 욥기같고, 형식면에서는 개인적인 큐티노트 같습니다. 욥의 관심이 욥의 개인적인 일이었던 반면, 하박국의 관심은 국가적, 사회적 관심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사역을 하며 설교를 한것도 아니고, 악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것도 아닙니다. 악으로 꽉찬 세상을 보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따지듯 두번 질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1장, 2장),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을 보며  감사 (3장)하는 형식입니다. 하박국의 큐티입니다.

사회, 정의가 상실된 패역한 국가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경험한 죄악이 넘치고 정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유다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라는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왕의 노력으로 무언가 되는가 싶더니, 요시아의 죽음으로 도로 수포로 돌아가고 우상들이 판을 칩니다. 거기에 신흥세력 바벨론은 앗시리아를 멸망시켰고, 곧 유다를 덮칠것이고, 포로가 되어 70년을 지내야 할 상황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악한 세상속에서 고통받는 의인을 왜 구원하지 않습니까 (1:2)’ 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 즉 바벨론 느브갓네살을 일으켜 너희 강포한 자들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1:5-11). 하박국은 더 헷갈립니다. 물론 유다가 죄도 짓고, 악하고, 강포한것도 맞는데,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들을 벌하겠다고 더 악한 사람들을 들어 덜 악한 사람들을 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하고 따집니다 (1:13). 하나님의 대답은2:3-4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묵시’는 하나님이 하박국을 통하여 유다사람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죄인을 반드시 벌하신다고 합니다. 반드시입니다. 의인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마 자기가 의인인줄 알았든것 같습니다. 유다사람이 의인이라고 생각한듯 합니다. 기도중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다시한번 깨달으며(3:3-15), 간구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진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부어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대로, 그 진노중에도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인하여 죄인들을 향하여 긍휼을 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 만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브루스 허트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몇 사람들에게 종이를 한장 주고 그 위에 곡선을 그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곡선을 그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직선을 그리라면 모두가 자를 대고 똑 같은 직선을 그릴수 있습다. 욧점은 이것입니다. 죄는 수천 수만가지 틀리지만 의는하나님의 말씀 한가지입니다. 자를 대고 그려야 온전한 직선을 그릴수 있듯이, 믿음이 있어야만 의인이 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 3:11). 자를 대고 그리지 않고는 온전한 직선을 그을수 없는 것처럼, 율법을 행하므로 하나님앞에서 의롭게 될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다는 믿음으로만 살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이 복음을 바라본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3:17-19)

사고 현장의 경찰관은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것이 정당합니까? 대답은 ‘정당하지 않습니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정당하게 되었습니다. †

열왕기, 이스라엘 역사인가? 성경인가?

열왕기상 2:1-4,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September 25 2021. SaturDevo

“조상들에게 일어난 일은 그 후손에게 일어날 일의 징조이다 (ma’aseh avot siman l’banim)”라는 말은 유대 전통에서 가르치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세 철학자이며 랍비인 나크마나이데스(람반)는 이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 아들들에게 일어난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사람은 거인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하나님을 잘 믿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축복받은 사람으로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맞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은 사람은 그것이 다윗의 모든것이 아님을 알것입니다. 밧세바와의 불륜으로인해 받은 하나님의 심판(삼하12:10)대로, 그의 말년이 내리막을 치닷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때는 왕국이 둘로 갈라지는 증상까지 보입니다 (살하 19:40-20:2). 다시말하면, 다윗은 일생은 열왕기 상하의 축소판 입니다.  다윗에 이어 솔로몬왕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루지만 다윗과 솔로몬으로 부터 싹튼 죄악은 그 후대 왕들을 통하며 점점 타락해져 가고 종국에는 남, 북 왕국이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왕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까지 허물어 지는 종말을 맞습니다.  그 다윗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그의 후손들에게 일어나며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해가는 상황을 그린 열왕기 상하는 유대 전통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질서 체제(주권)를 세웁니다. 그리고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는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정체제의 국가가 완성 됩니다. 주권과 백성과 땅을 갖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통치(사사를 통하여) 받고 있던 이스라엘백성은 사무엘때에 와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다른 나라들 처럼, 왕을 갖게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왕을 갖게되고 그 뒤를 다윗이 잇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짖고, 주위의 모든 나라들을 아우르는 이스라엘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들에게는 통치 이념이랄 수 있는 모세로 부터 여호수아와 (여호수아서 23–24장)와 사무엘과 (사무엘상 12장), 다윗과 (열왕기상 2:1–9), 솔로몬 (열왕기하 8:12–61)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열왕기 첫 머리에 나오는 오늘 말씀 열왕기상 2:1-4입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중대한 역사적 시점마다 언급되는 이 말씀은 신명기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특히 신명기 17:14-20,27-28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받는 복과 불순종하여 받는 저주)은 열왕기 상하의  왕들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 분석하는 원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를 신학적 관점에서 본 역사라고 말합니다.

열왕기는 다윗의 통치 말년부터 유대의 마지막왕 여호와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놓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사람들은 무슨일을 해 나가다가 제대로 잘 안되어갈때, 그들이 지나온 길을 되집어 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디서 부터 틀렸나? 그리고 하는 말은, ‘기본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이것이 열왕기의 결론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망했나? 무엇이 잘못되었나?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열왕기의 메세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굳게 잡자. 결코 그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그후 이스라엘은 포로이후의 역사를 이어가지만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약속(창3:15),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창 12:1-3), 다윗에게 했던 약속(삼하 7:5-15)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왕이 되시고 (다윗에게 했던 약속의 성취),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율례를 온전히 지키시고,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어 온전한 의인으로써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약속의 성취), 부활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복의 근원(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이 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타산지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이라는 남의 나라에 역사지만, 그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는 성경입니다. 열왕기의 메세지는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입니다. 끝을 보기 전에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를 쫓는 대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쫓는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축복을 간과하지 않는 지혜입니다. 믿음에 아버지가 되는 지혜입니다. †

크리스찬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September 18, 2021 SaturDevo

디모데 전서 3:14-15절은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 즉 부름받은 성도들입니다. 바울은에베소교회를 떠날때  디모데를 그곳에 머물게 했는데 (1:3) 그 이유는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1:3-4)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경계하고(1장 & 6장) 복음안에서 경건한 삶을 북돋우게 (2-5)하기 위하여 였습니다. 즉 교회리더로써 또는 목회자로써 디모데에게 주고 있는 사도바울의 지시사항은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고, 복음안에서 교인들이 경건의 삶을 살도록 장려하고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디모데전서 3:16절은 그 일을 하는데 디모데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이 편지에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경건한 삶’이란 말을 우리는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이 좋고 건전한 삶이란 생각은 드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냐 하고 질문을 받는다면, 언뜻 대답이 나올듯하지는 않습니다. 국어사전은 경건의 뜻을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한 것이고 설명합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촐랑대지 않고 모든일을 진지하게 대하는것을 의미하는줄 압니다.  한국적 또는 동양적인 경건입니다. 경건을 영어성경은 ‘Godli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맞는 방식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얘기하며 디모데서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에서 언급하는 경건의 삶은

  1. 법과 규칙을 지키는 삶(1:9)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세상의 규칙과 법을 지키는 것은 평안한 삶과 기도를 잃지 않는 용기입니다.
  2.  기도의 삶(2:2)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인내와 온유로 선한 삶(3:1-13)를 사는것입니다. 이것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4.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확신하는 삶(4:5)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디모데 후서 3:14-17에서 더 자세히 언급합니다.  
  5. 자족하는 삶 (6:6)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러나 경건의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아는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 3:16절입니다. 3장 16절은 ‘경건의 비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비밀이 어쨋다는 것인지, 왜 경건의 비밀이 크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감사하게도, NIV 성경이 그 부분을 잘 풀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NIV를 번역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진정한 경건의 원천이 되는 비밀이 크다(great)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 다음 나오는 6줄이 이해가 갑니다. 16절의 두번째 문장 6줄은 그 비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정확하게 복음의 욧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경건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큰 비밀이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기도교인들 뿐만 아니라, 안믿는 사람들도 경건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가나 마음수련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게 살기 위하여 고행이나 극기훈련도 합니다. 그 명칭이나 형태가 어떻게 되었든 이런것들과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 바울은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1:6-7) 거짓 선생이고 거짓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 디모데후서 3장 6절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경건한 삶을 살려는 노력은 화병에 꽃힌 꽃과 같을 것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은 불신이고 자만입니다. 진정한 경건한 삶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복음으로 빚어지는(shaped) 삶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빚어지는 삶은,

  1. 우선 우리의 죄성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경건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3:16절을 통하여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의 능력있는 삶이고,  경건의 비밀이고, 성화의 복음이입니다.  복음은 그 본질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삶에 경건을 낳습니다. 믿음과 행동 사이에 합당한 분리는 없습니다(약2:14).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 1:26),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우리에게 밝혀진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비밀의 능력을 소홀히 흘려 버리지 않길 소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8). †

나훔(위로)은 어떻게 위로(나훔)가 되나?

나훔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September 11, 2021. SaturDevo

20년전 오늘 9.11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뉴욕의 거대한 빌딩 두개가 테러를 당해 무너져 내리고 아수라장이 되며 무고한 수많은 생명이 죽었으며, 또 수많은 부상자와 가족들에게는 악몽으로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도 그 뉴스와 영상을 본 온 미국 국민에게는 놀람과 공포와 분노를 남깁니다. 그 테러를 자행한 빈라텐과 그의 일당들은 기고 만장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정체가 불분명한 테러 단체의 공격이기에  어떻게 보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나라가 되었든, 단체가 되었든 그들과 관련된 모든 실체와 끝까지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세계 최대,  최신 무기와 정보를 가진 강국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테러의 피해자와 가족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선언에 그 악의 세력의 척결을 확신하며 어느정도 위로를 받습니다.

앗수르는 당시 세계 최대강국으로 앗수르바니팔 왕(669-627BC)은 이집트를 공격하여 데베를 정복할 정도로(3:8)  기고 만장하여 그 세력이 정점에 달해있었으며(BC 663년) 그들의 극악 무도함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아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합니다.

8세기 초,  그러니까 나훔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서 100여년전, 요나 선지자는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을 향해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요나 선지자가 기대한 것과 달리, 그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에서 구해 주십니다. 그러나 디글랏 빌레셀 3세(745-727BC)가 일어나며 앗수르는 번창하기 시작하여  BC 722년에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살만에셀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끌려가고 701년에는 유다 히스기야왕때 예루살렘이 공격당하고, 므낫세왕은 에살핫돈왕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도 하는 (왕하 21:1–18; 역대하 33:1–20) 일을 당하며 유다에는 앗수르에 대한 공포가 팽배한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은 나훔선지자를 통하여 다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이번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사55:11). 핍박하는 악의 세력이 심판받는다는 것은, 핍박받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일본제국의 핍박과 압제를 받고 있던 한국사람들에게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의 소식이 위로와 희망의 소식이었던 것처럼, 나훔 선지자의  앗수르를 향한 심판의 예언은 고통받고 공포속에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의미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훔은 ‘위로’가 됩니다.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은 아닙니다. 심판받을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진로, 천벌을 의미합니다.

니느웨사람들이 공의를 실행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2-11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하며 살길을 구했겠지만(욘3:5), 그들은 그 말씀을 무시합니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대로 심판이 앗수르에 임합니다.  앗수르는 627년에 앗수르바니팔이 죽고 급속도로 쇠퇴해져 612년에는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1:15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들려지는 나훔의 복음입니다. 12-14절은 악을 행하는 앗수르의 멸절과 유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끝낼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3절) 하십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며 복음을 들려주는 나훔 선지자입니다. 나훔선지자의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강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악에 대한 심판은 구원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진리의 약속이 성취됨을 봅니다. 이 마지막때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직접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고, 죄때문에 고통받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마11:15)고 하십니다. 악을 진멸하시고 평화를 선포하시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15절) 나훔 선지자의 복음은 오늘날에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오늘날도 다윗과 같이 위대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September 4, 2021 SaturDevo

사무엘 상하는 성경의 흥미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 관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다윗의 이야기가 제일 많고 진지하고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헷갈리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은 단연 다윗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사울은 나쁜 사람, 다윗은 좋은 사람이라는 흑백 논리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었으며 처음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왕으로 뽑도록 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도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 두고 의지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죄를 짖고 그 불륜을 감추려고 사람을 죽도록 조종했는가 하면, 자신의 힘을 재보고 싶어 인구조사도 시키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0) 하는 말씀이 어떻게 진리인지를 증명합니다. 이땅에 사는 또는 살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빼놓고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울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라든가, ‘다윗도 교활한 정치꾼이상은 아니었어’ 하는식으로 인간적으로 판단하는것도 옳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사울은 진실된 믿음이 결여 되었기에 처음의 믿음이 자신의 권력이 커감에 따라 자기 중심적 아집에의해 그 믿음이 타락해져 가고 결국에는 모든것을 잃으며 죽음에 이르는 종국을 맞습니다. 한편 다윗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살아계셔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부터 믿으며,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하나님까지 속일수 없다는것을 알고, 회개하고 자신을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 아래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묻습니다. ‘오늘날도 다윗과 같이 위대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답은 단연코 ‘예스’입니다. 삼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보다 잘 생기도, 믿음도 있고, 지혜와 지략도 있고, 용기와 능력도 있고, 찬송도 잘 짓고, 찬양도 잘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윗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하고, 잘못을 저질렀을때, 회개하고 다시 의지한일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똑 같은 사람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뿐이지,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윗에게 주셨던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을 주시고, 또 받으며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건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 안에서 힘을 찾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좌에 앉히실 때 제한된 지역 왕국을 세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만큼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7:18-29). 사무엘하 7:4-17절을 다윗의 언약이라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이 약속(삼하 7:4-17)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 12:1-3)에 연장임을 알수 있습니다. “네 몸에서 날 네 씨”(7:12)를 언급하며 더 구체적이 됩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이 건축할 성전과 다윗왕조를 향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14-15절을 통하여 그 약속의 성취가 온전한 성취가 아님을 암시하며 16절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메시아적 예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고 완전하게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했습니다(마4:17, 막1:15).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사무엘하 7:16절 말씀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계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때, 다윗에게 주신 축복처럼, 우리의 씨가 천국을 누리는 축복을 주실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9-30).†

성경은 왜 휴거를 언급하나?

데살로니가전서 4:15-17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ugust 28, 2021. SaturDevo

데살로니가서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여러가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주요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각장(each chapter)은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며 결론맺고 있습니다(1:10, 2:19, 3:13, 4:16, 5:23). 바울이 유럽땅에 들어가 처음 복음을 전한 곳은 빌립보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 몇일 만에 나올수 뿐이 없었고 (행 16), 장소를 옮긴곳이 데살로니가이고 데살로니니가에서도 오랫동안 사역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수주일 기껏해야 한달내외가 되지 않을까 믿어집니다(행 17:2). 그렇게 급하지만 열정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되어 아덴에 머물면서 데살로니가교회가 걱정되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고(3:1-3),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곳으로 돌아온 디모데에게 들은 소식을 바탕으로 데살로니가에 편지하는데, 그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도망나오듯 급하게 빠져나온 데살로니가의 교회는(행 17:10),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고 잘 이겨내며 신실한 교회로 바울이 가르친것을 실행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3:6-10).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20여년전 한국에 다미선교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믿고 법석을 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도 날짜는 정하지 않았지만 다미선교회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내일, 혹은 이번달 다음달 예수님이 다시오실것으로 믿으며 생업을 포기하고 먹고 노는 사람이 생길정도 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예수님이 곧 오실텐데, 어떤 형제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신실한 형제였는데 예수님을 잘못 믿은 사람인가?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고 위로를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4장 13-1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9-11)는 말씀을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재림(Parousia)을 휴거( rapture)와 다시오심( revelation of Christ)이로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휴거(rapture)라는 말은 그릭어’Harpazo’ 를 라틴어로 번역한 ‘Rapio’ 에서 온 말입니다. 휴거를 설명하기 위하여 전천년설을 설명해야 할듯 합니다. 요한계시록 20:6의 말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을 근거로 천년왕국설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기에 따라 3가지 설 (무천년설, 전천년설, 후천년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두를 설명하는 대신 휴거와 관련하여 전천년설만 간단히 설명합니다. 전천년설은 믿는 성도가 대환란(마 24:15-28, 단 12:1, 계7:14)를 격느냐, 안격느냐에 따라 전통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눕니다.

오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5-17 처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모든(죽은자와 산자) 믿는 성도들을 공중으로 끌어 올리신(휴거) 후, (A. 영접/만난후, / B. 대환란이 끝난후), 공중에 올렸던 성도들과 예수님은 이땅에 내리시어 천년동안 치리하신다는 이론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렇게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이유는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절)입니다. 바울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해 얼버무리지 않고, 그들의 미래 모습이 우리 머리속에 그림으로 그려질수 있도록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다미선교회처럼 휴거를 준비하라거나 예수님이 오실 날짜를 계산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소망없는 다른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위에 그려진 도식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도 부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고,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기위해 부활합니다. 그 심판은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마 25:46) 입니다.

바울은  18절에 결론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사람의 끝을 분명히 알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절망하며  믿음을 잃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실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