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큰 은사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August 17, 2024. SaturDevo

고린도전서 12:31은 앞뒤장(12장과 13장)을 연결하는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30은 크리스천을 한 몸으로 비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두신(18절) 한 몸에 붙은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할이 틀리다고 서로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화합하고 분쟁없이 서로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8-30절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뒤를 잇는 질문식 수사법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며, 첫째, 그것은 그들 은사에 높고 낮은 계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자존심을 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와, 자신이 받은 은사보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하며 불화를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 31절은 위의 내용과 다음 13장의 내용을 잇고 있습니다. 많은 영어 성경은 ‘그러나 (But)’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2장의 내용과 12:31절 앞부분의 내용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이 상반되는 내용임을 나태내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δὲ데)를 한국어성경과 NIV성경은 생략했는데, 물론 모든  δὲ가 다 But 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지만, But이 들어가는 것이 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말에는 ‘어떤 사람이 은사를 이미 받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것인데, 자기가 받은 은사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일하라는 충고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는 말은 분명히 상반되는 듯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내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데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두번째는 내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31절 말씀에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또는 성경)은 주신 은사에 충실하라는 말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두가지를 모두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12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은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Spiritual gift)입니다. 야고보 1:5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은사(gift)를 구하느냐는 중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자리에 가고, 더 큰 결정권을 갖고, 더 큰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자랑이나 자존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동기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고전 14:5, 12, 17, 26) 위하여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사도 바울이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b)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보이는 가장 좋은길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이라는 13장의 내용입니다. 사랑없이 하는 어떤 은사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은사가 진정한 또는 영원한 가치를 갖으려면 사랑으로 행하여 져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섯을때, 예언의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방언이 무슨 가치가 있겠으며, 지식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 만은 예수님 앞에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랍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은사는 이 땅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형제와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한다는 말은 더 큰 사랑- 성경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을 보여 주기를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도망치는 위대한 승리자

열왕기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

August 10, 2024. SaturDevo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열상19:1-3)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위대한 승리자’ 엘리야가 도망친 이유는 이세벨의 위협적인 전갈입니다. 그러나 선뜻 이해가 안가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마치 웃기는 한국 드라마같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작가들이 이야기를 배배 꼬다가, 다시 풀기는 풀어야 겠는데 스릴있고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풀 방법이 꽉 막혀 버렸을때, 유치한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심리학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도 그런 특별한 사람중에 하나로 친다면, 무슨 행동을 하든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수퍼 능력을 체험한 선지자로써, 그래서 그 열심으로 사악한 왕 아합을 당당히 대면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많은 백성 앞에서 증명하며 바알의 선지자 450인까지 처형한 위대한 믿음의 용사가 그까진 왕비의 협박 전갈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는 것은 만화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엘리야를 이세벨의 협박에 정신못 차리고 도망가게 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고, 또 하나는 불완전한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명철입니다.

엘리야는 진정 믿음의 사람이었고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불완전한 타락한 인간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7:1부터 그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름없는 한 여호와의 선지자로 왕의 길을 가로 막으며 바알신을 따르는 왕에게 도전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아합왕 앞에 내 보내기 위하여 삼년반동안 훈련시킵니다. 그후 그는 다시 아합왕 앞에 나타나,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시합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 앞에서 진정한 신을 가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자리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열상 18:22). 이 말에 숨어있는 뜻이 의미 심장합니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기 혼자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이 바알을 따른 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서는 다윗같은 의연함이 보이지만, 나중에 하나님앞에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열상 19:10, 14)과 같이 보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감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엘리야입니다. 이 불안감은 이세벨의 위협적인 전갈을 받았을때, 갑자기 솟아나와 그를 두려움에 감싸이게 하고 허둥대며 순식간에 200km를 달려 브엘세바로 도망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모든 상황을 공시적으로 보시는 하나님은 엘리야가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 도망친 엘리야를 신실히 대하시어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막 1:2-3)의 선지자로 보내십니다(열상 19:15-18). 하나님은 엘리야를 왔던길로 다시 돌려 보내며, 하사엘과 예후를 기름부어 왕으로 만들고, 엘리야를 기름부어 그를 대신할 선지자로 만들어 아합집안을 심판하고 숨겨 놓으신 칠천인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시는 준비자로 삼으심니다. 하나님의 명철 하심입니다. 실패한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백성을 애굽노예에서 구해 내신 것처럼,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통하여 유럽을 복음화 시키는 선구자가 되게 하신 것 처럼, 도망친 엘리야를 사용하시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가 되게 하시었습니다.

군사를 잘 쓰는 장군에게는 버릴 군졸이 없고, 글 잘쓰는 사람에게는 버릴 글자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믿는 사람은 천국을 세워 나가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인줄 의심할 바 없습니다.†

Let it be 평안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August 3, 2024. SaturDevo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평안을 갈구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며 도전과 성취의 욕망을 자극하는 속담도 있지만 그 말도 궁극적으로는 평안을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무엇이며, 참 평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질문으로 떠오릅니다.

평안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을 말한다고 합니다. 즉 삶의 주위에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슴으로 마음에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읽컽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과거에 흠이 없어야 할것입니다. 현재 육신이 건강하고, 주변에 자신을 어지럽히거나 위협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복지가 보장되어 있어야 할것입니다. 최소한 이런 상태가 되어야 현재 어떤 사람이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라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그래도 괜찬은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마음에 ‘무슨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평안의 상태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 평안은 깨지기 시작합니다. 물리적으로 표현 하자면, 공이 굴러가다가 가장 낮은 곳에 가서 멈춰섰는데 바람이 분다거나, 누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거나, 개미가 공밑에 흙을 옮기거나 한다면, 그 공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평안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그래서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 상태로 평안할까요? 바다물은 끝임없이 출렁입니다. 한 순간도 쉬지않고 끊임없이 크고 작게 출렁입니다. 어디에 평안이 있습니까?

동기부여 전문가라는 멜 라빈스 라는 사람은 “Let Them Theory”(냅둬 이론)을 주장합니다.

“주말에 친구들이 당신을 브런치에 초대하지 않는다면, 냅두세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과 한 약속에 관심이 없다면, 냅두세요. 아이들이 이번 주에 당신과 함께 약속한 일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냅두세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강요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뀌도록 강요하지 마십시요. 그들은 당신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냅두십시요. 그런 다음,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이 무엇을 할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요. 대신 “그들을 냅둬” 이론을 적용해 보세요.”

주위 상황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평안을 구하는 세상적인 지혜입니다. 비틀즈가 노래한 “Let it be”입니다. 그러면 혼자 평안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더 많은 택스를 요구합니다. 더 많은 법으로 구속하고, 더 버릇없이 굴며 압박해 옵니다. “Let it be”라고 노래하던 비틀즈가 결국 해체된것 처럼, “Let them theory”는 ‘let them’하며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요한복음 14:27 평화(Hb. shalom)라는 표현은 영어 단어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갈등과 혼란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축복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6:24-26; 시 29:11; 학개서 2:9 ). 그리고 그 결과로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며 의미입니다. 이것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shalom)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제의하는 평안은 모든 것이 온전한 가운데에서도 갖을까 말까한 평안인데 반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온갖 어지러움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환란을 걱정하고 근심하는 대신, 그 혼란스러운 세상을 사랑하는 평안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는 것은, 밑둥 잘린 거목위에 집을 짖고 있는 새와 같습니다. 그 나무는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나무입니다. 비틀즈처럼 let it be 하지 마십시요. 비틀즈는 Let it be 후 해체되어 끝장이 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복음을 나누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속에  크리스천

마가복음 6:14-15.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July 27, 2024. SaturDevo

마가복음 6장 7-13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6:30에는 그 전도여행 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뜽금없이 헤롯이 등장하며 그가 세례요한을 죽이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잘 진행도고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헤롯이야기는 맥을 끊기는 기분입니다. 나와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는 외국분이 제기한 이의 입니다.

마가는 이야기를 아무 의도 없이이 렇게 배치한 것은 아닐것입니다. 왜 이야기를 여기에 넣었다고 마가가 설명한 것은 없습니다. 마가 복음과 성경 전체의 구성과 일치하는 구성이 유효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잠시 예수님의 제가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능력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헤롯 이야기는 이런 사건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실체와 미래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사방에 퍼졌고, 그 소문은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선지자도 아닙니다. 세상의 눈 높이가 그곳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에 비유할려고 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것을, 그리고 세상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헤롯도, 이들도 저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전도하고 있는 세상의 상태입니다.

두번째는 세상의 잘못된  추구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며, 비유로 얘기해주며 당신들이 추구하고 들어가서 살게될 세상임을 설명해 주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추구는 전혀 방향이 틀립니다. 그들은 정욕을 추구합니다. 헤롯은 형제의 아내까지 욕심내며 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헤로디아는 남편까지 배반하며 세상권세와 향락을 추구합니다. 그 딸 살로메는(성경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삶에 ‘나몰라’라 하며 대중의 눈길을 즐깁니다. 요즘 연예인들과 흡사합니다. 헤롯의 고관들, 군대장관들, 지역유지들은 왕(사실 헤롯은 왕이 아니라 분봉왕(Tetrach), 위임 통치자로 그 지역에 제한된 권력만을 갖는 사람입니다)의 파티에 초대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리를 탐하고, 안목의 정욕을 즐기고 허황된에 자부심을 추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세째는 전도자들이 부딪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한 암시입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싫어하면서도 잘못된 의협심에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어린아이인 살로메는 눈하나 깜박않고 소반에 얹혀진 세례요한의 머리를 자기 어머니에게 갖다 줍니다. 그런 끔찍한 장면을 보며, 헤롯의 사람들은 말 한마디 안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권위가 무참히 무시되고 짖밟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속에서, 세례요한으로 잘못 간주되고, 엘리야로 간주되고, 선지자로 간주되는 예수님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도 어떤 일과 마주해야 할지를 암시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다행 스럽게도 우리는 결국이 어떻게 될 줄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실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악을 초월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위한 것인줄 압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여야 할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울 지라도, 우리는 그 종국을 알고 있기에 자신있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악인

열왕기상16:2: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July 20, 2024. SaturDevo

열왕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바쁘셨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을 고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 10지파를 떼어서 주권자를 삼습니다. 그랬더니, 이 느밧을 아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때문에 자신의 주권이 위태롭게 될까 염려하여, 북 이스라엘땅에 두개의 성전을 지어 그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워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가는 대신, 이 금 송아지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하는 엉뚱한 짓을 합니다. 이 일은 자신에게 주권을 주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도 하나님을 배신하게 만든 죄로,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또 이 여로보암을 징계하기 위하여,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여로보암의 집을 벌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을때, 바아사는 나답를 죽이고 여로보암의 집을 잔인하게 지워버리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바아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왕이 되어, 다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됩니다(열상 16:2).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어 술에 취해 있을때, 시므리는 엘라를 죽이고, 왕이 됩니다. 왕이된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아사의 집이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여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합니다.

이런 일을 행한 시므리는 다시 오므리에게 당하고 오므리왕조, 또는 오므리 아들이름이 따서, 아합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아합은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 유다까지 엉망으로 만들게 되며, 하나님은 예후를 세워 아합집안을 징벌합니다.

이렇게 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된 자가 그 징벌하기 위하여 행한 악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 받는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성경은 여러 군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시지만, 바벨론은 유대에 행한 그 악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습니다. 현대 진화된 눈으로 보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하나님 놀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계획을 진전시키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애굽 바로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을 유대지도자들에게 넘기기 위하여 유다를 사용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하여 빌라도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죄없다 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Be sure of this: The wicked will not go unpunished, (NIV))” (잠11:21). 그들이 반듯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선을 위하여 지은 죄든, 의를 위하여 지은 죄든, 어떤 죄든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선한 사람이든, 권력있는 사람이든, 이븐 그것이 하나님일지라도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으신 것일까요? 바로를 사용하신 것이, 바벨론을 사용하고, 유다와 빌라도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죄있으신 것인가요? 바울의 언어로 “그럴수 없느니라(By no means)”…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까? 인과(cause and effect)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사람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역을 맡길 만한 성정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만한 성정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일을 그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유다 만큼 휼륭히 그 일을 해낼 성정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되길 원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 맞을지 기도하며 성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요즘 미국과 한국의 정치판이 어지럽습니다. Crooks의 역을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역을 맡을 지라도 여로보암이나 바아사, 시므리처럼, 잔인하게 처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가 필요한 곳에 사용하고, 반듯한 나무는 반듯한 나무가 필요한 곳에 사용합니다.†

두란노 서원 

사도행전 19:9-10.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July 6, 2024. SaturDevo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러 어떤 도시에 가면 보통 제일 먼저 시나고구를 찾아갑니다. 유대인 회당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3차 여행으로 에베소에 갔을때도 역시 그는 에베소의 시나고구를 찾아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곳의 어떤사람들이 믿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도를 비난하고 일어나자 그는 그곳에서 나와 복음을 전할 다른 곳을 찾다가 회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의 두란노서원을 찾게 됩니다.

두란노 서원은 바울이 만든 성경 학교가 아니라, 그 건물에 있는 강의실의 이름이었습니다. 그곳이 헬라어로는 두라노스의 강의실( the lecture hall of Tyrannous)였습니다. 두라노스라는 사람이 소유한 강의실이었는지, 그가 강의한 곳이 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장소를 돈을 내고 빌렸든지, 또는 내도 작은 돈을 내었든지 또는  거져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사용하였다고 믿어집니다. 어떤 성경 카피본에는 제5시부터 10시까지 강의했다고 시간을 적고 있습니다(ESV note). 즉 바울이 성경을 강의한 시간은 매일 오전11부터 오후4시까지 다섯시간을 강의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날씨 관계로 모든 사람들이 한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갖었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텐트 만드는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자비량 선교사였지만(행18:3), 그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그 시간에 복음을 전했고, 또 그 복음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역시 그  휴식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그 곳에 와서 복음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공부한 사람들은 그 복음을 그들 주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두해 동안 계속 되었을 때,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10)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동북부를 여행하다 보면, 유럽 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곳이라서 그런지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는 대부분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관광객들이 부산하고 어수선하게 드나들고 있는 상황속에서도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 앉아서, 또는 무릎까지 꿇고서 잠간씩 이나마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그들의 신심은 말씀의 확신에서 나온 마음일까, 하나님이 계실 만한 웅장한 교회당이기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일까  궁금해 집니다. 과연 이 곳에 하나님은 계실까?  돈을 내지 않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성당이나 교회는 많지 않은데, 종종 있다고 해도 들어가 보면 쇠락해가는 부자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암울하게 하곤 합니다. 어마 어마한 돈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물질의 희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전들이 예배와 전도와 선교의 센터가 되는 대신, 돈버는 장소로 바뀌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를 가지 않고 건물을 보기 위해 갑니다.

바울은 시나고구를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기에 제일 먼저 찾아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수 없음을 알자, 사설 강의실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변증하였다고 합니다. 바울과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아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즐기는 휴식을 포기하고 성경 공부를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온 아시아사람이 예수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갑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크리스천과 십계명

사도행전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June 8, 2024. SaturDevo

사도행전 15장은 소위 말하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2:4)로 교회가 생겨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를 향하여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부터 오는 핍박과 고난이었다면, 15장의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은 내부 분열의 징조였습니다. 복음이 열심히 전파되고 있는 이방 도시 안디옥에 유대에서 온 바리새파 계열 크리스찬이 새로운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좋은데, 진정 구원을 받으려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아마 당시 예수를 믿던 이방인이었다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모세도 빼놓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나와 같이 성경을 읽으며 복음을 나누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현대 이방인입니다. 그분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 옵니다. 십계명은 강조하면서 왜 네번째 계명인 안식일은 성경대로 안지키고 선데이로 하냐고 합니다. 구약에 어떤 계명은 크리스천의 중요한 가르침과 일치하지만, 어떤 계명은 안지키고, 지킬 수가 없는 것이 있는데 그런것은 누가 결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데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되어 구원받는 것은 간단한 것 같은데, 계속 공부해 들어가다 보면 걸리는것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는 강조하면서 음식법은 무시한답니다.

이런 질문들은 수도 없이 제기 되었고, 여러가지 방법과 여러가지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설명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제이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도, 할례는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20) 라고 하면서, “다만”를 넣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첫 번째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또, 갈라디아서도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3:24-25)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율법이나 선지자, 즉 구약성경은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크리스천은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던 율법은 더이상 그 역할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신약의 백성이 구원받고 새 생명을 살아가는데 구약에 매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신약의 크리스천은 구약의 어떤 율법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요1:14)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구약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든가,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읽고 이해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레위기의 제사법, 정결법, 의식법같은 율법도 우리는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적용할 수 없는 계명으로 주신 말씀 속에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하나님과 더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갖을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신도들에게는 십일조를 내느냐, 십일일조를 내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구약의 율법에 매일 필요는 없지만,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는 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에 매여 노예처럼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공부하여, 그 분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동하며 산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훨씬 더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줄 확신합니다. †

하나님의 고집스런 구원 의지

마태복음 12:38-39.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June 1, 2024. SaturDevo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힘을 얻어가며 번창하여 가자 의심하고 시기하며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중에 몇 사람이 “힐난하며,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부탁하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8:11은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며 ‘요나의 표적을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얼뜻 보기에 요나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게합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요나를 예수님을 예표한 사람으로 말하기도 하여,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요나는 예수님이 인용할 만큼 중요한 사건에 관계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12:41절의 말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는 말씀은 요나를 예수님 버금가는 사람쯤으로 간주한는듯 합니다.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할때,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오직 보여줄수 있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라니…? 

요나서를 읽어보며, 요나의 표적과, 요나의 인격은 구별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나의 행적은 간단합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배를 타고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풍랑으로 인해 사공들에게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며, 기도함으로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대로 니누웨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니누웨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고 그들을 구원해 주지만, 요나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아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 항의는 고집스럽습니다. 그 고집에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4:10-11)하는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 이야기에는 회개, 선교, 하나님의 주권, 긍휼 등 여러가지 주제가 있을 수 있고 교훈이 담겨 있지만, 요나의 인격은 칭찬할 만한 것이 단 한가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있다면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바른 지식은 갖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도 의심입니다. 오히려 안했다고 확신이 드는 상황은 이후 얼마되지 않아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와,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이 그 완고함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이란 말이 결코 요나의 사람됨을 칭찬한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는 말씀을 요나서와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가 밤낮 사흘도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은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간 죄로 요나에게 강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요나의 전도’도 요나가 원한 일이 아니라, 간신히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거절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실행한 일에 불과 합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말 보다는 ‘요나를 통하여 보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의 표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이 말이 너무 길어, 간단히 ‘요나의 표적’이란 말을 쓰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사실 요나의 인성은 제로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간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드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 담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궁지에 몰려서 하는 기도에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듯, 요나에게 똑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더는 도망하거나 거부할수 없었던 요나는 니누웨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악에서 돌아섰을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이를 심히 싫어하여 성내며 하나님께 대듭니다. “나를 죽이십시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겠습니다”라며 대듭니다.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의 이 성질과 하나님의 질문은 박넝쿨 사건을 통하여 또 한번 거듭됩니다. 요나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시기와 질투로 꽁꽁 뭉쳐진 인간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며, 죄성에 물든 인간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와 긍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나서는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는 요나를 끝내 잡아와 전도자로 만들듭니다. 음란하고 악한 세대로 대표되는 니누웨를 끝내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람의 반응

열왕기상 13: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May 25, 2024. SaturDevo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일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만, 일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말씀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열왕기상 13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세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로보암과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의 늙은 선지자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죽음 이후 새로 태어난 나라입니다. 그 시조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선지자 아히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열상11:26-40). 그는 제일 먼저 방어 요새를 건설합니다(열상 12:25). 그리고 나라를 응집시킬 정신적 지주를 마련하길 꾀하여 금송아지 둘을 만들에 벧엘과 단에 두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송아지를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열상 11:38)하는 말씀과 전혀 상통하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은 이런말은 까맣게 잊어 먹었습니다. 벧엘에 성전을 짓고 금송아지를 세우고, 성전앞에 서서 분향하려는 찰나,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외칩니다.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열상13:2). 북 이스라엘은 망하고 유다의 요시아라는 왕이 나서 북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 앞으로 회복시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열하23:16). 여로보암은 손을 표서 “그를 잡으라”소리치지만, 그 손은 그 순간 말라 더이상 거두지 못합니다. 여로보암은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의 기도로 다시 손이 온전해 집니다. 그러자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그에게 충성을 구할 생각입니다. 그를 통하여 북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풀어 풀어보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합니다.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라며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기억하지도 못하고, 실천할 생각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혼동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하나님을 찾지만, 잘 되나가면 하나님을 거들떠도 안보는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에게 전해지자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뒤 쫓아 가서, 자기와 함께 집에 가서 떡을 먹자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했던것 처럼 거절합니다. 그러자 늙은 벧엘 선지자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열상 13:18)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를 쫓아가 같이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상 앞에 앉았을때에,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먹고 마시고 돌아갔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3:22). 결국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다가 길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구슬려 보통 사람중에 임명된 산당 제사장들의 저주를 벗어나게 하려고 그를 쫓아갑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되 돌아오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있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합니다. 잘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망하게 하고, 자기도 망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경히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고 교묘히 유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었는가 싶지만, 결국 끝은 죄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께 버려진 사람입니다.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알고 두려워하지만,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속았다고 해서 그의 죄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13:26)이 됩니다.

열왕기상 13장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냥 흘러 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남용하였다고 핑계해도 죄를 용서 받지 못합니다. 거짓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수 없었다고 해도 그 죄 값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이 마땅히 하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

기독교의 오순절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May 18, 2024. SaturDevo

맥추절은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중에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4에서 하나님은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라고 말씀하며, 23:17은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무교절,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 수장절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년에 세번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절기들 중,  맥추절을 민수기(28:26)와, 신명기(16:10)에서는 칠칠절로도 부릅니다.  칠칠절이란 말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레23:15-16)에서 일곱 안식일, 곧 일곱번의 7일을 그렇게 명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Shavuot(샤브옷) 이라고 말하고 있고, 희랍어로는 Pentecost (오십번째)라는 말로, 오순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이 칠칠절 절기 였습니다. 그래서 온 사방 나라에서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수많은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행2:5).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4-5)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한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다가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행2:1-3). 그리고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행2:4) 합니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각각의 언어로 복음이 전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난 사건은 50일전 유월절에 일어났던 사건과 완전히 역전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교절도 삼대절기 중에 하나이기에 그때에도 사방열국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게 되었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에 이어지는 7일간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그때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즉 유대 지도자들의 군중 심리전에 놀아난 그들의 함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고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 2:21) 하는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를 받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크리스천이 된 사람이 삼천이나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칠칠절은 예수님의 성령 강림과 합력하여 큰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기독교는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오순절을 교회의 시작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유대에서 봄에 보리와 밀의 수확이 있습니다. 유절절 다음 안식일에 보리의 첫 단을 베어 여호와 하나님앞에 흔들는 요제를 지냅니다. 그리고 일곱번의 안식일이 지나면 밀 수확철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빵을 구워 하나님앞에 맥추절, 또는 칠칠절로 지키게 됩니다.  첫단을 흔들어 제사한지 50일째, 그해 첫 수확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또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지킨 첫 번째 유월절 후 50일째,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 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오순절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날 구약성경에 예언되고(요엘 2:28-29),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요14:26, 행1:5) 성령 세례를 주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므로써 삼천이나 되는 회심자를 얻게 됨으로 교회가 시작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다음 안식일에 흔든 첫 곡식단을 예수님에 비유하고, 그후 50일 후에 거둬들이게 되는 삼천의 성도를 첫 수확으로 비유하며, 해가 갈 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를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칠칠절을 주시며 주신 칠칠절의 의미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23:22).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신 16:11). 이것은 우리가 거두게 되는 성과에 취해 우리만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돕고, 같이 일한 사람들과  공을 나누고 격려하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