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기쁨

누가복음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December 23, 2023. SaturDevo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참 밤이 길다’라는 생각입니다. 7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낮인가 싶으면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 어둑해 집니다. 하루중 삼분에 이가 밤입니다. 동지가 지나가며 희망이 있는 것은 조금씩이나마 낮이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신날인 크리스마스가 동지가 막 지난 25일이라는 것이 우연이 아닌듯 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이 이 세상의 소망에 성취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백년 동안 전무하던 하나님이 말씀이 예수님의 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오신것입니다. 깜깜하던 세상에 빛이 비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는 그 소식을 천사가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전해주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어둠을 밝히며 전해지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온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나심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복음이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2:1). 두 복음서가 똑 같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박사들에게 미친 기쁨과 온 백성에게 미친 기쁨이 똑같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기쁨과 같은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가지 타이틀이 나란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구주’(Savior)’, ‘그리스도’(Messiah), 그리고 ‘주’(Yahweh여호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요1:14). 마태복음 1:2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에굽의 노예로 있던 히브리인들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중에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여 내시며 그들 가운데 성막에 거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출18:9). 그들은 불가운데, 구름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지만 또한 직접 대면하지도 못하고 경외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100%사람으로(히4:15, 요일 4:2)) 오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노예생활에서 구원해 내신 것처럼, 예수님은 온 백성을 인류 최대의 적인 죽음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닙니다.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주인공이십니다. 크리스마스는 기쁨의 날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가운데 오신것이 기쁨인 것입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사49:13).

두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탄생에 이어지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으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눅7:22)되는 곳곳 마다에서 찬양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세상죄를 대신하여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때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5-48). 모든것을 밝히 보게된 제자들은 하늘로 올려지시는 예수님을 보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눅 24:52)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이 나신곳에 기쁨이 있고,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기쁨이 함께 합니다. 그 기쁨은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있는곳에, 예수님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빌 4:4, 살전5:17)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기쁨의 원천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곳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권고 말씀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시편 기자도 노래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며 세상에 기쁨을 주신 예수님은 기약이 이르면,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다시 오셔서 세상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딤전6:15).†

크리스마스와 사랑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December 16, 2023. SaturDevo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기독교의 기본사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와 뗄레 뗄수 없는 개념입니다.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성경을 압축하여 액기스로 만든다면 결국 남는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며 기독교에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 그 이상 이시지만, 사랑의 모든것이 하나님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요일4:7). 사랑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사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강절 세째주 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심은 하나님에 사랑의 구현이십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놀라운 공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구약성경은 오직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백성이라고 부르며, 그들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기록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것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시어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한 말이 독특합니다. 영어로 하면 단순히 Olny Son입니다. 외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님의 신학적 개념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독생자”, 또는 영어로도 “one and only son”(NIV), “only begotten son”(NASB)이란 말을 사용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창조되거나 태어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속성을 공유하는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기독교 하나님의 특성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어로는 종종 Steadfast love로 표현합니다. 희랍어로는 아가페(ἀγάπη)인데 아가페라는 말이 ‘헌신적, 희생적’ 사랑이란 것을 모두가 알기에 우리들에게 더 쉽게 그 개념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않는 헌신적, 희생적 사랑입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31:3).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시기로 정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중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눅15:1-7)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사랑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친히 모범까지 보이시며 우리도 사랑할것을 가르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원수에게 까지도 먼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5:46)라고 반문 하시며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끝난다면 다른 기쁜 소식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메시야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 100%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지만 또한 그는 100%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었기에(히4:15)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실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고통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고(롬3:25), 부활하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을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십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1:16)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목적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즉 (whoever personally trusts in him)은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의 요약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God-Man)과 죽음(a substitutionary death), 부활, 재림입니다. 이네가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크리스마스의 주인이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

크리스마스와 평화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December 9, 2023. SaturDevo

두번째 Advent 주입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그 자체로 평화입니다. 매해 크리스마스 마다 불려지는 노래가 <Silent Night Holy Night> 일 것입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거룩한 평화가 우리를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첫절의 후렴은 평안 가운데 잠자는 아기 예수님 ‘아기 잘도잔다’이고, 두번째 절의 후렴은 ‘구주나셨도다’로 평안과 구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He himself is our peace)”(엡2:14)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평화의 왕”이십니다(사 9:6).

역사상 가장 큰 기적,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일이 유대의 한 작은 마을의 마구간에서 조용히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세상에 주시는 구원의 평안(요한복음 14:27)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은 모든 인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기꺼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Shalom”이라는 표현은 갈등과 혼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측면에서 긍정적인 축복의 개념도 전달하기 때문에 영어의 “Peace”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고 풍부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샬롬은 온전함(completed), 건강, 안전, 안녕,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개인의 상태, 사람과 사람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평화입니다. 구약에서 샬롬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조화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함으로, 샬롬은 궁극적으로 인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나 축복으로 이해되었습니다(레 26:6; 왕상 2:33; 욥 25:2; 시 29:11; 85:8; 사 45:7). 구약에서 평화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는 종종 미래의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부르는메시아적 인물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사9:6). 오실 메시야의 통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에 걸쳐 “평화”의 통치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슥 9:9, 10). 구약은 온전한 의미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평화에 대한 희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헬라어로는 “평화”가 “에이레네(εἰρήνη)”인데 단순한 평안함을 의미하는 고전 헬라어에 샬롬의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도록 확장하여 사용한 용어입니다. 누가는 스가랴의 예언(눅1:66-79)에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눅 1:79)하실 것으로 기대하는 예언을 통하여, 구약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평화에 대한 구약의 소망이 예수님의 나심으로 성취되는 축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나심을 알려주는 천사도 천군과 함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눅 2:14).

창세기의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깨집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지만 그들의 불순종과 불의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방에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런 중에 때가 차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이땅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그의 피의 새 언약이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예수님의 평화의 선물은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있는자와 없는자, 높은자와 낮은자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화해의 프랫폼를 형성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그리하여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계 21:4)할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사도 바울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 평화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나눌수록 배가 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멀리 있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기도합니다. “평화”의 실천을 기도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평화(갈 5:22)는 “하나님의 자녀”(마 5:9)로서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열리는 결실입니다. 로마서 12:18은 우리를 권고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엡4:3)는 평화의 크리스마스가 되길 기도합니다.†

크리스마스와 희망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December 2, 2023. SaturDevo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야, 구원자를 천오백여년을 기다려옵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근거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5). 이 말씀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체화되고(민24:17-19, 시2:7-9, 사42:1-4)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굳게 자리잡아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들은 메시야가 정말 오셨을때, 그를 알아 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좋은대로 해석하여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이땅에 오셨을때, 그를 알아보고 하나님을 찬양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5-38절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소망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로 이어지는 4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희망, 평화, 사랑, 기쁨에 대한 묵상으로 이 시간을 축하합니다.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기쁨에 찬 크리스마스 캐롤를 부르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앞으로 4주동안 저도 이 네가지를 하나씩 공부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눅2:25-38) 경건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 보기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사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평생을 기도하며 예수님 보기를 소망하며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혹자는 그들을 미친사람들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는 눈만 들면 바라보고 믿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보기를 평생을 기다린 그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축복과 은총을 받은 사람들인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의 표현인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과 관계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57:18),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61:2)등 ‘위로’는 메시야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메시야의 오심입니다. 메시야는 구원자이고, 신약의 언어로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누가의 이 소망은 구원(눅2:30)과 죄의 용서(눅1:77), 그리고 잃어던 자의 되찾음(눅 19:10)을 포합니다.

소망은 기다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절망과 어려움을 이기는 씨앗입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절망과 극한 어려움은 사람을 악하게 합니다. 부정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인 위로를 기다립니다. 긍정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속에도 반드시 소망을 심어 두십니다.

 400여년동안 부재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을 통하여 오셨을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요1:19)하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1:20) 라고 대답하며,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3:6)라고 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언어(사40:5)를 다시 사용합니다.

모든 육체가 보게될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기독교의 소망, 성경의 소망은 상황이 아닙니다. 더 나은 환경이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계시의 빛을 주시며(사도행전 26:17-18),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고 있으며 구원자가 그 백성을 통해 오시게 되는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육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이땅의 “온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십니다. 절망을 마주한 사람에게도 믿고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 되시고, 어두움에 있는 사람에게도 내일을 약속하는 빛이 되시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번영을 기대할 수 있는 비젼이 되십니다 (눅6:20-23).

예수님의 오심은 천오백여년의 기다림, 소망의 결실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은 말합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어(고후 5:17) 하늘의 영원한 유업을 잇게하실 산 소망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소망은 하나님이 가져올 미래의 영화를 확신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소망은 망상입니다. 캐롤 노래소리에 들떠 몸을 흔들어 보지만, 곧 공허만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산소망(Living Hope)은 앞으로 나가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으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복음입니다-를 항상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나그네의 모범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November 25, 2023. SaturDevo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익숙지 않는 상황과 환경을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상식이고 당연하였던 사건들이 여행지에서는 무시되기도 하고, 얼토당토않은 방식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과 차들이 뒤섞여 요령껏 피해가고 요령껏 차도를 횡단합니다. 물건값도 부르는 것이 값이고, 어느 정도를 깍아야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친절도 의도없는 친절이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어떤 곳에서는 상식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안 그랬는데’하는 넉두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여행지 마다에는 그 여행지에 맞는 상식이 있고, 그 상식을 습득해야 더 이상 그곳에서 이방인이 안됩니다. 새로운 생활 방식에 바로 적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말을 합니다.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든 사람이거나에 상관없이 새로운 환경과 장소에 가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고 관습을 인정하고 따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문화충격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일 큰 문화충격을 경험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여행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던 분이 셨습니다(요 1:1, 17:5).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이 되어 인간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하나님으로 대우 받기를 주장하지 않고, 사람으로 살아 가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람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보다 더 간단 명료하고 분명하게 총체적으로 기술해 놓은 부분도 흔치 않습니다(빌 2:5-11).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찬송이라고 언급되는 시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전에 존재하신 예수님이 있습니다(빌2:6a).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계십니다(빌2:7).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사역과(빌 2:8a) 십자가에 죽음을 언급하고 있고(빌2:8b), 죽으신 후의 일,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님이 언급되어 있습니다(빌2:9). 복음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갖으신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신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큰 겸손과 사랑을 배우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신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영적 성장의 패러다임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자기 확장의 투쟁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행위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향,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며 사는 타지를 여행하는 여행객과 같은  삶의 모범이십니다. 우리가 멕시코 뒷 골목을 여행할 지라도 미국시민권자가 아닌것은 아니지만, 그런 곳에서 그런것을 주장하며 겸손하지 못하고, 그들의 상식을 무시하면, 변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에게 호감을 보이며,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관심을 보이면, 그들은 미소와 친절로 화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보여야 할 태도를 예수님은 모델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도록 표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은 그 “동등”함을 이 땅에 오셨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시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동등함의 가치를 어떤 대가를 치르시더라도 그와 동등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도록 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있는 동안 그의 이득이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고, 보존하고,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여행할때 우리가 그곳 사람인척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한 눈에 알아 봅니다. 타지 사람으로써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과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공유하는 편이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표본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땅을 살아가는 모든 믿는자의 모법입니다. 모든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모범입니다. 타지를 여행하는 여행객들 처럼, 하늘 나라로 기쁨과 감사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이 세상의 여행객이 가져야할 모범입니다.†

실제죄

디모데전서5: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November 11, 2023. SaturDevo

고대 중국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었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나지만, 세상의 악에 물들어 사람이 악하게 된다라고 하였고,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하여 선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촛점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냐 선하냐의 문제라기 보다 모든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하여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들의 주장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 본다면, 기독교는 분명히 성악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때 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라고 하며 태어나기도 전에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는 원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초기 기독교의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일종의 성선설주의자들입니다. 인간은 죄없이 태어나지만, 악한 환경과 잘못된 교육으로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죄와 대조되는 죄, 맹자와 순자가 교육으로 선하게 만들기를 원했던 인간의 악이 행한 행위가 실제죄라고 할수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가 죄의 근성인 반면, 실제죄는 각개인의 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원죄는 하나이나 실제죄는 천태만상입니다.

실제죄는 내적인 죄일수도 있고, 외적인 죄일수도 있습니다. 내적인 죄는, 교만 시기 질투 미움 욕정과 욕망 등이 있고, 외적인 죄는 속임수,도적질, 살인 간통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악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하며 말이 많지만, 실제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 뿐만 아니라 인류의 경험은 인간의 죄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보편성에 대하여는 성경은 물론이고, 펠라기우스파도 맹자와 순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펠라기우스, 맹자 순자가 죄의 보편성을 환경과 잘못된 교육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한편 성경은 이 죄의 보편성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와 죄의 전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직설적으로 죄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20절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있고, 로마서 3:12도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원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실제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사람의 출생에서 부터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납니다. 갓 태어나 아기가 주위 환경으로 부터 악을 배웠다고 할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기에 죄성을 나타내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욥기 14:4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실제 죄인인 어미와 아비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의인이 날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성경는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6:23).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십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그가 죄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이건, 노인이건 동일합니다. 로마서 5:12-14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합니다. 이것은 아담의 죄를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지배하고 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나는 우리는 각자의 실제죄에 책임이 있음을 말합니다. 한국인이라도 미국땅에서 태어나면, 미국의 시민권자가 되고 의무와 책임을 지게되는것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두게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 필요합니다. 이 법칙에서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가 사람이라면 예외는 없습니다. 요한복음3:3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십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 말씀은 쉽게 말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며 세례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요일 5:12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죄의 본질 

요한복음 16:8-9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November 4, 2023. SaturDevo

죄(Sin)가 무엇인지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야만 알수 있는 개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와 범죄를 종종 혼용하기도 하는데 영어로는 죄(sin)과 범죄(crime),가 분명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죄인과 범죄인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죄를 무엇이라고 정의할까요? 그러나 성경도 죄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해서 정의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죄의 특징을 살펴 봐야 합니다.

첫째 죄는 인간만이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천사의 죄도 말하지만,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땅에 어떤 다른 생물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죄지은 개, 죄지은 소, 죄지은 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롬 3:10). 그렇기에 죄는 인간의 특성 중에 하나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째로 특별한 종류의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와 범죄처럼, 죄와 악도 혼용하여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죄(sin)와 악(evil)도 구별되야 합니다. 모든 죄는 악이다라는 말은 성립하지만, 모든 악이 죄다라는 말은 틀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나쁜것을 말합니다. 질병, 가난은 악입니다.  그렇지만 병에 걸린 사람이 죄인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죄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떤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보다 악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죄를 단순한 질병이나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람이 책임질수 없는  종류의 악이라고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특별한 종류의 악, 즉 도덕적 악으로 그 죄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고, 인간을 정죄아래 놓이게 한다고 합니다.

세째, 죄는 절대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도덕적 영역에서 선과 악의 대조는 절대적입니다. 둘사이에 중립상태는 없습니다. 야고보서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합니다. 오십퍼센트의 선은 없습니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마 10:32-33, 눅11:23).

네째, 죄는 항상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죄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언급하며 사회적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촛점이 빗나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생긴 잘못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관점에서 만 보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과 합치되지 않는것일 뿐만 아니라(롬1:32, 2:12), 하나님과 합치되지 않는것도 죄입니다. 성경은 사람과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법과의 관계에서 죄를 말합니다. 로마서5:13 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며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도 죄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죄는 죄악과 죄의식을 포함합니다. 죄악은 율법을 어겨서 벌를 받아야 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악만이 죄가 아니라, 성경은 죄의식, 즉 오염된 마음도 죄로 정하고 있습니다. 욥기 14: 4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하고 예례미아 17:9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하며 오염된 마음의 악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마7:18)다고 하시면서, 오염된 마음이 가져오는 결과를 악, 죄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죄는 사람의 마음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마음에 박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45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라고 하며, 선과 악 모두가 그 근원이 마음임을 말합니다. 잠언은 “마음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하면(잠4:23), 마태복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라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경계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3:12).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는 단지 외적인 행위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마음의 상태도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일치 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것도 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하십니다. 탐심을 율법은 죄라고 합니다(롬7: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른다(갈5:7)고 합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속에 있는 마음입니다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죄로 정하십니다.

이런 죄의 특성을 종합해 본다면 죄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요한복음 16:8-9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정죄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는 교만입니다. 이 죄의 본질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지길 바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죄와 정확히 같은 선상에 놓입니다.†

인간의 원죄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October 28, 2023. SaturDevo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한가지 용어입니다. 두 당사자(two parties) 사이에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언약을 맺으십니다. 언약을 맺었다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성경의 내용은 언약을 맺었다는 말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언약의 모든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합의의 두 당사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그리고 합의 조항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조항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과한 순종의 의무입니다.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이 지켜야 할 조항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영생입니다(롬 10:5, 갈 3:12, 창 3:22). 이 약속은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듯이 죽으리라’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는 언약의 조건과 벌칙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은 소멸이 아닙니다. 생명의 원천으로 부터의 분리입니다. 영과 육의 분리이고 더 분명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의 성사(Sacrament)입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약속으로 되돌아갈수 있는 길입니다. 창세기 3:22,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다시 영생할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굳게 지키게 하시어 따 먹을수 없지만…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는 인간은 다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죄의 삵은 사망이다(롬6:23)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지은 일이 없는데, 왜 죽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죄라는 것을 말합니다. 죄성(Sinful nature)은 아담의 후손으로써 인간의 본성입니다. 성경적 설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전생을 얘기하기도 하고, 철학자들은 인간에 내재된 악이라든가, 또 진화론자들은 잔인함으로 부터 유전되는 경향, 충동등을 말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없습니다. 성경은 아담(인간)의 타락을 지적합니다.

이 세상의 첫번째 죄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그 열매를 먹은 것이 죄가 된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고 불립니다. 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인간의 미래의 본성이 선 할 것인지, 악 할 것인지를 결정짓게 합니다. 그리고,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결정할 것인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첫 번째 죄의 전형적인 특징은 죄의 본질적인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과정을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삶의 과정을 자신이 해결해 나가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요소도 이 첫번째 죄 안에서 구분되는데, 지정의의 문제 입니다.  첫번째 죄는 지(앎)의 문제에 있어 불신과 교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뜻/의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 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정(감정)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것으로 부터 얻는 부정한 만족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타락은 사람의 마음에 의혹과 불신에 씨를 심은 사탄의 유혹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의 대표격인 아담을 타락시키려는 의도였다는것은 의심할바 없지만, 사탄은 이브에게 먼저 접근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브가 언약의 대표가 아니었기에 아담과 같이 책임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으로 부터 명령을 직접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기에 의혹과 논쟁에 걸려들기 쉬웠을 것이고, 세째는 아담의 마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최측근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는 뱀이 사탄의 도구었다는것과 사탄이 뱀을 통하여 그리고 뱀안에서 활동한 실질적인 유혹자였다는것은 분명합니다. 아담의 상황은 마치 예수님이 이땅에서 사역하던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그리고 그 사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3)

인류 최초의 죄,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첫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됩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인간은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오염된 감각은 수치와 죄의식을 나타냅니다. 이 타락된 감각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잘못된 상황을 핑계대며 다른 사람를 비난하는 양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죽음의 법에 매이게 됩니다(창3:19, 롬 5:12, 6:23). 그리고 세째는, 낙원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약속된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금지당합니다. 원죄의 결과입니다.

내가 아담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담의 죄에 내가 묶여 있는가? 미국에 태어나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미국에 세금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싫은 사람은 미국 밖으로 나가면 됩니다. 아담의 죄에 묶이는 것이 싫은 사람은 인간이 아니면 될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신있게 선포할 수 있는 기독교의 한가지 진리을 말씀드립니다. 어떻한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그 절망을 벗어날수 있는 길을 반드시 마련해 두고 계십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죽음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연약한 인간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October 21, 2023. SaturDevo

질투와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Dr. Gary Collins는 말합니다. ‘시기(envy)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반면에 질투(Jealousy)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질투는 우리의 직업, 소유물, 평판에 적용될 수 있지만, 이 단어는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경쟁자에게 상실될까 봐 두려워할 때 발생하는 불안을 더 자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비교할 때 더 매력적이고 유능하고 성공해 보이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가 꾀어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시편 73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실족 할 뻔한 아삽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은 비교에 참 약합니다. 비교하면 누구나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와 비교하려다가 자빠졌습니다 (행4:37-5). 베드로도 두번씩이나 잘난 체하며 비교하다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습니다(마 19:24, 요21:21). 아삽도 비교하다가 자빠질뻔 합니다(시73:3).

비교하는 사람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믿는 사람이 실족하게 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볼때 입니다 (시73:3b). 즉 세상의 있는 다른 사람의 것을 부러워할때 입니다. 그들의 형통함을, 그들의 재물을, 그들의 분방함을 시기합니다. 자신이 신실하게, 절제하며 사는 삶이 헛일 처럼 느껴집니다(시73:4-11). 12절은 악인의 형통함의 요약입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그러나 성경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성가대장이었던 아삽도 세상을 바라보았을때, 자기도 모르게 십계명중에 열번째 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왜 믿는사람보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잘사는지 번민하게 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건강하게 자기의 명을 다하는데, 오직 하나님만 믿어온 사람은 젊은 나이에 불치병이 걸려 고생하는지, 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사기치고 속이고 갑질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잘사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그럴듯한 대답을 할지라도 변명같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바로 살겠다고 양심있게 살겠다고 아둥거린 자신의 삶이 헛일 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때, 즉 하나님을 예배하며, 믿는자의 길과 믿지 않는자의 길이 분명히 다름을 보게 됩니다. 믿는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자는 잠간 있다가 사라질 안개같은 인생이고, 악인이고, 하나님으로 부터 나지 않은 세상사람입니다. 두 종류의 인간이 사람의 유한한 눈으로 볼때는 같은 인간인것 같지만, 그 둘의 길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아삽은 하나님 앞에 세워진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미련한 존재입니다. 이런 비교로는 결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후 10:18). 아삽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됩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1-22).

인간이 인간이 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지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어 우리를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며, 영광으로 영접하십니다. 만물에 영장이 되게 하시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십니다 (창1:26).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삽은 그 신실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우매 무지 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22-23). 아삽이 시기하고 부러워 하던 인간은 무지한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자들의 생각엔 인간일지 몰라도, 하나님앞에서는 인간이 아닙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73:20).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함께 하신 않으면, 사람은 그 순간 사람일 수 없는 연약하고 짐승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짐승이나 헛개비(Phantoms)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경계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아삽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웠을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합니다. 내 육체와 내 마음은 연약하나 하나님이 내 마음의 힘이시고, 나의 삶에 몫 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시73:26). 욕체와 마음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살아가며 할 일, 즉 삶의 몫은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시 73:28). 주의 모든 행적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존재

창세기 5:1-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October 14, 2023. SaturDevo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500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수도 없이 반복된 질문이며, 수도 없이 여러가지 말로 언급되고 정의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두번쯤은 그  대답을 생각해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을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하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려줍니다.

먼저 성경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 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온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말합니다.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똑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말이라기 보다, ‘하나님 같이’ 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의 의미라고 볼수 있습니다. 창세기 5:3은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셋이 아담과 똑 같은 존재란 말이  아닌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셋을 바라볼 때, 아담이 떠오를 수 있게 하는 닮음, 또는 그 아들을 보면 그 아비를 짐작할 수 있도록 아비의 어떤 면을 나타내는 아들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는 특성을 사람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이 말씀은 사람은 육체와 하나님의 생기, 즉 영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말합니다. 혹자는 영과 혼과 육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과 혼을 서로 바꿔 사용할수 있는 용어로 혼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강조’하기 위한 중복으로 사용합니다(살전5:23, 마 22:37, 막12:30). 예를 들어,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의 영과 혼은 분리할 수 있는 다른 기능을 가진 인간의 구성요소를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과 육의 결합체입니다. 사람이 영육의 결합체라는 사실은, 사람에게 두가지 숙명을 지우게 됩니다. 예배와 죽음입니다.

사람이 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사람이 예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영은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통칭 할수 있습니다. 스펜서라는 철학자는 ‘사람은 자연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로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성적, 합리적으로 생각할수 있는 존재이지만, 초능력의 존재를 찾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은 어떻게 인간의 본능이 신을 구해나가게 되는지를 이해할수 있게 합니다. 인간이 찾아가는 신은 물론 잘못된 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신인 하나님은 우리가 찾은 분이라기 보다, 우리에게 나타나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입니다. <파리대왕>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신을 구하고 예배하기를 원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골딩이나 스펜서는 두려움 때문에 신을 구하는 사람의 속성을 언급하지만, 사람의 영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을 갈망하는 모습을 성경속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35:9, 42:2, 63:1 사26:9 눅1:46 등)

사람이 육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사람이 죽을 수 뿐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로 정의합니다 (행 5:5, 마27:50).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죽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속에 죄가 들어왔습니다(창 3).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죽는 존재로 타락합니다.

드론을 구입하여 날린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종키로 잘 작동 시킬수 있었습니다. 위로 아래로 좌우로, 또는 원을 그리며 잘 날랐습니다. 그러다 어느순간 그 드론은 키의 컨트롤을 벗어나 날라가 나무둥치에 부딪히며 떨어져서는 더 이상 날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뉴얼대로 고장난 부분을 고쳤을때야 그 드론은 다시 날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것은 불순종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사람을 원래의 창조의 의도대로 영원히 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존재로 돌리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부분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고장난 인간을 원래의 인간으로 회복시키시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입니다. 영육의 결합체로 만드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로 죽을 수 뿐이 없는 존재로 타락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아들 하나님, 예수님을 보내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처음 창조 의지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사람으로 회복 시키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이야기인 성경이며, 이 이야기에서 정점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