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엔 거짓이 없다?

5/8/2021

로마서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SaturDevo

정말?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말입니다. 악과 범죄와 불법이 있는곳에는 반듯이 거짓과 사랑이 뒤섞여 있는것이 오늘날에 현실이고, 뗄래야 뗄수 없는 실과 바늘같은 두 단어, 사랑과 거짓를 진리의 책이라는 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요?

로마서 만큼 복음과 구원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라운드제로로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 순간에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 즉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격상시킵니다 (롬 1:18-11:36). 그리고 12-15장은 이제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 받은 사람, 즉, 한 순간에 격상된 사람들에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롬 12:2)을 따라 살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로마서 12:9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다”라는 말은 9-21절의 Headline입니다. “사랑엔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는 말로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할 근거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많은 영어성경은 사역동사를 사용하여 권고로 번역해 놓았지만, 한국말 번역이 더 맘에 듭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의지의 언어입니다.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특별히 죄인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롬 5:8).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고, 크리스천의 사랑입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 1:5)이고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벧전 1:22)하는 그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는그 사랑속에 거짓이 들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한다는 것에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크리스천들이 소유한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은 두가지의 다른 행위가 아니라, 한가지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을 10절부터 20절까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21절은 결론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에 속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3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세상사람들도 하는 선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부지런하고, 섬기고, 대접하고 어려움을 기도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10-13절).

두째는 악에 반응하는 태도입니다(14-18절). 세상은 악을 악으로, 그리고 기껏해야 선을 선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써 악에 대해 선으로 반응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반사하여야 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39).

그리고 세째는 손안에 든 원수를 대하는 방법입니다(19-20절). 우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누가 자신의 원수를 잡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겠습니까? 그러나 원수에게 선을 행하여 그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을 믿고 않고는 할수 없는 선입니다.

선하게 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믿음의 행위일 수 뿐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는 선하게 살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한 일서 3:16의 말씀입니다. 누가 거짓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엔 거짓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믿음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하게 살아가야할 이유가 됩니다.

양심, 믿을 수 있나?

5/1/2021

로마서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SaturDevo

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의 첫장에서 ‘자연법(the law of nature)’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법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그러나 따라야하고, 따를수 밖에 없으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법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그것 처럼, 사람에게는 ‘도덕법 (Moral law)’라는 것이 주어졌는데, 이 법도 자연법과 같이 사람이 만들지 않은 법이지만, 인정할수 뿐이 없는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는 법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2장은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이방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8-32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의 악행을 언급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그들도 또한 같은죄를 짖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그래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12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괄호가 쳐진 오늘 말씀 14-15절은 율법이 없이 율법의 일을 하는 이방인들을 언급합니다. 착한 믿지 않는 이방인, 또는 양심적으로 사는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서 혹자는 항변할 것입니다,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망한다고 해도, 율법없어도 범죄하지 않은, 그리고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 받아야 할것 아닙니까? 라고.

과연 그럴까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라는 형태로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똑 같은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새겨졌다’(2:15)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유대인들에게는모세를 통하여 분명하게 글자로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마음에 새겨졌는데, 그 증거가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그 양심에 따라 어떤때는 송사(accusing)하고, 어떤 때는 변명(defending)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갈등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C. S. Lewis가 말하는 Moral Law(도덕법)이 바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자기들도 같은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맘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게 하지만, 어떤때는 잘못을 변명하여 주고 덮어주는데 급급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것입니다. 양심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도 새겨졌다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온전히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그는 자기를 구원할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율법으로 자기를 구원할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은 단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양심대로 산다고 하여도 절대 의인이 될수 없습니다. 양심을 온전히 믿을수는 없습니다. 양심이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양심을 믿을것이 아니라, 양심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SaturDevo

Can you trust your conscience?

C. S. Lewis says ‘the law of nature’ in the first chapter of his famous book, Mere Christianity. Natural laws are not made by man, but must be followed, and affect our lives. One of the natural laws is Newton’s law of universal gravitation. Like that, the moral law has been given to people. The moral law, like natural law, is a law not made by man but affects our lives in reality.

Romans 2 divides the world in two. Jews with the law and Gentiles without the law. Paul says in Romans 1:18-32 that the evil deeds of those who do not believe in God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are judged by God. And in Chapter 2, Paul uncovers that the Jews, who have the law of God, condemn such evil practices of gentiles but they also do the same things. And he says, “all who have sinned without the law will perish without the law, and all who have sinned under the law will also be judged by the law” (v. 12).

Today’s Word, Romans 2:14-15 in parentheses refers to the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of God but do the work of the law.  They are good and kind people, but unbelieving gentiles or they are gentiles who live conscientiously. So some may protest: It is understandable that those who sin without the law perish. But how come those who do not sin and live conscientiously without the law not be saved?

Is that really so? The Bible says that God’s law was given to the Jews in the form of written law, but to the Gentiles, the same God’s “law was engraved in their hearts” (2:15 English Bible). God’s law was clearly given to the Jews as a written law through Moses, but to the Gentiles, it was given to them in each person’s heart, and the evidence is conscience. But the thought, according to the conscience, is sometimes accusing or sometimes defending the behavior of a person. Why? Because people’s thoughts are conflicting thoughts.

The word of God engraved in the heart would be ‘the Moral Law’ as C. S. Lewis said. However, the conscience is using God’s word engraved on a person’s heart at his will. Sometimes it points out his wrongdoings and makes him correct them, but sometimes it makes excuses and covers up his mistakes.

This is how people who do not believe in God live conscientiously. The conscience merely proves that the Word of God is engraved on the hearts of unbelievers. In other words, even if a person lives completely conscientious, he cannot save himself. Romans 3:10 affirms, “None is righteous, no, not one.” Even if he lives according to his conscience, he can never be righteous. He cannot rely completely on his conscience. What the conscience bears witness is the truth that there is God. Therefore, those who have a conscience must not believe in their conscience but must believe in God and live according to the Gospel.

하나님의 약속, 믿을수 있나?

4/24/2021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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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키친너에사는 학교선생님인 에버렛 스톰즈(Everett R. Storms)는 성경을 스물여섯번이나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물일곱번째 성경을 읽으며, 성경에 ‘약속’이 몇번이나 나오나 세었습니다. 일년반이 걸린 27번째 통독에서 그는 8810번의 약속을 발견했는데 그중 7487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약속이라고 합니다.[1]

기독교는 약속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독교용어로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 페이지 마다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멀게는 4천년전, 또는 태초에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수 있으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하는 말씀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매 페이지마다, 매 구절마다 소망의 약속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역경이나 절망속에도 소망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힘이되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실수 없으시며, 하신 약속을 분명히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씀은 하나님의 믿는 하나님의 백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쥐가 고양이를 알아보듯, 귀신이 예수님의 실체를 먼저 알아보듯,이방 선견자의 입이 하나님을 진실하심을 확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하나님의 약속(창12:2-3, 22:18)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고 백방으로 수고하지만,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제어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발람의 입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서는 얼마나 더 큰 축복과 약속을 이루실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타락 이전의 ‘아담과 이브의 삶’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민수기의 이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한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디도서 1:2).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성경 속에서 우리가 찾은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찾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십시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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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s 23:19 “God is not man, that he should lie, or a son of man, that he should change his mind. Has he said, and will he not do it? Or has he spoken, and will he not fulfill it?”

God’s promise, can we believe?

Everett R. Storms, a school teacher living in Kitchener, Ontario, Canada, had read the Bible twenty six times. During his twenty-seventh reading of the Bible, he counted the number of the God’s promises appeared in the Bible. On his twenty-seventh reading, which took a year and a half, he discovered 8810 promises, of which 7487 are said to be God’s promises to humans.

Christianity is a religion that believes in promises. God’s promise is called the “covenant” in Christian terminology. There is a promise of God on every page of the Bible. You may ask what the promises God made 4,000 years ago, or at the beginning of the world have anything to do with me?  But we remember the words Jesus said,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Matthew 22:32), and in the same truth, Hebrews 13:8 says that the God we believe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The Bible is full of promises of hope on every page and in every verse. So the fact that we must never forget is the truth of that ‘a believer has hope in any adversity or despair’.

The reason God’s promises become hope and strength for us is because of God’s faithfulness and trustfulness that “God can never lie, and He surely fulfills His promises.” Ironically, these words are not words from the mouth of people of God, but the affirmation words of God from the mouth of a pagan seer, like a mouse recognizing a cat, or a demon recognizing first the reality of Jesus. Barak wanted to curse Israel and labored in all directions to hinder God’s promises (Genesis 12:2-3, 22:18) from fulfilling, but God controlled Balaam’s mouth to bless Israel and fulfill his promise to Israel. If God was able to speak a word of blessing and of his promises through Balaam, how much more so through the blood of Christ, which has secured our salvation.

Jesus says,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though he dies, yet shall he live,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die” (John 11:25-26). The reason Jesus came to this world is to take the person who was expelled from Eden back to the Garden of Eden. God’s promise through Jesus Christ is to restore us to the lives of Adam and Eve before the Fall. The apostle Paul once again testifies to God’s faithfulness by quoting these words from Numbers, “in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never lies, promised before the ages began” (Titus 1:2).

Jesus says, “For truly, I say to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an iota, not a dot, wi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Matthew 5:18). The promise we find in the Bible is the promise that God gives to us who find it. Trust and rely on that promise. God will never disappoint us.


[1]. Knowles, Victor (1998) “Promise and Fulfillment: Believing the Promises of God,” Leaven: Vol. 6: ISS. 3, Article 4.

영생은 어떻게 얻나요?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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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16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을 마태복음에서는 부자 청년이라고 했고(마19:22), 누가 복음에서는 부자 관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눅18:18). 세복음서에 나오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서로 보완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관원이고 또한 젊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가질것 다 갖은 사람입니다. 가질것 다 갖고 영생을 추구했던 사람이 옛날 중국에도 있었습니다. 진시황이었습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해 놓고 영원히 살고 싶어서, 서복이라는 사람에게 동남동녀 삼천명을 주며,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떠내보냅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나?’하는, 이 질문은우리 모두에게도, 지금은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될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질것 다 가져본 사람들만의 사치스런 질문만은 아닙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죽음앞에 설때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할수만 있다면, 모두가 얻기를 원하는 것이 생명의 연장일것입니다.

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을 성경은, 에베소서 2:1-10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 모든 사실을 한 문장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긴 문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긴문장의 욧점은 8-9절에서 분명하게 요약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우리가 무엇을 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와 상관없이, 선물처럼, 하나님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욧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은혜도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부활에 참여케하시기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 (고전 15:23)가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시기에, 사람의 영생이 있는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시기에 그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출세한 부자 청년과 진시황은 엉뚱한 곳에서 영생을 찾고 있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줄 아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라고 하시자, 그는 포기하고 떠나버립니다. 그것을 보며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 19:24)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놀란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영생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얻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써는 할수 없는 하나님께서 예수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How do we get eternal life?

In Matthew 19:16, there is a scene where a person comes to Jesus and asks. “Teacher, what good thing must I do to gain eternal life?” This man is called a rich young man in Matthew (Matthew 19:22), and in Luke’s Gospel, he is called a rich ruler (Luke 18:18). So, we know that this man is a rich man, a ruler, and a young man. In a word, he is the man who has everything in the world. There was a person in China who had everything that man could have, and he also sought eternal life. He was the first emperor of China. Since the Emperor had unified the world, he wanted to live forever. He gave three thousand young women and men to the person, named Seobok, and sent them out to find ‘Bulocho’ which is thought of as an anti-aging herb. This question, ‘How can I get eternal life?’ can be an ultimately important question for all of us, if not now. It’s not just a luxury question for only the people who have everything in this world. Regardless of the rich or the poor, the prolonging of life is what everyone wants to gain, as long as they can do it at the expense of everything when they face death.

One answer to the question is explained in the Bible, Ephesians 2:1-10. Interestingly, Paul writes all of this in one sentence in his letter. Long sentences are not easy to understand. However, the point of the long sentence is clearly summarized in verses 8-9.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is not your own doing; it is the gift of God, not a result of works,.. ”

Eternal life is not gained as a reward for what we work. We just receive eternal life from God like a gift, regardless of our doing. However, the point that we should not miss is Jesus Christ. Grace is “God’s grace in Jesus Christ”, and faith is through “belief in Jesus Christ”. Why is Jesus Christ so important? It is because Jesus died on the cross for our sins and became the first fruit of the resurrection (1 Corinthians 15:23) to bring us into fellowship with the Father. Because of Jesus Christ, there is eternal life, and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because of Jesus Christ, receive eternal life through that faith.

However, the rich young man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Chinese emperor were looking for eternal life in the wrong place. When Jesus tells a young man who thinks that he can gain eternal life only by doing good things, ‘sell all your possessions and give it to the poor’, he gives up eternal life and leaves. Jesus says to his disciples,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Matthew 19:24). Amazed by this, the disciples ask. “Who can then be saved?” “With ma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Jesus answered.

Eternal life is obtained through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through faith in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This is the eternal life that God gives us that cannot be done by any works of man.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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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이렇게 물어 오는 사람에게 딱 부러지게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여도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또 온전하게 하나님을 설명하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설명할때, 보통 그 사람의 특징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특성을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하며, 그분의 속성을 다 설명하기에는 한나절도 모자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설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때 두번째  계명을 주시며 말씀하셨고(출 20:5-6),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배반한후, 모세가 다시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때,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반포하신 말씀이며(출34:6-7),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자, 모세가 그들의 용서를 비는 기도에 (민14:18) 사용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쓸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큰 죄를 지었을 때마다, 중보자들(모세, 느혜미야, 시편, 요나, 요엘.)이 이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게 기도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에서 살아갈때에 사람답게 살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습니다.아담의 타락이후 사람은 실수하고 자빠질수 밖에 없는 뒤틀린 존재가 되었지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안에 있는 사람은, 그럴때마다 회개를 통하여 다시 그 바른 관계속에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며 천대까지 인자(steadfast love)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 연결고리를 끊어 내지 않는한, 삼사대까지만 보응하시는 하나님께 항의 할수 있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그 죄를 씻게 하기 위하여  삼사대까지 쫓아다니시며 우리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끈질긴 열심이십니다. 회개로 그 연결고리를 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안에 들어갈때,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때 뜻 하신대로,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벌을 우리대신 받으신 분입니다. 회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로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Who is God?

Numbers 4:18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but he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visiting the iniquity of the fathers on the children, to the third and the fourth generation”.

How do we answer if someone asks us what kind of person God is? We know a lot about God, but it is not easy to answer the person who asks like this, exactly saying ‘God is such a person.’ For it is not wrong even though we say anything about God we know. But it may not enough to fully explain God. When we describe a person, we usually refer to that person’s character. God can be explained in the same way. We refer to God’s unique qualities as “God’s attributes,” and it would take more than a Full day to explain all of His attributes.

Today’s Words, Numbers 4:18, are God’s own personal explanation of what He is. When God gave the Ten Commandments, in the second commandment God described himself like this (Exodus 20:5-6). After the Israelites made a golden calf at Mount Sinai and betrayed God, Moses went back to Mount Sinai to receive the stone tablets. This is the word that the Lord descended in the cloud directly proclaimed to Moses at that time, (Ex. 34:6-7), and in Numbers, Moses prayed these words for the forgiveness of Israelites when they had sinned (Numbers 14:18). They are the attributes of God whom the intercessors (Moses, Nehemiah, ..) had prayed by quoting these words, whenever Israelites had committed such great sins that God had wanted to wipe out people of Israel. God has a lot of love, but I also think God is a severe person.

When God created man, He designed man so that a man can function best when he lives in a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fter the sin of Adam, man becomes a disobedient who makes mistakes and fall. However, those who are in a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ry to live in the right relationship again and again, through repentance whenever they fall. For them, God himself says that the Lord is slow to anger merciful and gracious, forgives evil, negligence, and sin, and gives the steadfast love to thousands of generations.

We know that the sins of parents can affect their children. Unless we break the link of the effect, no one will be able to protest God who only judges up to three or four generations. I believe that when we break the connection of sin through repentance and enter into a right relationship with God, we will have the blessed life of God, living the life as God designed when he created the first man.

Who is God? In order to live the best life of man, “The Lord, the compassionate and gracious God, slow to anger, abounding in love and faithfulness, maintaining love to thousands, and forgiving wickedness, rebellion and sin. Yet he does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e punishes the children and their children for the sin of the parents to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The Lord is the God who loves.

부활주일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3-14).

복음서들의 마지막 장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마지막 두장을 부활사건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 총 다섯장이 부활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을 처음 읽으면 모두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듯 하나, 천천히 반복하여 몇번 읽으면 전체적인 윤곽이 들어납니다.

먼저 보이는 패턴은 부활사건의 Outline 입니다.  우선 여자들이 아침일찍 무덤으로 가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처음 전하게 되며, 여자들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형태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 자신의 부활사실을 확인시키시고 마지막에 사명의 말씀을 부탁하십니다.  거기에 더 해지는 사건이 마태복음에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의 보고를 들은 제자장들의 사악한 반응 과 요한복음 21장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상황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은 갈리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데, 누가복음은 유대에서 만나고 승천하는 장면까지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갈리리에서 시작해서 갈릴리에서 끝내려는 의도와, 유대에서 시작해서 유대에서 끝맺음을 하려는 누가의 의도된 나열로 보고 있습니다.

또다른 특징은 복음서가 예수님과 먹는 장면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막16:14, 눅24:30.41, 요 21:12) . 이것은 육신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지 영이시라면, 음식을 섭취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셨지만, 틀린것은 돌아가시기 전에는 죽을 육신을 가지셨었고 부활하실때는 썩지 않을 영생할 육신을 가지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장래 모습입니다(요일 3:2).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생할 우리의 모습은 지금과 똑 같으나, 썩지 않을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우리를 죽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이들고 병드는 것도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노예가 되었었으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부활은 우리의 영생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도신경 마지막 부분). 한편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에 한번도 하신적이 없는 일, 잠긴 문을 통과하여 들어 오십니다 (요 20:19).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육신을 가진 100% 사람이심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여인들이 부활소식을 처음 접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의미는 마가복음 16:7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다시쓰면, ‘가서, 전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말씀? ‘너희들에게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전하라’ 입니다. 1세기경엔 여자들의 말은 법정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여자에게 처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부활후 그의 사역에 여자를 먼저 쓰고 계신것입니다. 모든면에 혁신적이던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도 여자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제일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고, 3년 사역 동안 거듭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가르침입니다. ‘죽으심과 부활’은 성경 전체의 정점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고,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죽음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20절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여자들의 입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상기 시키십니다.

그 다음 복음서들은, 모든 제자를 모아놓고 그들에게 지상 대 명령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8:18-20, 막16:15-18, 눅 24:46-49).  이것을 제일 잘 요약한 부분이 마태복음 28:18-20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입니다. 요한 복음 21장은 “내 양을 치라”(요 21:15-17) 하며 목자로 삼으심을 봅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었을때, 그의 믿음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마 16:18) 기억하게 하며,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 즉 자신의 몸된 교회를 맡기는 모습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1:20-23). 예수님이 복음 (죽음과 부활)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교회 와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시 살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중요하고,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 아닙니다.

PS: 수난주간 말씀 묵상을 마치며…

2021년 고난주간을 맞으며 사복음서에서, 마지막 7일간동안 예수님이 가신길과 그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첫날 나의 노트에 저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째날 세째날까지 읽고 쓰면서 (그땐 아직 팜썬데이 몇일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법을 생각하다가 블로그를 생각하게 되었고, 급히 블로그 싸이트에 싸인업을 하고 첫번째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족함을 느끼고, 두렵고,  부끄럽러워,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하나님 책임져 주십시요”하는 마음으로 용기내어, 기도하며 카톡으로 제 카톡에 있는 분들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 능력이 어떤식으로든 이 나눔속에서 역사하셨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정리되지 못하고 두서 없는 글, 읽어 주신 분께 감사드리고 부족한점 지적해 주시고 조언 주신분들께 또한 감사드리며, 계속 지도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블로그 싸이트는 계속 손질하며 발전 시길 생각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하난님의 은총이 풍성한 해피 이스터 되시길 기도합니다.

Holy Week (Saturday)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심

토요일에 일에 대하여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오직 마태복음 27:62-66, 다섯절 입니다. 예비일 다음날이면 안식일이고 안식하여야 하는데, 예수님을 고소하여 죽게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안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무덤을 지켜줄 것을 말합니다. 진짜 이유는 ‘혹시 예수가 전에 말한대로(마 12:38-42) 정말 부활할까 걱정이 되어’서 였지만 빌라도에게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마 27:64) 걱정이 되어서 라고 말합니다. 즉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거짓을 퍼뜨리고 군중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살아나는 것은 상관없지만, 폭동은 그의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에 허락합니다.

그렇게 성전을 지키는 로마 병사를 사용할 권리를 얻어 그들로 무덤 입구 돌을 인봉(seal)하게 하고 지키게 합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3일후 부활할 것이라고 몇번을 반복해서 제자들에 들려 주지만 그들은 그것을 잊고 있는데, 믿을수 없다고, 안 믿는다고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믿으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당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었다면 어떻했을까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일주일을 예수님의 발걸음를 따라, 말씀을 짚어 보았는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짚어보며 상기하여 봅니다.

일요일 (마 21:1-17, 막 11:1-11, 눅 19:28-44, 요12:12-16)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나와 눈먼장님/들(마 20:34)을 고쳐주시고 벳바게에 다다라, 새끼 나귀를 구해 타시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둘러 보시고 베다니로 나오십니다.

월요일 (마 21:18-22, 막11:12-19, 눅19:45-48, 요12:17-19) 에는 성전에 들어가시사 성전청결 후 백성들을 고치시며 가르치시고 나오십니다.

화요일 (마21:23-26:1, 막11:20-13:37, 눅20-21장,요12:20-50)에, 다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말씀을 전하실때, 1)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의 도전을 (마 21:3, ), 2) 바리새인, 헤롯당들의 도전, 3)사두개인의 도전을 하나 하나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 이심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당해 내지 못한 유대의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시기합니다.

수요일 (마 26:1-16, 막14:1-11, 눅22:1-6), 유대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미고, 예수님은 죽으실 준비를 하십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사람들, 가롯유다와 예수님을 사랑하는 옥합을 깬 여인이 각각의 역할을 합니다.

목요일(마 26:7-75, 막14:12-72, 눅22:7-71, 요13장-18:27) 에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드시며 (성찬제정),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모습을 보이고 여러가지를 가르치시며,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후를 준비시키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러 발길을 돌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감람산, 겟세마니동산으로 가시어,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를 마치셨을때, 가롯유다와 온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에게 잡히시어, 제사장앞에 끌려가서, 죽을죄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쓰십니다.

금요일(마27장, 막 15장, 23장, 요18:28-19:42) 새벽,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어가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죄목으로 십자가 형에 내어주게 합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가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저녁이 되었을때 아리마대 요셉 (과 니고데모)가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향료를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새 무덤에 두십니다.

인류의 보편적 딜레마를 꼽으라면, 생노병사일 것입니다. 이 딜레마는 아담의 불순종의 죄에서 기인하였다고 기독교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창조물 중에 최고 걸작품인 인간을 사랑하시어, 손수 이 문제를 풀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실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변덕스런 분이 아닙니다. 원칙없이 자기 맘대로 휘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수학 문제를 풀때 공식이 필요하듯, 하나님은 이 문제를 푸실 원칙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구약성경은 그 원칙을 제공합니다. 그 원칙이 구약의 유월절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풀어내시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1500년후, 하나님은 그 공식을 하나님과 온인류의 관계에 대입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고 천국백성을 삼으시길 원하십니다. 즉 그 공식으로 인간으로써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에 생노병사의 문제 (Universal Dilemma of human being)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예수님의 헌신으로, 수천년동안 인류가 풀어 보려고 안달했던 문제가 풀렸습니다. 애굽에 잡혀 강제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의 피로 살아남아 유월절 날이 밝자 걸어 나갈수 있었던것 처럼, 죄에 얽매여 있던 인류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 그의 피로 죄의 굴레 (생노병사의 굴레) 에서 영생으로 걸어 나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Holy Week (Good Friday)

속죄 (Atonement)

대제사장 기도로 알려진 요한복음 17장에 기도의 첫마디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입니다. 이사야 48:11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이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아들의 신성을 확증 하는 말씀이며, 하나님이신 아들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온 세상을 구원할수 있게되고, 그 영광이 아버지께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일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 영화로운 일을 이루는 아들 예수님은 그 일을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유대인들에게 잡혀 제사장들 앞에 선 예수님은 ‘죽음에 해당하는 죄’, 불경죄를(마 26:66)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수 있는 권리는 없었습니다(요 18:31). 로마는 사람을 죽일수 있는 권리를 자기들이 갖음으로 유대의 모든 일에 간섭할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로마 관정으로 끌고가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를 고소합니다.

고소하는 상세한 과정이 공관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요한 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을 끌고 가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목을 바꿉니다. ‘불경죄’가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반란죄’였습니다(눅 23:2).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반란입니다. 로마법에 죽어야만 하는 죄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질문입니다 (마 27:1,막15:2, 눅23:3, 요18:33). 예수님의 대답은 “네말이 옳도다”. 영어로는 “You have said so”입니다. 같은 말인것도 같지만, 어딘지 느낌은 다릅니다. 아마, 빌라도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내리기를 거부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내가 왕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한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7)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빌라도는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그가 유대인의 법대로 하면 죽어야 할 불경죄를 지었다고(요 19:7) 실토합니다.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의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제 죽일 방법이 없어 졌습니다.

그런데 군중 처럼 어리석고 군중 처럼 강한 힘도 없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군중은 빌라도에게 갇힌사람 하나를 놓아달라고 할 권리를 갖습니다 (막 15:6, 마 27:15).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 군중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 로마가 백성들에게 베푸는 당근 같은 작은 은전이었습니다. 몇일전, 호산나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던 백성들은, 이제 몇몇의 제사장의 선동으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마27:20, 막15:11). 군중의 반란을 막는것이 주임무중에 하나였던 로마총독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 줍니다 (막15:15, 눅23:23-4). 억지로 내어 주었다고해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죄가 없어지진 않습니다.

예수님은 또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합니다(마 27:26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하지만, 너무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흘린 예수님은 자꾸 쓰러지며 시간이 지체되자,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을 붙잡아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마 27:32, 눅 23:26). 골고다에 이르러 제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조롱과 모욕은 끝나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옆에 같이 처형 받는 강도 까지도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이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여 표현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대목에서 믿는 사람이라면, 눈물을 훔치는 척은 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복음서들은 ‘가상칠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세가지는 기도입니다. 기도! 예수님처럼 기도를 많이 한분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셨지만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셨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기도를 하십니다. 그 기도의 첫번째는 눅가복음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들은 배우고 가르침을 받은대로 살아가는 이방인이고 유대인의 싸움에는 무관심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수치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중에도 예수님은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두번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 15:34). 이 순간은 예수님이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순간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유일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대신한 예수님의 고통에 제일 깊은 나락이었습니다. 또 한 기도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캘빈은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 어린양으로 완전히 죽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 이루시었다” (요 19:30) 하신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하실일이 없으신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제6시(12시)가 되었을때 하늘은 검어지며 제9시(오후 3시)에 “다 이루었다”하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이순간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을 모두 마침심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었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나누었던 성소휘장이, 이 순간에 둘로 찢었었다고 복음서들은 증거합니다.(마 27:51막 15:38,눅 23:46). 유대의 희생 제사 제도가 폐지되고, 예수의 피를 통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앞에  자유롭게 나갈수 있는 길이 을 열린 것입니다.

저녁이 되자 아리마대 요셉 (요한 복음은 니고데모도 언급함)이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향료를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새 무덤에 두십니다.

Holy Week (Thursday)

The Big Day

목요일은 예수님께 바쁜 날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수 있는 이땅에서의 마지막 날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날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목요일은 유대력으로 첫째달 14번째 날이고, 이날 해질때에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불에 구워 급히 먹는 (출 12:6) 유월절, 즉 무교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사고는 무교절을 니산월(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아빕월로 부름) 14일 또는 15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도 당시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예수님은 14일에 제자들을 시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음식먹을 준비를 시키십니다 (마 26:18, 막 14:13-15, 눅22:8).

저녁이 되었을때,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유대 관습대로 비스듬히 앉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 하시며 성찬을 제정하십니다. 기독교에는 두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입니다.

식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꺼냅니다. 배반한 제자가 같은 식탁에서 그 선생과 태연히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가증과 배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Lord)’라 부르지만, 유다는 한번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 13:5).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손수 보이시며,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하십니다. 발을 씻기신후 유다의 배신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다고 가정할수 있는데, 이것이, 자신을 배반한 죄인까지도 사랑하신 지식에 넘치는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이고(엡 3:18),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막14:21) 하신 죄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이십니다.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요 13:30)고 “저희가 찬미(sung a hymn)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마 26:30, 막 14:26). 예수님도 노래합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만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가는 곳에 그 제자들이 올수 없다’는 말로 돌려 말하시며,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계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눅 22:24) 라는 다툼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 (눅 22:27) 하시며,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기신 나라를 너희에게 맡기니 섬기는 자로 큰 자가 될것을 부탁하십니다. 그러시며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마 26:31,막 14:27)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며 부인하지만, 인간의 연약함만 드러남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의 목요일을 생각할때 요한복음은 중요한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중 절반이(12-19장) 예수님의 마지막 7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중  반이상 (13장- 18:27), 6장이 목요일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히 요한복음을 목요일에 책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만찬을 마치고 임박한 일어날 일들에 제자들이 놀라고 실망할 것을 걱정하시며 여러 말로 힘을 북 돋우시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요한은 장장 4장에 걸쳐 적고 있습니다 (14, 15, 16, 17장).  두번의 “I am” Statement(요 14:6, 15:1)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신념을 심어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실것을 약속하시고 (요 16:7),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실것을 (요 16:23) 약속하시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라고 하시며 격려하십니다. 17장에서는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17장 1-5절 에서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6-19절에서는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20-26에서는 제자들의 메세지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될 사람들, 즉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명의 수제자를 따로 데리고 또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곳이 겟세마니라는 곳이었는데 그 문자적 의미는 “올리브 기름을 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 기름짜는 틀이 있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하는 모습과 예수님이 그 기도후 그곳에서 잡혀가 으스러지듯 피를 흘리며 죽음심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그곳에서 생산되는 올리브기름과 사용하는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듯하여  겟세마니라는 장소가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와 상통함을 볼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마치시자, 유다가 큰 무리를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타납니다 (막 14:44).  예수님께 다가와 키스로 인사하는 유다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26:50). 여기서 “친구여” 하는 단어는 그릭어로 < Ἑταῖρε 헤타이레>입니다. 친근함이나 애정을 표현하는 단어 Philos와는 다른, 안면이 있는 정도의 관계(마 20:13, 22:12)에 쓰인 말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신게 아니라 잡혀 주신것입니다. 그러나 이순간을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막14:50)고 적고 있습니다.

이제 유다 무리에게 끌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연행되어 갑니다. 예수님의 죄를 증명할 증거를 댈수가 없습니다. 결국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써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냐?” (마 26:63, 막 14:61). 유대 전통에 대제사장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죽을수 밖에 없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은 진실을 말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불경죄로 유대인들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모욕과 희롱을 당합니다 (눅 22:63-64. 막14:65).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중에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어서 인지, 이유없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제사장집 하인들처럼, 안해도 될일을 해서 죄를 더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모독한 불경죄를 얻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그 마당까지 쫓아 들어가는 열정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이 그를 알아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막 14:67)고 말 할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라고 고백했던 믿음의 패기는 어디가고 예수님을 세번씩이 부정하는 연약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타락합니다. 그리고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을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마26:75)하는 베드로를 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부정은 알고 있지만, 살아가며 순간 순간 내가 크리스찬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때가 몇번이나 있었나 기억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죄까지 안고 이 아침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십니다.

Holy Week (Wednesday)

예수님의 비젼

봄은 부산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갖 생물들이 나름대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구석에 쌓여있는 묵은 나뭇잎을 발로 툭 쳐보면, 그 속에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유월절은 삼/사월에 해당하는 유대 명절입니다.

예수님의 수요일에 행적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틀이 지마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막 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마 26:2). “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눅 22:1). 유대 봄 명절이 낼 모래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달을 첫째달(아빕월)로 정하게 했고, 그달 10째날에 유월절양을 고르게하십니다.  유월절은, 14번째날 해질녁에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고,하나님은 양의 피를 보고 진노를 건너뛰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5번째날 날이 밝으며 급히 애굽을 탈출합니다. 무교절은 출애굽기 12:18, “정월(아빕월/바벨론 포로 이후는 ‘닛산월’이라고 함)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의 말씀대로,  14번째날 저녁부터21번째 날 저녁 까지7일간을말합니다.  유대에 하루의 개념은 해질때부터 다음날 해질때까지를 하루로 본다는 것을 기억하면, 유월절과 무교절을 언급하는 구절들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요한복음의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가 출애굽과 연관된 있음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열째날(일요일/종려주일)에 ‘골라진’ 하나님의 양이 되셨고 14번째 날 해질때, 유월절 양잡는 때(목요일 저녁)에 잡히시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세번의  ‘고난, 죽음, 부활’ 예고), 이제 그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것을 아시며 다시한번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마 26:2). 수요일의 사건에서는 명절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제 각각, 이른 봄처럼 그 속에 꿈틀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성경은 먼저 사악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궤계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명절에는 전세계에 퍼져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잖아도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예수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질까 두려워 예수를 죽일 궤계를 꾸밉니다(눅22:2, 마 26:4, 막 14:1). 그러나 소동을 두려워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하던 그들에게 뜻 밖의 구원자가 나타납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겠다고 나선것입니다 (마26:14, 막14:10, 눅22:4). 그들의 기대는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날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십니다 (마 26:6). 이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 (막 14:2, 마26:7)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마태는 ‘제자들’이라 하였으나,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쓰고 있다) 책망하며 아까워하며 불평합니다.  요한복음 12:4-5에 의하면 그 불평에 목소리를 낸 사람은 가롯 유다였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불평을 넘어 자신의 선생이신 예수님을 팔아 은 삼십양의 돈을 챙기는 배반까지 나아갑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나가, 그들의 악행에 동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 여자를 책망하는 것을 말리시며, 그것이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막 14:8, 마26:12).  예수님의 비전인 ‘죽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비전이 될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빕월 10째날에 골라진 양이 14째날 저녁에 죽고, 그 피가 문설주에 발라집니다. 그 밤에 하나님은 애굽 각 집을 돌며 모든 사람과 육축의 처음난 자를 죽이십니다. 그러나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진 집은 죽이지 않고 넘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애굽을 향한 심판으로 (처음난자를 죽이심), 이스라엘 백성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나올수 있게 되고, 자유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일이, 하나님의 양되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 온 백성에게 일어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의 노예가 된 온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삶으로, 천국 백성으로 살도록 인도해 내시기 위하여 죽음 당할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것이, 유월절을 앞둔 예수님의 기대이고 비전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여 ‘머리에 향유를 붓는 사건’을 수요일에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이 일이 예수님이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을하시기 전에,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후,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실때,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2:2). 이런 부분도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때, 복음서는 역사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일과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것과 그 의미을 전달하기 위하여 씌여진 복음서만의 특징을 갖는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수요일의 얘기에서는 여러 갈림길을 봅니다. 명절을 맞아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내어 인류를 구원할 비전을 바라보는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귀한 나드의 옥합을 깨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돈 사이에서 은 삼십양의 돈을 택하는 유다도 보게 됩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