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인가?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August 21, 2021 SaturDevo

워싱턴 DC에 있는 국회 도서관이 19세기 후반에 재건되었을 때,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알려진 모든 종교 문헌의 주목할만한 인용문을 고려한 후 미가 6:8을 종교 방의 모토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가 4:3은 또한 UN 본부 앞에도 헌정된 유명한 말씀입니다. 미가서는 슬픔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를 위로하고,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자제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에 충실하도록 용기를 줍니다.

미가 선지자는 아모스 선자자보다 약 15년 정도 후임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때에 주변 강대국들의 약화로 기득권자들이 영화를 누리며 사회적 부패와 타락과 강탈의 도가 더해져가는 시대였다면, 미가선지자가 사역하던 시대(미1:1)는 이제 그 막바지를 맞습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나타나 앗시리아의 세력을 키워 주변국들을 공략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베가와 다메섹의 왕 르신이 합하여 유다의 아하스를 대적합니다. 아하스는 디글랏 빌레셀을 끌어들여 베가와 르신이 제거되고 호세아가 북이스라엘왕이 되는 시대 (열하 15-16장)로 주변 상황이 어수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가 선지자는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미가서는 3쌍의 심판과 구원의 메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상말로 하면 병주고 약주기이지만, 성경적으로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죄악을 그치게 하시려고)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타락에서 돌아서게 하시려고)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 (욥 5:17-18) 는 자식 잘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부모와 같은 하나님의 절규입니다.

오늘 말씀은 3번째 심판과 구원으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어떻게 그 심판이 정당한지 변론하십니다(6:1-5).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과거의 일들을 말하며, 그런일들을 기억한다면, 내가 행한 일들중 너희를 서운하게 한 일이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6-7절에서 백성들의 입을 대신하여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송아지를 바칠까요?’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7절). 억지를 부립니다. 일국의 왕이나 할수 있는 ‘천천의 숫양’을 말하고, 누구도 할수 없는 ‘강물 같은 기름’을 바치면 되겠느냐며,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허락치 않은 ‘아들’을 드리는 일까지 언급합니다.

6:8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단 한줄로 요약해서 말씀하고, 10-16절까지에서 그들의 죄와  당할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어 상처 받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지만, 그 심판속에 또한 소망과 구원의 길을 열어 두시어, 그 길을 통하여 상처와 아픔을 아물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하며,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 (골1:26, 엡3:9)다고 하시며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7) 하십니다.

이 비밀이 (이 비밀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미가서 6:8절에 숨겨져 있는지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거룩한 삶, 의인의 삶’의 요약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우리는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하십니까? 아닙니다. 차라리, ‘하나님, 내가 어떻게 이렇게 살수 있습니까? 도와 주십시요.’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결코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할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복음의 놀라운 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렇게 사셨고, 그의 완전한 의의 공로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에게 전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거하실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할수 있게 됩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1:27)

왕을 달라는데 왜 하나님은 왜 기분이 상하셨을까?

사무엘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August 14. 2021 SaturDevo

삶에 변화를 만날때 사람은 긴장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상황이 바뀔때 그에 따르는 미래가 불확실해 지고,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것에 적응하기 위하여 모든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나서 들뜨게 하는 삶에 재충전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꺼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국가나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결정권자인 리더가 바뀔때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도 그런 경우입니다.

엘리 제사장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사무엘의 치리로 이스라엘은 한동안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이가 들어 늙게 되면서, 그의 두 아들을 사사로 임명하여 미래 지도자로 삼으려 했는데,  “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8:3)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는 백성의 대표들인 장로들이 나와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8:5)합니다. 사무엘이 듣고 사사로써 기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요구인지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오늘 말씀 7절처럼, 하나님도 ‘자기를 버리는 행위’라고 말 하며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부루퉁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며, 어떤 성경 독자는, “What’s wrong?” 할 수 있입니다. 사무엘이 죽으면 타락한 사사(Judge)가 치리할텐데, 그러면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왕을 세우달라는 장로들의 요구가 정당해 보이는데 사무엘과 하나님은 왜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그들은 백성의 대표, 요즘말로 하면 국회의원인데, 그들도 성경을 알 만큼 압니다. 신명기 17:14-20 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 하며 모세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창세기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하시며 야곱을 통하여 하신 예언까지 있으니 장로들의 요구는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장로들의 방안이 최소한 두가지 점에서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사사에 대한 문제점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7)합니다. ‘하나님,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고 했습니까?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것은 ‘하나님은 누구신가?’하는 기초를 잊고 있었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사 33:22). 하나님은 재판장(사사) 이시고, 입법자이시며, 왕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전능왕 하나님을 거부하고 “모든 나라와 같이 (like all the nations)”(5절) 사람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왕과 같지 아니한, 특별한 왕중의 왕, 모세와 아론, 제사장과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별된 삶,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이방신에게 눈을 돌리던 이스라엘이 지금은 그들의 왕의 통치까지 따르고 싶어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을 달라는 장로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안목을 가진 이스라엘인들의 고집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8:9) . 하나님은사무엘을 시켜 그들이 택한 왕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8:19) 합니다. 사울이 그들이 택한 왕이 됩니다.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삼상13:14) 다윗 왕(신17)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의 안전과 편의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담당할 백성이란것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49:10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일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백성”의 왕이 됨을 말합니다. 다윗은 “메시아적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삼하 23:1-7) 하나님의 말씀을(신 17:14-20)을 온전히 성취할 분이 오실것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대로 율례를 지켜 우리를 치리하시는 왕중에 왕이시며, 온세상을 공의로 판결하시는 재판관(사사)이시며(창 18:25, 약 4:12), 우리를 모든 죄악으로 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서 여러가지 법을 만듭니다. 쓸만한 왕을 뽑으려고 전전긍긍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립니다. ‘다른 사람들 처럼’ 무었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안에 있으면, 이미 공의의 재판장, 전능왕, 그리고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까지 처럼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결론입니다. “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4).†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곳?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August 7, 2021  SaturDevo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며 가는 곳곳 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한 곳마다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일이 반복되는데, 그럴때 마다 반복되는 또 한가지는 그 교회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고, 바울은 또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직접가지 못하는 경우에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가서 복음을 전한 곳은 아니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성경을 가르칠때 (행 19:9-10),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을 듣고  골로새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1:7, 4:12).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갖히며 에바브라는 바울을 도우러 로마에 갑니다. 그러는 사이 골로새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다. 골로새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이 아닌 사람의 생각에 맞는것 같은 철학과 마술 (속임수), 세상의 초등학문, 인간의 생각이 축척되었다고 믿어지는 전통같은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나타나 골로새 교인들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당시의 철학은 오늘날의 철학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의 철학은 이성적 사고나 건전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괴변, 마술, 무속 신앙의 가르침이나 ,의술 또는 전통적 신앙에 대한 의견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주장을 철학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초등학문은 어린아이의 공부가 아니라, 기본 원칙(Elemental spirit of the world)으로 이방종교의 영, 또는 세상을 지배하는 영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바울은 골로새에 편지를 보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대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철학과 마술과 초등학문과 전통이,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과 이점을 설명하며 그것을 확실히 앎으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가르침들을 버리고 바른 삶을 살도록 충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원을 설명합니다. “그 안에 있는 (in him)”이라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전치사구를 15번씩이나 반복하여 사용하며 거짓가르침을 분별하여 바르게 나갈수 있는 모든 자원을 들어 골로새 교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이렇게 골로새서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In Christ)’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안에”는 Keith Getty 와 Stuart Townend 의 유명한 복음성가 ‘In Christ Alone’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노래 속에서 복음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는 ‘나에 모든것 (my all in all)’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 안에는 (In Christ)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 2:3).

성경에서 구원과 성화가 어울어져 믿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삶에 자신감을 주는 곳이 바로 골로새서, 특히 2장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사람의 삶에  모든 필요충분 조건이 충족됨을 말합니다.

첫째는 어디에 가든지 바울이 제일 먼저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을 빼놓지 않습니다 (11-14).  그 안에 (In Him) (11절)서, 우리의 죄의 문제(13절)와 영생의 문제(12절)가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그리고 믿기만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In him) 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DIY 가 아니라 감사하는 삶이라는 것를 언급합니다 (7절). 그 안에(In Him)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삶(Do-It- Yourself) 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것과 주신것은 내가 필요한것, 원하는 것을 차고 넘치게 충분이 주셨기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고 오직 감사하는 삶이면 됩니다. 그 안에 (In Him)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9-10). 로마서 8:32절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세번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5-19). 그 안에서(In Him) (15절) (*ESV)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5절). 그러므로(16절), 세상 철학이나, 초등학문, 전통에 흔들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때,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 (엡4:13)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화 (예수안에서 자라가게)됩니다.

거짓 가르침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가 아닌것이 거짓 가르칩입니다.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진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할때, 믿는 사람들은 미혹의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디모데 후서 3:13-14,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참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 2:3). †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해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July 31, 2021. SaturDevo

요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성경책을 쓴 선지자로써 유일하게 하나님께 책망받는 선지자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요나는 책망의 대상이면서, 또한 책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무시 무시한 악의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신 요나는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 (1:1-2). 하나님은 풍랑을 보내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켜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됩니다 (1장). 요나가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을때, 하나님은 그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토해내게 하고 (2장),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3:1-2). 요나는 죽음에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긍휼의 받게 되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갑니다. 그리고 놀랄만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칩니다. 하룻동안의 외침으로 그 큰성읍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능가합니다 (행 2). 이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4장에서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4:1) 합니다. 이유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4:2)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니느웨의 멸망하는 모습을 보겠다고, 성 동편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앉습니다. 햇볕이 내리쬐이자 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어 햇볕을 막아줍니다 (4:5-6). 요나를 향한 또하나의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박넝쿨이 벌레에 먹혀 시들자, 죽는것이 낫겠다며 성을 냅니다 (4:7-9). 요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정의를 부르짖고 자신에 대하여는 자비를 원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못견디고 성을 내는 사람입니다.

요나의 경험은 선지자 개인의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차원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그 죄가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세상 어떤 민족도 경험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그들은 열방과 그 사랑을 나누고 증거했어야만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하나님으로 제한하고 배타적인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요나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29)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좌우를 분별하지 못했던 니느웨가 회개하고 긍휼을 구했을때 뜻을 돌이켜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구하는 모든 피조물을 긍휼히 대하십니다.

이 사실은 요나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선지서임을 말해줍니다. 요나의 경험은 요나와 이스라엘 국가적 차원을 넘어 그 스케일은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다시오실 그때까지, 공간적으로으는 땅끝까지 연장됩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16:4). 요나의 표적은 삼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사건을 말씀합니다. 그 표적은 또한 중의적 의미(double entendre)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요나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고, 요나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풍자의 대상이 되는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소유로 취급하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찬들을 보는 듯 합니다. 요나에게서 많은 크리스찬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한 모순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서 돌아서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를 신뢰하면서 우리는 종종 두려움과 불안과 싸웁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실망과 씨름합니다. 우리가 그런것처럼,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의 실패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춰보게 만듭니다. 요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약함과 모순과 갈등을 끌어 앉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나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소유인양 우리만 갖고 제한 하는것을 요나는 경고합니다. 박 넝쿨이 요나것이 아니었던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복음도 우리것이 아닙니다.

6. 수치심

창세기 3:1-7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타락한 후 눈이 떠졌을 때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그들이 벌거벗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뱀이 완전히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이 그들에게 말한 것의 일부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선악을 구분할줄 압니다. 그러나 선악을 구분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결점입니다.) 그것은 뱀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뱀은 죽음과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결과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드는 악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악과 수치는 문화적 인식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가치관에서 죄책감이 수치를 대체하지 않지만 다소 동등한 수준의 악으로 간주됩니다”(Walton, 147). 동양에서는 수치를 악으로 여깁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악을 법의 차원에서만 다루지만 동양 문화에서는 수치와 악을 이스라엘에서의 경우와 같이 거의 동일시합니다.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에서 보는것 처럼, 우리는 성경적 견해가 부끄러움도 악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양심의 죄입니다. 양심이 결백하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것은  속사람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선언합니다. “부끄러움은 무가치함의 가장 깊은 뿌리에서 샘솟습니다. 수치심은 자멸의 원인입니다”(Fire).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는 순간 자신들의 무가치함과 영적인 죽음을 깨달았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벌거벗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죄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은 숨어야 했습니다. 수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리시키고 우리의 무가치함을 조장하며 내면을 파괴합니다. 수치심은 영적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6. Shame

After the fall, when their eyes were opened, the first thing Adam and Eve realized was that they were naked. Here, we can see that the serpent didn’t tell a whole lie. Part of what the serpent told them was true. When they ate the fruit, they became to be like God in knowing good and evil. It was the truth of what the serpent said, but the serpent didn’t tell the truth about death and the ramifications of the eating of the forbidden fruit.

            Nudity is not evil. It is the shame. The evil and the shame can be viewed differently according to cultural recognition. “In Israel guilt does not replace shame on the list of values, but it is promoted to somewhat more equal status” (Walton, 147). In the Orient, shame is regarded as evil. While evil is handled only at the level of the law in Western culture, shame and evil are the same in Eastern culture. From the context of verse 7, we can see that the biblical view also regards shame as evil. Shame is the guilt of conscience. If the conscience is innocent, there is no shame. If one feels shame, his inner being is guilty. Hebrews 4:12 declares that “it (the word of God)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Shame springs from the deepest root of unworthiness. Shame is the reason for self destruction” (Fire). At the moment they ate the forbidden fruit, they realized their unworthiness and spiritual death. In Genesis 2:17, God declared that “when you eat from it you will certainly die.” Adam and Eve knew that God’s declaration was true.

            When Adam and Eve realized their nakedness, they saw the evil in their inner heart. Their guilt in their heart could not face God. Therefore when God called them in the next chapter, they had to hide themselves. Shame separates our relation with God, instigates our unworthiness, and destroys one’s inner being. Shame leads to spiritual death. 

Work Cited:

1. 1. Walton, John H. Ancient Near Eastern Thought and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6

2. Fire, Jade. What is Evil? Guilt and Shame. Online. http://jadefirelight.com/blog/2010/10/what-is-evil-guilt-and-shame

3.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이 모든 일중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July 23, 2021. SaturDevo

룻기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룻기는 해피엔딩이라는 전형적인 크래식소설 형식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그 도입 부분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베들레헴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남편과 아들들과 모든것을 잃고 엘레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과부가 된 며느리 룻만 데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주요 주제도 친절과 구속으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인 여자, 그것도 이방여자와 구속자인 보아스의 친절한 행위가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그 주인공들을 떠나지 않지만, 또한 한번도 이야기 표면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기를 읽고 나면, 그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할수 뿐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겉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혹자는 묻습니다. 이 모든 일중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룻기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를 다 살고 난후, 우리의 삶을 영적인 눈으로 돌아본다면, 우리는 분명히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라고.

룻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첫째는 흉년이 이야기를 끌어 가는 방법이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하고, 요셉을 생각하게 하며,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쓰이는 어떤 이야기나, 구절, 단어등을 사용하여 그 쓰임을 기억하게 하고 의미를 갖게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을 벗는 행위라든가, ‘I am’이라는 말입니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모세의 행위를 기억나게 하고 거룩한 땅 위에 선다는것을 의미하고, ‘I am’이라는 말도,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실때 사용한 말임을 기억하게 하고, 예수님이 사용하실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같은 식으로 룻의 이야기도 흉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진행 시키고 계신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계속되는 우연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게 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유대땅에 도착한 때가 ‘마침’ 추수때입니다(1:22).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나가게 되고(2:3), 또 보아스는 ‘마침’ 그의 추수를 보러 나오고(2:4), 보아스가 기업무를 권리를 해결하려고 성문에 갔을때, ‘마침’ 그 가까운 기업무를 자가 지나갑니다(4:1). 믿는 사람들에게 우연은 없다고 합니다. 모든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알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보아스의 기업무를자(redeemer)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비(kindness)를 구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잘것 없는 이삭 줍는 이방여인에게 베푸는 자비와, 룻의 간구을 듣고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일하는 보아스의 적극적인 행동은, 우리의 절망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는듯 합니다.

룻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룻에게 보아스는 구속자가 되어, 룻과 나오미에게 축복과 기쁨을 되찾아 주고, 그 후손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으며, 또 다윗을 후손을 통하여 온세상에 구원을 주게 됩니다. 우리도 룻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터 분리된, 약속의 언약에 이방인이고, 희망도 없이 절망중에 있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우리를 절망과 고통속에서 구속하여 주시고 우리 삶속에 역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일 중에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시며 우리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이끄시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3: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룻은 고백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 1:16). 룻이 믿었던 그 하나님이 우리가 오늘 믿는 그  하나님이십니다(히13:8). 이 모든 일 중에 룻에게 함게 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모든 일 중에 또한 함께 하시는줄 믿습니다.

Where is God in all of this?

Ruth 4:14, ““Blessed be the LORD, who has not left you this day without a redeemer, and may his name be renowned in Israel!”

The Book of Ruth is a typical classic love story with a happy ending. The introduction reminds us of the story of the returning prodigal son. A family of a man named Elimelech from Bethlehem left their hometown to eat and live well, but in ten years, they lost everything. Only three bereaved wives -Elimelech’s wife and her two daughters-in-law – were left. It starts with the story of returning to his hometown. Its main themes are also nothing special with kindness and redemption. It is a story that is used in God’s work of the kind deeds of the main characters, the woman, the foreign woman and the redeemer, Boaz. God never left the protagonists for a moment, but also never come up to the surface of the story. However, after reading the book of Ruth, we cannot but admit that the real hero was God.

In our lives today, God does not appear outwardly. So some ask. Where is God in all this? As in the book of Ruth, if we look back at our lives with spiritual eyes after we have lived our lives, we will surely confess that God never left us for a moment.

In Ruth’s story, God’s presence was found everywhere. First, the way the famine leads the story reminds us of Abraham, Joseph, and the story of the returning prodigal son. The Bible uses certain stories, phrases, or words that are repeated over and over to remind us of its use and give it meaning. A typical example is an act of taking off the shoes or the word ‘I am’. Taking off the sandals reminds us of the actions of Moses and means standing on the holy ground. The word ‘I am’ reminds us that the word ‘I am’ was a word used by God to reveal his name. And it is the word that Jesus used to express implicitly his divinity. In the same way, Ruth’s story implies that God was proceeding with the story using famine. Second, it makes it hard to deny that successive coincidences were God’s work. “They came to Bethlehem at the beginning of barley harvest” (1:22). Ruth happened to come to the part of the field belonging to Boaz (2:3), and behold, Boaz came from Bethlehem (2:4) to see his harvest and see Ruth, and when Boaz goes to the city gate to settle his business right, behold, the redeemer, of whom Boaz had spoken, came by. (4:1). It is said that there are no coincidences for those who believe. You can see that God is at work in all seemingly coincidental events. Another thing is that Boaz’s actions as a redeemer play a role in embodying God’s kindness. The mercy he showed to the poor gleaner, and Boaz’ active action to listen to Ruth’s plea and deal with the case seem to see our despair and see the salvation of Jesus Christ, who was offered to save us.

Reading the story of Ruth, we can think about our own lives. To Ruth, Boaz became the Redeemer, restored blessings and joy to Ruth and Naomi, gave rest to Israel through his descendant David, and brought his descendant, Christ, to the world through David. Like Ruth, we too were strangers to the covenant of promise, separated from God’s people, and hopeless and desperate. This is what Ephesians 2:12 says: “you were at that time separated from Christ, alienated from the commonwealth of Israel and strangers to the covenants of promise, having no hope and without God in the world.” Jesus Christ came to us, and redeemed us from despair and suffering. He works in our lives, and God is always with us in everything we do, leading our story to a happy ending.

Hebrews 13:7 says: “Remember your leaders, those who spoke to you the word of God.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Ruth confesses.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and your God will be my God” (Ruth 1:16). The God Ruth believed in is the God we believe in today (Hebrews 13:8). I believe that the same God who made Ruth in all of these things is also with us in all of us today.†

5. 남자와 여자

창세기 3:1-7,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1-7에서 여자가 먼저 뱀에게 시험을 받아 죄를 지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인류의 첫 죄인은 여자 하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영어 성경은 ‘one man’ 으로 나옵니다. 또 5:15절에는  그 ‘한사람’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시켜 말하는 것을 보면, 그 ‘한 사람’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을 말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 죄인은 여자 하와인데, 왜 아담이 죄를 세상에 가져온 죄인으로 책망 받아야 합니까?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

바울은 남자를 여자보다 앞세우는 이유를 두가지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여자가 먼저 속아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보다 남자를 앞 세웁니다. 바울 시대에 남자는 사람(남자/여자)의 대표자였습니다. 아담은 그 여자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남편은 부부를 대표합니다. 바울은 다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2-23) 하며 대표성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아담이 제일 먼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죄를 불러온 첫 사람으로 책망받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남자의 대표성은 당시의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Roland Chia 박사는 또한 그의 기사 “여자”에서 이것을 지적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에 있는 바울의 선언적 진술은 문맥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시대를 초월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아담은 그녀와 함께 있었습니다. 성경도 분명히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여기에, “자기와 함께한 남편/ who was with her” 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면 뱀과의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지라도 여자와 뱀의 대화는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독자는 그가 했어야 할 일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의 공범자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공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은 그 사건을 보며 아담의 죄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은 대표적인 죄인이었으며, 또한 죄를 세상에 가져온 죄인으로 책망받아도 할 말없는 공법자 였습니다.

5. Man and Woman

            In Genesis 3:1-7, the woman was tempted by the serpent and committed the sin first. “She took some and ate it.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Genesis 3:6). The first sinner of human beings was the woman, Eve. But in Romans 5:12, Paul says that “just as sin entered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through sin…” Why is Adam blamed as the sinner who brought sin into the world?

            Paul refer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woman in 1 Timothy 2:11-14, “A woman should learn in quietness and full submission. I do not permit a woman to teach or to assume authority over a man; she must be quiet. For Adam was formed first, then Eve. And Adam was not the one deceived;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and became a sinner.” Paul argues that the reason woman had to be submissive to man is that she was deceived and became a sinner first. Thus, Paul puts man before woman. In this way, man was the representative of human beings in Paul’s time. Adam was the woman’s husband. In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the husband represents the couple. Paul again commands that “Wives, submit yourselves to your own husbands as you do to the Lord. For the husband is the head of the wife as Christ is the head of the church, his body” (Ephesians 5:22-23). Because of the representative character of man, Adam gets blamed for bringing about sin into the world. However, man’s representation should be understood from cultural perspective of the time. Dr Roland Chia also points out this in his article “Woman”, that “Paul’s declarative statement in 1 Timothy 2:12 must be understood contextually and must not be taken as a timeless imperative.”

            Additionally, Adam was with her. The bible explicitly points this out.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Genesis 3:6). Here, we should not miss the phrase, “who was with her”.  Even though he didn’t participate in the dialogue with the serpent, he must have heard the conversation between the woman and the serpent. Then the reader can infer what he had to supposed to do. He was an accomplice to the sin. Even though the bible doesn’t refer to his complicity, Paul might understand obviously Adam’s sin in the event. From Paul’s point of view, when we consider the cultural perspective of the time, Adam was not only a representative sinner but also the accomplice to the sin.

Work Cited:

1. Chia, Roland. Woman – Different But Equal: Male-Female Relationship in the Bible. Online. http://vantagepoint.com.sg/2010/07/different-but-equal-male-female-relationship-in-the-bible

2.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SaturDevo: July 17. 2021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족은 뱀의 다리라는 말입니다. 중국 초나라에서 일로, 어떤 사람이 제사를 지내고, 술을 한 잔 내어 주며 하인들에게 나누어 마시라고 합니다. 술 한잔으로 어떻게 여러사람이 나누어 마실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제의 합니다. 땅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한잔을 다 마시는것으로 합시다. 모두가 동의하고 뱀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이 ‘자 내가 제일 먼저 그렸소’하며 잔을 집어 듭니다. 그리고 마실려고 하는 찰나, 다른 한 사람이 잠깐! 하며 그 잔을 낚아 챕어갑니다. 이 술은 내것이요, 뱀을 그리기로 했는데, 당신은 뱀을 그리지 않았소. 어찌 뱀에 다리가 있단 말이요? 하며 빼앗아 갑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은혜가 듬뿍 스며있습니다. 이 편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을 선포하는 복음의 진리를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온전히’ 그리고 ‘단번에’ 성취할수 있도록 완성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순종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보완이 될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 말씀대로, 태양을 더 밝게 하려고 횟불을  드는 격이 될것입니다. 인간의 순종이 어느 정도 까지 일지라도 개입되어야 한다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 교회에 가르쳤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Jesus Christ= 100% grace) 믿음으로(through faith)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받는(righteous in Christ)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행15:1)라고 가르칩니다. 거짓 교사들(또는 “유대주의자”)이 바울이 가르친 것과 “다른 복음”(1:6)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다른 복음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 행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써 보내어, 이 교인들에게 그가 전파한 복음이 충분함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2:21).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성령의 역사로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나아갑니다(3:1-5). 죄 많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가 ‘자기 몫’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몫’으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협력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신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 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십자가의 능력에 무엇을 보충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타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노력 만큼이나 무의미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한 내적 변화만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합당한 새 생명을 가져옵니다.  사람의 마음에 내재하도록 주어진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품성을 더 밀접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갈라디아서는 정죄와 죄로 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탈피하는 자유의 선언입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의 정점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운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4. 유혹

창세기 3:1-7,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여자가 뱀의 거짓 논증에 설득된 후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창세기 3:6)한, 그녀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사탄의 권세를 인하여 금단의 일을 기쁘게 여기고 금지된 일을 흥미롭게, 부끄러운 일을 자랑스럽게 보기도 합니다” (Scripturestudies.com).  그 여자는 유혹의 세 가지 요소에 직면했습니다. 그녀의 유혹은 마태복음 4:1-11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혹과 유사합니다. 시험의 이 세 가지 요소는 요한일서 2:16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 열매가 먹음직스러웠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 열매가 보암직하였다면,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인 줄 알았던 것은 이생의 자랑에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여자는 뱀의 유혹에 굴복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6절). 남편 아담도 죄에 빠졌습니다. “죄는 단순히 비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타락의 원인이었고 하나님과의 분리였습니다”(Neufeld).

뱀이 사용한 이 세 가지 유혹의 특성은 마태복음 4장 1-11절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배가 고프셨을 때 사탄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요구합니다.  사탄은 그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고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안목의 정욕을 자극했습니다. 사탄은 또 그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몸을 던져 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이생의 자랑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는 사탄의 유혹를 이기고 마침내 아담의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하와가 당한 유혹의 세 가지 요소는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를 시험하는 유혹과도 동일합니다. 사업이나 직장은 종종 교회에 가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 행사와 패션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젊은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아담의 타락이 인간의 타락을 가져온 것처럼, 우리도 유혹에 빠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음이니라” 합니다. 유혹의 문은 넓고 들어가기 쉽습니다.

4. Temptation

            After the woman was persuaded by the serpent’s false argument, “when the woman saw that the fruit of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pleasing to the eye, and also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Genesis 3:6), she viewed the tree as she never had before. “Often, through the influence of Satan, we view the forbidden things with pleasure, the prevented things with passion, the shameful things with pride” (Scripturestudies.com).           The woman was confronted by the three characters of temptation. Her temptations parallel Jesus’ temptation in Matthew 4:1-11. These three natures of temptation are summed up in 1 John 2:16.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When she saw that the fruit was good for food, this was the lust of the flesh. When she saw that the fruit was pleasing to the eye, this was the lust of the eyes, and when she saw that the fruit was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this was the fall into the category of the pride of life.

The woman, finally, succumbed to the serpent’s temptation. “She took some and ate it.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verse 6). Her husband, Adam, also fell into sin. “Sin is not simply unethical behavior but a breach of trust. Unbelief was the cause of the fall and separation from God” (Neufeld).

            These three natures of temptation, used by the serpent, were used again in the same way by Satan against Jesus in Matthew 4:1-11. Jesus was tempted by the lust of the flesh. When he was hungry after fasting forty days and nights, Satan asked Jesus to make bread from stone. Satan took him to a very high mountain and showed him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and their splendor, and told him that he will give all of those if He would bow down and worship Satan. Satan provoked the lust of the eyes of Jesus. Satan had him stand at th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and told him to throw himself down. Satan instigated Jesus’ pride of life. However, unlike Adam and Eve, Jesus resisted Satan by relying on God’s words. He had victory over the enemy and at last redeemed us from the sin of Adam.

            The three elements of Eve’s temptation are essentially the same with temptation we confront in our lives today. Businesses often can be an excuse for not going to church. The multifarious cultural events and fashions draw our attentions, and young people are often distracted. Just as Adam’s fall brought about the fall of man, so our fall to the temptation can bring about the terrible consequence. Jesus said in Matthew 7:13-14,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road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many enter through it. But small is the gate and narrow the road that leads to life, and only a few find it”. The gate of temptation is wide and easy to enter. †

Works Cited:

1. Old Testament Study. Temptation of Man/ Sin of Man. Online. http://www.scripturestudies.com/vol10/j10/ot.html

2. Neufeld, Gerald. Study Notes for Genesis 3:1-7 : Temptation and Sin. PBCC Small Group Study Notes. Online http://www.pbcc.org/homefellowships/smallgroupquestions/Genesis/SN-3.1-7.pdf

3.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기뻐합니까?

SaturDevo July 10. 2021

오바댜 1: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싸움은 아는 사람과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과 하는것 같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는 갈등할일이 없습니다. 멀리있어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과 무슨 따질 일이 있겠습니까? 오바댜 선지자는 심판의 말씀을 에돔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조상 에서는(창36장)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쌍둥이 형제였습니다(창 25:19-34). 그 둘은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싸우기 시작합니다. 젊어서는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고 사며 갈등하고, 야곱이 아버지로 부터 축복을 가로채며 에서는 야곱을 죽일 생각까지 갖고 미워합니다. 이렇게 서로 제일 잘 알든 야곱과 에서는 장성하여서 각각 한 가정을 세우고, 그들의 후손들은 이스라엘과 에돔이라는, 제일 가까이 있는 각각의 나라가 되지만, 이웃한 두나라는 시시때때로 갈등하며 역사를 이어갑니다. 예수님 당시 에돔(에돔은 후에 이두메로 불린다)의 후예였던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헤롯의 아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편에 서게 됩니다. 구약의 제일 짧은 책인 오바댜 (292개의 히브리 단어)는 베벨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에 대한 에돔의 행위를 지적하며 에돔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유다의 죄악이 돌이킬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하나님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을 일으켜 유다를 징벌합니다. 느브갓네살의 공격에 고통당하고 갈취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를 보며, 이웃한 형제국인 에돔은 기뻐합니다. 기뻐할 뿐만 아니라 고통당하는 유다를 유린합니다. 오바댜1:10-14절까지에서 조목 조목 에돔이 유다에게 한 행위를 지적하며 에돔을 정죄합니다. 느브갓네살에게 유다가 늑탈 당할때, 형제인 에돔은 못 본척하고, 그들이 멸망하며 고난을 당하는데 구경꾼이 되어 방관합니다. 예루사렘이 탈취당하여 재물을 나눌때, 에돔은 그들중에 한 사람이 되어 제비뽑기에 참여하고 (11-12절), 그들의 재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웁니다(13절).  그 뿐만이 아니라, 그 환난에서 도망하는 사람을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붙잡아서 대적의 손에 넘겨주고, 그 재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을 찾아 적에게 넘겨줍니다(14절). 오바댜는 이런 에돔을 향해 하나님이 에돔에 내릴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행위는 다른 사람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대신 소금을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C. S. Lewis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인, 원수, 교만한 사람, 탐욕적인 사람, 방탕한 사람, 나쁜 사람등, 사람을 성정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이 악인이라는 말은 섬뜩합니다. 영어로 하면, 이블(Evil)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당한 불행을 기뻐하고 즐기는 잔인한 행태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시는 고통받은 어린양으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급급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속으로 몰아넣고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백성, 천국백성의 지위는 박탈되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스스로 겸비하는 믿는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마21:33-43).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악도 시간이 가며 진화 하는듯 합니다. 요즘은 다른 사람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라든가, 다른 사람의 실패는 나의 성공의 기회라는 말도 합니다. 에돔 심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신다면, 내가 에돔이로구나 하고 빨리 회개하십시요. 성경은 말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2). 하나님은 어떤 죄도 벌하지 않고 절대로 그냥 지나가게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렘30:11). 하물며, 에돔처럼 사탄의 속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수 있겠습니까?

오바댜선지자는 말합니다.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오바댜 1:17). 그 피할곳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벹전 2:22-25). 마음 속에 악한 맘이 일어납니까? 빨리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