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산 사람들의 구원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April 22, 2023. SaturDevo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9-12).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까? 구약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원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처럼 그들도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은 사람은 구약의 사람이거나 신약의 사람이거나 영생을 얻지만,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약의 사람이거나 신약의 사람이거나 막론하고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가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빌2:6). 예수님은 태초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요1:1, 1:14). 예수님은 전에도 살아 계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고, 미래에도 살아 계실 것입니다(히13:8).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때 벌써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탄의 세력에 의해 구원자(여자의 후손)는 약간의 상함을 받을 지라도 그를 완전히 제압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롬3:27)고 합니다 . 구약시대이건 신약시대이건 간에 그때도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신 같은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하지 않으십니다. 한 법, “믿음의 법”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담 세대의 사람들도 원시복음이라 부르는 이 약속을 믿을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창12:1-3, 15:4)을 믿었고 이삭을 대신할 대속 희생을 제공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위한 희생을 제공하실 약속을(창22:8) 믿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라고 고백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계속하여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사53:5).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모든 구약의 사람들도 메시야(구원자)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됩니다.

예순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구약의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오시어 그들을 구원하실것을 믿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신것을 믿습니다. 그리고구약의 사람이든, 신약의 사람이든 모든 믿는자는 똑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복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은 구약의 백성은 오실 메시야를 믿었고, 구원 받은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메시야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신구약을 무론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약속을 믿는 모든 믿는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생을 얻게 되고, 믿지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영벌에 들어갈 것입니다(요5:29).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사도 바울의 말처럼, 지금은 의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죽음, 인생에 끝인가?

누가복음 24:5-7.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April 8, 2023. SaturDevo

살다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실패를 할때도 있습니다. 사방으로 소망이 꽉 막힌것 같은 상황에 놓일때도 있습니다. 이럴때 사람들은 ‘인생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정말로 그런줄 믿고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끊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근근히 이어가며 참담한 생활로 기쁘고 감사해야 할 삶을 마무리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꽉 막힌 절망속에서도 소망을 찾고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아와 나머지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극도로 싫어하며 두려워합니다. 싫어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일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실한 죽음후의 일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사람의 75%가 죽음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네명 중에 세사람은 ‘저세상’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일까 주측만 할 뿐 입니다.

성경은 애매하지 않게 분명하게 글자로 써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마28:7)라고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 자신도 “인자(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눅 24:7)라고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세번이나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의 예수님과 틀리지 않았습니다. 더 잘 생긴 예수님으로 부활하지도,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의 사람으로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으로, 그리고 사람이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천여년전에 씌여진 그 글자 그대로의 성경이 지금도 지금도 똑 같은 글자로 증거하고 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에베소서2:4-6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죽음에서 일으키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우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까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된것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롬6:4)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메세지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이시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이시며, 하나님의 매스터프랜의 완성이십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모든것이 끝난것 같은 절망과 다시 일어날수 없을것 같은 실패가 끝이 아니고 또 살아가야 하듯, 죽음이 인생의 끝인것 같지만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절망과 실패를 당했을 때라도절망이나 실패뒤에 오는 날들을 비참하지 않게 살아내기 위하여 힘을 내서 희망을 갖고 더 노력하고 긍정적인 태도로 어려움을 이겨낼때,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가 됩니다. 죽음을 ‘다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 후에도 비참한 삶을 살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소망의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고 믿지 않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경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 있는 사람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리라’(마25:46).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

마태복음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April 3, 2023 Holy Week Devotion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삼대절기(Pesaḥ (Passover), Shavuot (Feast of Weeks, or Pentecost), and Sukkoth (Tabernacles)) 중에 하나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기 12:14절을 따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켜져 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날(유월절)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날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유월절을 기념하는데, 이 기념을 요즘은 세더(Seder)라고 합니다. 세더는 기본적으로 저녁 식사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예식으로  하가다(Haggadah)라는 책에 규정된 순서에 따라 참가자들이 먹고, 기도하고, 와인을 마시고,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의식입니다. 세더 또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의식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대로, 유월절에 먹던 음식을 준비해서 먹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나온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관습(Order)입니다. 이 기념행사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으며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유월절에 격었던 일과 그 의미를 이야기해 주는것이 중요한 하나의 순서입니다. 요즘은 보통 Seder를 이틀을 하는데, 올해는 수요일 저녁과 목요일 저녁(4월 5일과 6일)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대체적으로 유월절을 제대로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치리할때 까지는 제대로 지켜졌지만 사사기를 지나오며 흐지 부지해지고,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 제대로 지켜지지만 그 후로는 유월절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없어지다가, 히스기야왕때 두번째 달에 유월절이 지켜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민9:11 ,역하 30:1-5). 그후 무낫세왕의 오랜 통치를 통하여 또 없어지고, 히스기야 왕의 유월절이 지켜지고 약 100년후, 요시아왕때에 다시 지켜지게 됩니다(왕하 23:21-23).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역하 35:18-19). 그러나 그것도 그때 뿐이었고,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까지 멸망당하며 성전 제사도 유월절도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와 귀환한 포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봉헌하며 유월절을 기념합니다 (에스라 6:19-22). 그후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월절이 지켜지며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는것이 중요한 명절 기념행사로 자리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후 열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또는 시나고구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유월절을 지키며 그 기념행사가 세더(Seder)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유월절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명령이며 약속입니다.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3-11).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12:12-13).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유월절 음식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집트를 심판하실것과 그 노예생활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실것을 약속하십니다. 유월절 양의 고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의 땅에서 뛰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 피는 그들이 심판에서 구원받게 되는 표적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묶였던 삶에서 유월절 양의 몸과 피로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월절이 정확히 어떻게 지켜졌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먹은 유월절 음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인도로 먹었던 그 최초의 유월절 음식과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일치함을 볼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6-28은 유월절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또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켜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 표현합니다. 모세의 유월절이 지켜진지 1500여년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별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불려진 예수님의 유월절을 먹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된 빵을 나누어 먹고, 예수님의 피로 비유된 포도주를  마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 언약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1-33).

그 저녁 예수님은 유대의 관원에게 잡히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 몸은 로마병정의 채찍과 창에 찢기고 피를 쏟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 찢긴 몸과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그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모세의 유월절 양의 고기와 그 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은것 처럼, 그래서 자유인이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된 것처럼, 예수님의 그 몸과 그 피로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과 죽음과 부활은 우연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입과 글을 통하여 성경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던(롬1:2)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이 계획은 이제 거의 다 이루어 졌고, 다시 오시마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 모든 믿는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화목하게 하는 사역

고린도후서 5: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April 1, 2023. SaturDevo

마태복음 5:21-26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에서 여섯번째 십계명을 재해석해 주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예수님은 살인하는 행위와 형제에게 화내고 욕하는 행위를 똑 같이 심판 받게될 행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가서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간의 불화를 살인과 같은 비중으로 보시며 화목 하라 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사역(엡2:16, 골1:22)을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신도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할 수 뿐이 없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그러면서 왜 그렇게 믿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because”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에… 우리말 성경의  “우리가 생각하건데”는 원어는κρίναντας (크리난타스)이고, 뜻은conclude (ESV, NET), convince(NIV), judge(ASV)입니다. 즉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4-15).

여기서 특히 뒤의 문장은 그 행간을 읽어야 할 문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든 믿는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그 죽으심으로 살아있는 모든 믿는자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바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것’은 세상적인 그리고 인간 본능에 따라 사는것을 의미합니다. 욕심에 따라 사는 이기적인 삶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것’은 욕심에 좌우되지 않고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며 선하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크리스찬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신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따라하지 않을 수 없게 거룩한 부담이 된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왜 그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겠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라 알다’라는 말은 자신이 그리스도들을 박해할때 알았던 예수님이 ‘육신을 따라 알았’던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바울의 “화목하게 하는 사역’의 기본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믿는자들에게 내어 주시는 사랑(요3:16)을 통하여 모든 믿는자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또 화목하는 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고후5:18-19).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란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담대하게 권면합니다. 그의 사역과 메세지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청합니다(고후 5:20).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고린도후서 5장 마지막절은 대속와 칭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형제간의 화해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해는 동시적이고 삼위일체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가 그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있는 천국입니다.†

복음 전파

사도행전13: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March 25, 2023. SaturDevo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우리 믿는 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만민에게 복음을전파하라”(막16:15)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Share)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많을뿐 아니라 또 복음을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계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전파하는 방법을 보고 배우고, 실행해 보며 자신의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https://dudedisciple.com/methods-of-evangelism/

사도행전 13-14장은 바나바와 사도바울의 첫번째 선교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을때, 안디옥의 시나고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기록된 부분입니다(행 13:16-41).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그의 첫번째 선교여행중에 그 이유가 설명없이 바울로 변합니다 (행 13:9). 이방인들에게 더 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히브리 이름인 사울을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 고쳐 불렀을 것입니다. 상황화(Contextualization)입니다(고전 9:19-22). 복음에 헌신한 바울다운 행동입니다.

바울의 복음설교는 세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구약 역사의 인용(16-25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급(26-37절), 그리고 복음으로의 초대(38-41절)입니다.

구약 역사의 인용부분은 제일 먼저 스데반이 생각나게 합니다. 사울이 증인되어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도 구약의 역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변증을 시작했습니다. 스데반도 사울도 구약의 역사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이스라엘의 리더들을 언급합니다. 단지 틀린점은 스데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리더들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지적한 반면, 바울은 그런 리더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보내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3절).

바울은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구주로 세우신 예수님을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다(26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구원의 말씀은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지(Who Jesus is)와 예수님이 하신일(What Jesus has done)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후손인(23절) 인간이시고 세례요한이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25절)만큼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신 일이(28-30절) 예수님이 하신일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그를 믿는 모든자는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38-39절).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을 인용하며 복음이 그냥 무에서 툭 튀어나온것이 아니라 성경에 약속대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지자들(합1:5, 사29:14)이 예언한 이 복음이 얼마나 기이하고 놀라운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어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을 믿지 못하고 멸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40-41절).

바울의 첫번째 복음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더 듣기를 원하며 관심을 보인 사람들입니다(42-43절). 이들은 대부분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한 말을 반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입니다(45절).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바울로 하여금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인들로 향하게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복음을 전하고 나누기 위하여는 복음을 정확히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파방법을 개발하여 습득하고 기도하며 상황에 맞게 메세지를 전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은 모두 믿게된다”고 하십니다. 믿게하고 안하고는 하나님이 하실 줄 믿습니다.†

공리주의 vs 부활 사상

요한 복음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March 18, 2023. SaturDevo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에 하나는 제레미 벤담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 스튜어트 밀이 표현한 말에 의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공리주의입니다. 결과를 중요시 하는 이 공리주의 사상은 효용 극대화의 경제원리와 연결되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경제적 이윤 추구를 지향합니다. 공리주의 사상은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 생각이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근대의 내노라 하는 철학자들이 평생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생각해 낸 생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천년전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야바라는 사람인데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공회(Sanhedrin)의 수장이었습니다. 하스모니안 왕조 말기부터 부패하기 시작한 대제사장직은 그때 부터 돈을 주고 사는 직책이 되어갑니다.  헤롯왕조에서는 헤롯이 마음대로 지명하였고, 아켈라오가 퇴각하며(AD 6) 로마가 지명하게 됩니다. 그때 대제사장이 된 사람이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입니다(요18:13). 안나스는 로마가 직접 유대를 통치할때 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어 로마를 통치할때까지 9년을 대제사장을 합니다. 로마에 황제가 바뀌자 유대에서도 그 틈을 타서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활발한 뇌물 로비를 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할때는 유대총독은 매3년마다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총독을 장기간 두게 됩니다. 당시 총독자리는 통상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자리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지명한 루푸스 티네우스(Rufus Tineus) 총독이 임기를 마치는 15년부터 티베리우스의 지명으로 총독을 하게되는 발레리우스 그래투스는  마음대로 총독을 갈아 치워 헤롯시대를 연상케 하는 감정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자극합니다. 안나스가 대제사장에서 쫓겨나던 AD15년 부터 매해 대제사장이 바뀝니다. 뇌물을 더 많이 내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유능한 권모술수와 정치수완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등장합니다. 가야바는 AD15년 부터 AD 36년 까지 18년동안 1세기에 가장 오랫동안 대제사장직을 유지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투스에 이어 본디오 빌라도가 쫓겨나던 해까지 대제사장을 합니다. 그러나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네명의 아들들을 대제사장으로 만든 안나스는 그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에 못지 않은 실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가는 일이 있고(요18:13),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안나스는 주역을 담당합니다(행4:6,눅3:2). 사두계열의 대제사장은 공회를 통하여 유대인의 삶을 관장하고 있었고, 로마총독은 치안과 사람을 죽일수 있는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바리새인들은 종교생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의 정치상황은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일곱표적을 행하시는데 11장은 그 마지막 일곱번째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최 정점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들을 위협하는 무시할 수 없는 도전 요소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를 지켜야 하는 일이 최급선무 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패한 정치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지위를 얻었으며 유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려내는 일곱번째 표적후 그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궁리합니다(요11:46-57).

명목상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를(예수님)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11:48)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얻어 군사행동을 한다면, 로마에게 성전과 나라를 뺏아길 것이라고 믿은것 같습니다. 반쪽짜리 자치권마져 빼앗기고 자신들의 지위마져 잃을것을 걱정합니다. 이들의 생각은 모세와 함께 가나안땅 앞 바란광야에 다다른 이스라엘사람들의 두려움처럼(민14:3-4),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이기적인 노예근성의 사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민 13:33)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해결 방법은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한 자기들 조상같이, 그들중 최고 지도자라 하는 대제사장 가야바는 모인 사람들을 무시하며 사악한 묘안을 냅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11:49-50). 결과만 보는 그럴듯한 공리주의입니다. 가야바는 조상의 유전도 하나님도 철저히 배반하는 무례한 대제사장이었고 유대인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가야바는 민족과 백성을 걱정하는 듯한 말로 백성들을 속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은 대제사장으로써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예언하는 말이 되었고, 그의 걱정은 30여년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전세계로 흩어지는 실제 사건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1-52).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단지 민족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심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가야바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 자신들을 지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50:20)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세우시고 모든 잠자는 자의 첫 열매와 그리스도에 속한 자의 새 아담이 되게 하십니다(고전 15:20-23).

공리주의가 사람의 생각이라면 부활사상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죽음을 부활로 바꾸십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고 하십니다(사55:9).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 하나님의 부활사상이며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객관적 진리

디모데후서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March 11, 2023. SaturDevo

Sola Scriptura라는 말은 ‘오직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이말은 복음주의의 기본 원칙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여겨질 만큼 잘못 격상되었다는것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교회와 전통보다 더 우위에 놓여져야 합니다.

모세도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설명하고 써서 주며,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고 배우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31:9-13)라고 권고합니다. 말씀은 이스라엘인의 국민적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은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머리속에서 나온 주관적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이었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Torah)을 기록한 객관적인 진실이었습니다. 모세는 너희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 객관적 진실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너희만 알지 말고 너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 대대로 그 진리가 너희와 너희 자손 대대로의 삶에 중심이 되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한 공동체로써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출 19:6)이 되게하는 구별되는 특징 중에 중요한 한 요소가 됩니다. 그 말씀 중심의 삶을 대대로 이어가며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신 31:12) 하기 위하여는 자녀들의 참여가 불가피합니다. 공동체적인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개인적으로 말씀을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히10:24-25).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중요 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도 같이 말씀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이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객관적인 Text인 성경을 믿는 믿음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신 31:9) 준 그 말씀이 이스라엘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이란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Text가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과 같은 text 입니다. 그 Torah가 모세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면 우리가 갖은 그 말씀도 역시 객관적인 진리를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주의는 그 말씀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객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씀의 해석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들려주며 그 말씀을 받았던 세대가 다 죽고난 후의 세대에게 다시 들려주며(Deuteronomy) 그것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적용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그 말씀을 받을때의 상황과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줄때의 상황은 거의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다가 나와 광야 생활속에  받은  그 말씀을 가지고, 이제 새 땅의 주인으로써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 새로운 상황에 맞게 해석해 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른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천년전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또 새로게 해석도 해 주십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말씀을 Text로 남기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3-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둔 베드로 사도도,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0) 하며 사사로운 말씀 해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나 폐쇠적인 공동체의 성경해석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성경 지식은 사유화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복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엡2:8).  이제 그 말씀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손에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생활 환경이 바뀌면서 우리 삶의 상황에 따라 성경의 바른 적용을 위하여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확신에 거하는 믿음, 바른 믿음은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바른 말씀의 이해가 필요하고 바른 말씀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끊임없는 말씀 공부가 필요하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공동체적인 말씀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럴때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사사로운 말씀 해석을 피할 수 있고,  서로를 권면하며 유익하도록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말씀 중심의 삶이 우리 자녀들에게 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의 의미

사도행전 7: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March 4, 2023. SaturDevo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의 초대 교회는 한껏 사기 충천해 있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고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며 공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공회에 잡힐지라도 감옥문이 열려지는 기적 속에서 거침없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때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 작은 문제가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지혜 가운데 제자들은 일곱 집사를 선출해 안수하여 공평한 분배의 임무를 부여합니다. 이후 문제는 무난히 해결되고 교회는 나날히 부흥되고 제사장들 까지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때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집니다. 맡은 일 뿐만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며 열심이던 스데반 집사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를 당해 낼 수 없었던 이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을 모함하게 하고, 스데반집사는 공회에 잡혀가서 자신을 변증해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변증인데 사도행전에서 제일 긴 담론이기도 합니다. 매우 긴 변증이기 때문에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논점을 잃기 쉽습니다. 사실 7장은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Witness)하고 유대인들을 기소하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를 선택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 교훈을 이스라엘이 현재 메시아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증거로 대며 고발자들을 돌이켜 고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거부했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이됩니다. 사도행전 7:51-53은 그 기소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 기소에 대하여 바른 판결을 내려야 할 공회는 바른 판결을 내린다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됨을 알기에 대신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판결을 내립니다. F. F. 브루스는 이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판사들이 그들의 이전 결정이 비극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스데반에게도 신성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결국 최초의 순교자(Martyr <witnessing to the point of death>)가 됩니다.

스데반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주요 논제의 예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전파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믿는자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고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수퍼스타들의 이야기나, 기획 프로그램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길을 인도하시며 영적 이해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시고 새로운 지리적 영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첫째, 사람의 목적과 성령의 의도가 어떻게 틀린지를 볼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은 그에게 분배의 일을 맡기기 위한 목적으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어떻게 분배의 일을 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기 보다 세계 복음화의 최 전선에 서게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빌립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행8:4-40). 이때 까지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 속에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화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야(행1:8) 한다는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스데반은 세계복음화의 씨앗입니다(행8:1). 아이러니하게도 스데반의 죽음의 증인이 되었던 사울(바울)은 그 씨앗을 심고(고전 3:6) 세계 복음화의 터를 닦는(고전 3:10) 사람이 됩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 역사의 바른 해석을 통하여 구약의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는 지평을 열게 됩니다. 스데반은 유대 율법과 예배의 타당성을 지지하면서도 땅도, 율법도, 성전도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고 암시함으로써 그것을 소외시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리더들을 거부하는 것은 스데반의 연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행7:9, 27, 39, 48), 예수를 거부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릅니다(행7:52). 유대인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마음도 없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중심이 됩니다.

세번째는 스데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유대인 됨이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수준의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스데반의 변증은 모세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표현함으로 이스라엘의 성전 예배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씨앗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행7:38). 그리스도 안에서 혁신적인 예배의 재해석, 열방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등이 암시됩니다. 열두 사도는 지금까지 유대인의 예배에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가서 기도하며 그곳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아 성전 제도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민족 집단으로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수준의 스데반의 변증은 사도들의 이해의 정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몇 가지 극적인 변화를 예고합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유대교 신앙에 대한 재평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는 완성됩니다. 누가는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증인이 되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8장 이후에서 누가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복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예언적 기도

호세아 9:14. “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February 25, 2023. SaturDevo

성경을 읽다 보면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 들이기 힘든 구절을 만날때가 종종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라”고… 하나님께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을 기도라고 하지만,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입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행을 내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저주를 호소하는 시편을 Imprecatory Psalms(저주 시)이라고 합니다. 즉, 재앙과 멸망과 하나님의 진노와 적들에 의한 심판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호세아도 한 줄짜리 이지만 분명히 저주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기도를 보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기도를 해도 되는가?

성경은 많은 형태의 기도의 표본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경배(출34:6-7), 감사(빌4:4-7), 숙고(시139), 절망과 비탄(시 88), 포기와 헌신(눅22:42), 간청(마 7:11), 도고(딤전 2:1)등 다양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기도도 또다른 독특한 한 종류입니다. 호세아 9장은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은 희망과 기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호9:10). 그러나 그런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재앙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인 이방신 바알에게 돌아 섰습니다. 이 모습을 호세아는 여러가지 비유(난잡한 아내, 무심한 어미, 사생아, 감사할 줄 모르는 아들, 암소, 무성한 포도나무, 야생포도등)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올 줄 모르는 에브라임에게 하나님은 분노합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족속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이름으로 호세아는 3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진노를 선포하는 중에 호세아는 자신의 기도를 끼워 넣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실때, 선지자는 보통 그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창 18:22-33, 출 32:11-14, 렘14:13-22). 그러나 호세아의 기도는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진노에 중보하는 대신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종류의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필요한 기도라고 여겨집니다. 악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죄에게 내 던질 때 그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부딪칠때 성경이 저주시를 포함하고 있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저주시는 온전한 악을 향한 시일 수 뿐이 없습니다. 북 이스라엘 또는 에브라임은 끝내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그곳은 나중에 예수님 당시엔 사마리아인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갖게 됩니다. 믿는자의 기도는 예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그 분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합니다. 선지자의 기도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의 기도는 예언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14:3). 그래서 우리는 축복의 예언을 하고, 병낫기를 예언하고, 밝은 미래를 예언하고, 영혼 구원을 예언합니다.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을 믿는 사람은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그 만남은 정해진 틀 안에서만 이루어 지는 진부한 만남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전 6:12).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창조적 이고, 새로움의 발견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적 기도는 이스라엘을 심판 하시는 하나님께 동의 하지만 또한 그 너머까지 바라봅니다.

호세아는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예언적 말씀를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2:23).

호세아의 예언적 기도는 복음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름받지 못하던 이방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심기고, 긍휼을 약속받지 못한 우리가 긍휼을 받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선지자의 예언적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도달한 복음의 은총의 날을 흘려 보내지 마십시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

선한 싸움

갈라디아서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February 18, 2023. SaturDevo

디모데전서 6:12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모순어법(Oxymoron-명백히 모순되는 용어가 함께 나타나는 비유적 표현 )입니다. 어떤 말을 강조하기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여기서는 말할 나위없이 ‘믿음의 선한 일 행하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쓴 표현입니다. 싸움을 하기 위하여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힘을 들여야 하며, 도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선한일 행하기’를 싸움을 하듯 ‘의지를 가지고, 힘과 노력을 들여서, 도전하는 용기로’ 능동적으로 하라는 말 일 것입니다.

매해 2월 17일은 <Random Act of Kindness Day>입니다. 올해는 어제였습니다. 친절은 결코 잘못 될 수 없고, 지나칠 수도 없습니다. Random Act of Kindness Day의 기본 아이디어는 친절함을 키우고 누군가의 하루를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Random Acts of Kindness Day는 1995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The Random Acts Of Kindness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친절한 행위는 중요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친절한 행위가 도미노 효과처럼  다른 친절한 행동으로 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시작한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친절한 행위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열두가지 법칙>의 저자 조르단 피터슨은“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을 가치 체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두고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면, 인생이 점점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작은 친절이 하루 아침에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어렵지 않은 작은 친절을 실천할때 궁극적으로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솝우화>를 쓴 이솝도 이렇게 말입니다.  “아무리 작은 친절이라도 헛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엡 6:8). 선한 일을 행하는데는 어떤 사회구조나 신분도 제약이 될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독제 사회이거나, 민주사회이거나, 봉건사회이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이거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돈이 있거나 없거나 선을 행할 수 있고, 행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지 않아야할 어떤 이유도 없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친절과 선을 행하는 것은 것은 사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선을 행하기를 싸움을 하듯 적극적으로 힘을 다해 다른 사람들 보다 능동적으로 할 것을 권고하십니다(딤전 6:11-21).

이렇듯,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친절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을 가치있는 일로 여기고 선을 행하고 싶어서 Random Act of Kindness Day까지 만들어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순자도,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도 군자를 이야기 하지만 온전한 군자는 인류역사를 통 털어도 손가락을 몇개로 꼽을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복음의 사도라는 바울도 이렇게 한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친절을 베푸는 날까지 만들었다는 말은 역으로 사람들이 정말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메말른 삶을 살고 있으면 이런 날까지 만들었겠습니까? 사람은 이성으로는 내가 먼저 작은 친절을 베풀면, 그 친절이 도미노 현상처럼 퍼져나가며 세상을 밝게 만들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떤 때는 또는 기분 좋을때, 창조주에 대한 감사가 느껴질때는 이성적 사고를 하고, 그것을 실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순간 우리속에 있는 악이 고개를 들며 우리는 이기적이고 작은 사탄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2:20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악한 본성을 가진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에게 어떻게 친절할수 있겠습니까?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살고 있는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나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오늘 세상을 조금더 살기 좋게 만드는 가치있는 일을 이뤄나가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무모하게 친절을 실천하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를 맏기십시요.  우리의 삶은 분명 더 쉬워질 것입니다. 쉬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생을 얻는 싸움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노력하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하루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알맞는 때에 누군가에게 가장 큰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