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받는 심판, 상 받는 심판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May 28, 2022. SaturDevo

넷프렉스 시리즈, <The Lincoln Lawyer> 는 미국 배심원 재판 시스템의 실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O.J. Simpson의 재판을 기억나게 해주는 이 시리즈는 어떻게 미국 법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시리즈 입니다. 피고에 대해 배심원들은 죄의 유무를 결정합니다. 무죄로 결정되면 세상속으로 돌아가지만, 유죄로 결정되면 판사가 다시 그 유죄에 대하여 벌을 결정합니다. 벌 받는 심판입니다.

성경도 심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며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고, 하나님은 결코 잘못된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심판을 종종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것은 천국의 재판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성경은 두 가지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배심원 심판과 비슷한 방법으로, 첫번째는 구원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결정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버려져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 후예의 길로 예정대로 가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믿었느냐에 대하여 상을 결정합니다. 상받는 심판입니다.

 세상적인 언어로 다시 말한다면, 첫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는 심판이고(a great white throne),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심판(the Judgment Seat of Christ (베이마βῆμα)입니다. 성경에 ‘심판’이란 단어가 나올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심판인지를 먼저 판단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고린도후서 5:10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들을 같은 심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5:24절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는 심판이고, 고린도후서 5:10은 믿는 사람들만 나와 상받는 심판입니다. 마태복음 25:31-46과 계시록20:12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는 심판이고, 계시록 20:4-6절은 상주는 심판입니다.

첫번째 심판에서 유일한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믿느냐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5).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구별되어 영생의 길로 가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기로 예정된 불못에 던져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심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여기에서 우리의 행함은구원의 기초나 조건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기독교의 구원의 원칙을 이 심판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갈 2:16; 엡 2:8-9, 디도서 3:5).

두번째 심판의 특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이 심판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강도(눅23:43)부터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하루종일 일한 일꾼까지(마20:2), 모세와 바울부터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까지  모두가 이 베이마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이 심판에 쟁점은 얼마나 믿는자로써, 청지기로써 신실했느냐입니다(롬 14:10, 고전3:11-15, 4:1-5, 고후5:10, 딤후4:8)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심판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지옥에 갈지 또는 천국에 갈지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12:47).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여기서 주의 해서 보아야 할 단어는 ‘누구든지’입니다. 다른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첫번째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불못에서 고통당하는 영벌의 심판을 받는다(마25:41)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앞 베이마 심판대 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심판은 벌을 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상을 정하는 심판입니다.

성경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상을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심판의 무섭고 준엄한 면을 반복 하여 강조함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심판을 면하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영벌의 길과 영생의 길을 결정하는 흰보좌 심판(계20:15)을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큰 상급을 받을수 있는 베이마(βῆμα) 심판을 받기를 권고합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시록 22:17).†

이도 살 삼사

누가복음 19: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May 21, 2022. SaturDevo

일석이조나 일거양득은 한가지 일을 하여 두가지 이득을 얻는 말을 일컽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타쌍피며, 안자춘추에 나오는 고사, 이도 살 삼사입니다. 누가복음 19:11-27 에서 예수님은 한가지 이야기로 세가지의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신 예수님이(눅9: 51) 여리고에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며 그를 구원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하시며 자신이 이땅에 온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하실일, 일어날 일들이 많은데, 아직도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얘기하는 천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이 열 므나의 비유는 마태복음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핵심가르침은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암시하며, 마지막 때에 그 제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 촛점을 둡니다. 마태복음 24, 25장은 말세의 징조와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장 4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며, 연속적인 네가지의 비유를 (마24:42-43, 24:44-51, 25:1-13, 25:14-30)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며 경계하고 신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반복하고 강조합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열 므나 비유는 한 가지 이야기로 우리에게 세가지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비유가 집중 사격이라면, 누가복음의 비유는 일석삼조의 산탄 발사입니다.

열 므나 비유의 가르침은 첫째, 바른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마태복음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믿는자들의 처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는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세상이 변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왕으로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만(눅19:28-44), 또 떠나야 할것을 비유에서 암시하십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눅19:12)에서 ‘귀인’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2차 삼두정치의 거장 안토니우스의 비호를 받으며 왕권을 받아 유대땅을 다스립니다(BC 37). 그러나 악티움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BC 31), 헤롯은 다시 로마로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뇌물을 주고 충성을 맹세하여 다시 왕권을 받아 유대를 다스리게 됩니다.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를 다스리게 되었을때, 그도 로마에 가서 왕권을 받아오게 되었습니다. 왕들이 왕권을 받으러 로마에 갈때마다, 그들만 간것이 아니라, 그가 왕되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어 그들의 왕권받는 것을 반대하는 로비를 벌이곤(눅19:14)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때 모든 유대인들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그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왕으로 이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이땅에 임했지만 (마4:17) 유대왕들이 왕권을 받으러 로마감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것 처럼, 예수님도 하늘에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실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천국은 ‘이미 (Already)’ 우리 중에 임했지만 예수님의 재림까지는 아직(Not Yet) 온전한 천국이 임한 것이 아니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열 므나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처럼 늦어질지도 모르고 언제일지 그 날과 때는 아무도 알수없는(마24:36) 예수님의 재림때 까지 믿는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대로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13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15절)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종들과 회계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재림때에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생명의 부활에(요5:29) 따르는 심판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타락할수 있음을 일하지 않고 게으른 종의 경우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가르침은 믿지 않는 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아켈라오가 왕권을 받으러 갔을때, 유대인들의 로비로 그는 왕권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거부를 그 사건과 연결시켜 연상케 하며,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예수님이 왕 되기를 거부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19:27).

열 므나의 비유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실제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욧점은 승천하실것과 다시오실것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맡겨진 청지기 직무는 예수님의 다시오심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다시오심 사이에 시간(Delayed or for a long time)이 없다면 제자들의 청지기 직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앞에 신실함을 보일수 기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중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처럼, 더디 오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더디오심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왕되심, 즉 메시아 구세주 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즉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책망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도 살 삼사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라고 그냥 흘려 읽는 대신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욧점을 찾아내는 은혜를 누리길 원합니다. †

너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May 14, 2022. SaturDevo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반항기에 있는 청소년 자녀들을 둔 가정의 부모들이 그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까 합니다. ‘저게 아닌데’, 청소년 자녀들은 자신들이 다 컸다고 주장하고, 부모들을 구태의연한 사고방식만 고집하는 구세대 취급하며 my way 를 고집합니다. 안타깝지만 어찌할 수 없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누가복음 12장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발길을 돌려 자신의 사역의 완성을 이루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그의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이땅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깨우침을 주실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 몰두하며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와 하고 있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자신의 신앙생활의 치장물로 여깁니다 (마6장).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하고, 두려워 해야 할 것과 안 두려워해도 될 것을 구별 못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습니다(눅12). 그런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은 귀중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 모든 것이 해결될수 있는 간단한 해법을 “그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합니다.

그러면,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데 그것을 구하라고 하시고, 그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실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천국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죽어서나 가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국가의 왕국과 같이 공간, 영토 또는 정치의 개념이 아니라, 왕의 통치, 지배, 주권적 통제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십니다. 이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법률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골1:13). Graeme Goldsworth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통치 하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요약합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에 엄청난 무게를 느껴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민수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누구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감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을 때 그들은 착한 양같은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밥먹듯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 속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민 6:24-26).

사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이 축복을 백성들에게 거듭 선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 광야에서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하신일과 함께 그 축복이그들의 뇌에 각인되고 가슴에 새겨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떤 의미에서 광야를 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리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셀수 없을 만큼 자주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매일 여러 종류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계, 건강, 가족, 미래와 같은 일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타락한 사람들이며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눈에 안타까운 청소년들 처럼,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적은 무리여’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생각할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것 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진정 선택받은 특별한 소수입니다. 그 특별한 소수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필요가 채워지고, 염려대신 감사가 있는 나라입니다.

축복이라는 단어는 영적인 단어로, 하나님의 자녀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번역하는 또 다른 의미는 ‘행복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축복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단한 위로가 아닐수 없습니다.†

구약에 있는 복음

출애굽기 18:10.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May 7, 2022. SaturDevo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알라스데어 멕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그의 책, <After Virture>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예를 들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모르는 한 젊은이가 자신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보통 들오리의 이름은 Histrionicus histrionicus histrionicus입니다”라고. 그는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 들었지만 그 젊은이의 말과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사건이 들어맞는 이야기를 아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 슬픈 삶의 이야기가 그에게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할 것입니다. 또는 어제 누군가가 도서관에 있는 청년에게 다가가서 야생 오리를 라틴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물었는데 오늘 그 청년이 버스 정류장에 있는 남자를 도서관에 있었던 그 사람으로 착각하였다면 어떨까요? 그 사소한 이야기도 그것을 설명할 것입니다. 또는 그 청년은 “미리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며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는 암호 문장을 말하고 있는” 외국 스파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 드라마틱한 스파이 이야기는 그 사건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없으면 그 버스정류장의 사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다양한 이야기와 자료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은 마스터 내러티브를 포함합니다. 저자이신 하나님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에서 그가 창조한 실제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모든 부분이 관련되고 모든 부분을 이해하는 기본 줄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모든것 (all about Jesus Christ), 예수님 자체이시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것 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 2개월이 지나갈때 쯤 될때 시내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시내산은 호렙산입니다. 즉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나와 양을 치던 곳이었고 (출3:1),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사는 곳에 가까운 곳입니다. 모세가 그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드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모세의 아내와 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에게 옵니다. 모세는 그들을 반겨 맞고, 이드로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모든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는 기뻐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신보다 크다는 것을 고백하고, 번제와 희생제물을 드리고 아론과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재판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가르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서만 바쁜 모세를 보며, 모세가 지쳐 쇠할것을 염려해 조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모두가 평안할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그의 조언을 듣고 행했을때,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체계가 잡혔고 모든것이 잘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있을 법한 사건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사건을 성경에 한 사건으로 이곳에 삽입시키셨을까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셨을까요?

리더라고 해도 조언을 듣는것은 필요하고, 좋은 조언을 듣고 수용할 줄 아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라는 교훈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고, 하나님이 저자라는 것을 생각할때,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것은, 이런 사건를 볼 때, 매스터 내레이티브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옛 사람에게 말한바, … 하였다는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22)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복음을 들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교회에 이방인이 올 기회가 있습니다. 이드로 처럼, 친척 친구 때문에 올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올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해도 믿는 사람이 여러가지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기회에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일을 들려줍니다 (출18:8). 복음을 들려 주었습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드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뻐하고 찬송하며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도다 (the LORD is greater than all gods) (출 18:10). 그러면서 번제와 희생제물을 가져옵니다. 고대 중동 지방의 제사의 기본 개념은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어떤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드로의 행위는 신약의 개념으로 회개와 영접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이드로는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사랑의 음식을 나눕니다. 성도의 교제입니다.

4. 교회의 성도가 되는 이드로는 교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좋은 의견을 조언하여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을지를 구합니다 (출18:23). 믿음 생활의 기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 복음을 들은 믿음의 성도는 쾌적한곳, 편안한 곳에 안주하기 보다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자리에서 복음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마28:18-20).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빼어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들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손을 이스라엘 백성을 잡고 계셨지만 그의 눈은 열방을 향하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열방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열방이 복음 전파에 참여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3)는 약속을 잊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빌어 성경을 쓰셨지만, 모세 뒤에 있는 진정한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모세가 생각하는것 이상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뜻은 1500년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중에 오셨을때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3-14).

복음은 성경 66권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맥입니다.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복음을 읽고 복음을 살아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빌립보서 4:5-7,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pril 30, 2022. SaturDevo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마태복음 6:25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다른말로 설명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갈망과 미래를 향한 걱정 근심의 실체를 보이시며 결론적으로 ‘그러므로(therefore)’하시며 진정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그런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말씀입니다. 시셋말로 한다면, 먹고 입고 사는일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런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줄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시다고 합니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삶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정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염려와 걱정을 없이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도와 간구로 모든 염려를 이길수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삶은 아울러질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할까?

첫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에 전제가 될수 있을것 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없어진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안에 녹아드는 일은 어렵지 않을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6절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를 자연반사/반응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생겼을때, 우리가 염려할것인가 말것인가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이 영적 자연반사는 옳은 반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의 죄성으로 인하여 사람에게 잘못 길들여진 옳지 않은 영적 습성입니다.

자연 반사는 손에 불이 닿았을때 우리가 배우지 않았어도 손을 빼는것과 같습니다. 한편 조건반사는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생겼을때 어떻게 반응할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랙 로리 목사님은 이것을 자동차 운전하는것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운전을 처음 배울때, 앞에 차가 있으면 브래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을 배웁니다. 스탑싸인 앞에 섰을때 좌우를 살피고 사람이나 다른 차가 없으면 가는 것을 배웁니다. 차를 세우기 위해서는 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섰다가 가기 위해서는 발을 오른쪽에 있는 악셀레이터를 밟아야 하는것을 배웁니다. 차를 처음 운전하는 사람은 이 모든 동작들을 하나 하나 배운대로 기억해 가며 염려스럽게 한동작 한동작을 연습합니다. 조건 반사입니다. 그러나 운전이 익숙해 지면, 그런 하나 하나의 동작에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운전을 합니다. 운전이 자연반사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기도에 적용해 봅니다.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때 바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조건 반사를 발달시키듯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습관을 들여갑니다. 이 조건반사의 행동이 자연반사의 행동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건, 사고, 근심, 걱정이 일어나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습성이 된 염려라는 영적 반사를 조건 반사를 발달시킴으로 바른 자연  반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기도는 염려의 해독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도할 수 있습니다(시 34:15).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울의 해석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모든 근심 염려에 대한 자연 반응이 기도로 바뀔때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언어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삶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하늘나라의 언어도 아니고, 철학자나 군자의 언어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꾼다면, ‘영생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안에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절대 의지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바울은 로마서 8:31-39절에서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아울어진 삶을 사는것은 가능합니다. 염려하는 잘못된 습성을 고치고, 기도의 천성을 의식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

만나의 교훈

출애굽기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April 23, 2022. SaturDevo

출애굽기 16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에 이릅니다. 그들이 애굽을 나온지 한달 반이 되었습니다. 쌓 갖고 나온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광야를 지납니다. 난감한 상황에 놓이자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은 불평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그러자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출 16:4). 그리고 이어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 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16:4b), 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셨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에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7절) 하며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8절) 하며 백성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어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빵, 만나를 모아 먹으면서도, 안타깝께도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화를 자초하고, 고생을 자초합니다. 한 오멜만 모아 그날에 다 먹으라는데, 더 모아서 다음 날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 놓으므로, 집안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풍기게 하는 화를 자초하는가 하면 (20절), 여섯째날은 다음날 안식일을 위하여 두 오멜을 모으고 안식일엔 모으러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바구니를 들고 만나를 모으러 나가는 고생을 자초합니다(27절).

‘만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일은 아닙니다. 그 일이 있은지 1500년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요6:33). 출애굽기 16:1-17:7을 읽을때, 요한 복음 6:22-59 을 같이 읽으시면 좋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경을 완전케  다 이루려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마5:17).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하늘 양식, 만나와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낸 물이 예수님이십니다. 노예의 삶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만나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그들의 광야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양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사건과 17장의 반석을 쳐 물은 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오시어 완전케 이루실 예표 사건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만나’사건은 우리의 ‘생명의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로(요6:35)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또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식량이 떨어지는 난관에 부딪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도 삶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만날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는 먼저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바로 치하에서 그들의 옛 삶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끄는 그들의 새 삶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은 눈덩이 만큼 커 보이고, 과거의 치욕은 잊고 좋은것만 기억해 낼려고 하는 자기기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평을 듣고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평이 아니라 먼저 기도로 그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만나’사건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록되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빌립보서 4:6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합니다. 어려운 일에 부딪칠때, 하나님께 걱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것보다 먼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우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이들의 삶은 제 각각 이었던것 처럼, 오늘날도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듯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며 어떻게 행동할것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쳐놓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기들이 아는 지식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사람의 삶에 메뉴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것을 분명히 알려 주시지만, 우리는 성경은 단지 성경으로 간주하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헤쳐 나가려고 결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내일을 걱정하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그날 그날의 양식을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었을때는 안식할수 있도록 이틀치 양식을 주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4)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내일을 걱정합니다. 사서 고생하며 안해도 될 일을 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며, 혼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구원 받고, ‘참된 양식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은 닥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께 먼저 아뢸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을 적용하며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우리와 무슨 상관 ?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April 16, 2022. SaturDevo

부활절은 예수님이 죽으신지 삼일만에 살아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념에 익숙해진 우리는 멋지고 근사한 기념 축하에 관심이 있을뿐 정작 우리가 기념하는 그 부활이 우리 또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는 관심이 소홀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해피 이스터”하며 활짝 웃는 웃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웃게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우리가 기뻐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성경은 구약 부터 신약까지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글입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동안 자신이 이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이유를 말씀하시고 (마5:17, 눅5:32, 막10:45, 눅4:18-19, 요3:17, 요10:10, 요18:10)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씀하시며,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마16:21, 17:22, 막8:31. 요11:25-26, 14:1-3, 눅9:22).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잘못된 메시아 관념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더구나 메시야(구원자)인줄 알았던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그들의 혼란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며 제자들은 그의 수수께기 같던 말씀들을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오셨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됩니다. 예수님이 섬기려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하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를 알게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과 모든 성경 말씀이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3-20).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오늘 우리의 삶과 깊은 상관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 할 것을 확증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나는 부활의 열매가 될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첫 열매라는 단어는 샘플링, 미리 맛보기, 엿보기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또 죽으시기 전과 똑 같은 사람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할 몸도 그분의 부활한 몸과 똑 같이 닮을 것임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심판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의 심판의 증거입니다. 그다지 흥미롭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진리인 성경은 분명히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원하지 않아도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원하지 않을 지라도 받을 수 뿐이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그리고 그 심판은 둘중 하나를 선고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46). 요한은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9). 성경의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6:29).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부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늘을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확실히 성경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육신에서 죄가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선포합니다.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가 아닙니다. 죽으신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와 교통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현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에덴동산의 낙원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피할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정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오늘도 소망의 새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새로와 지고 하늘의 분명한 소망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Happy Easter !’하며 인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

마가복음 11:7-10,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

April 9, 2022. SaturDevo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주일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이날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올려놓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의 도성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십니다.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드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적에 대한 승리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행위였고, 겉옷을 벗어 발 밑에 까는 행위는 왕으로 인정하는 겸손의 징표였습니다(왕하 9:13).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한 사건을 기념하며 이름한 종려주일이란 말은승리와 정복과 환희의 이미지를 줍니다. 그러나 그 주 첫날의 환호의 함성는 점차 적의로 채워지며 종국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지한 백성의 외치는 아우성으로 끝이납니다. 종려주일의 밝은 희망의 이미지로 시작한 한주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암울한 절망으로 고난주간의 막을 내리는 듯 합니다. 잘못된 이해는 잘못된 기대를 가져오고 그로 인하여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몰이해로 일어난 사건의 전말입니다.

예수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주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구주의 궁극적인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왕의 입성이고(슥9:9, 창49:10, 시118:26) 두째는 유월절 양(출12:1-14)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에 맞추어 오시게 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중 하나이며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있던 유대인들은 이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모여듭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사상은 메시야 사상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믿음이었지만 다분히 유대화된 믿음이었습니다. 다윗 계통의 메시야(구원자)가 나타날것인데 그가 모든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공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신8:15, 사9, 슥14).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3년동안 행하셨던 모든 일을 소문으로 들었을 것이고, 그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이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다는 이야기는 산불 번지듯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학수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의 생각과 관점에는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 역사적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펼쳐지게 됩니다 (마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11:6-10).

그러나 예수님과 백성과 제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는 죄와 악에서의 구원이고 천국의 영원한 왕 이였지만  제자들과 백성들의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이고 기껏해야 이스라엘의 왕 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은 죄와 불의 이었지만, 백성과 제자들의 대적은 로마였습니다. 한 주가 지나가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던 정복하는 메시야로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정치적 구원을 가져다 주지 않으실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속죄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가져올 참된 구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닷새 후에, 그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환호을 외쳤던 바로 그 백성 중 일부가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달라’고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메시야에 걸었던 이스라엘의 기대는 이제 적의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하나는 배반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님입니다(출12:1-1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려면 유월절과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던 날은 닛산월 10일 (히브리력, 1월 10일)  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아빕월로 불렸으나 이후에는 닛산월로 불립니다. 이날에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정월 10일에 흠 없는 일년된 어린 양을 택하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출 12:5-6). 이렇게 선택된 양은 다음 4일 동안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열다섯째 날이 시작되기 전날 밤에 (열나흗날 해 질 때에)  그들은 어린 양을 잡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유월절 음식를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땅에 모든 장자를 죽일때, 그들을 지나쳐 그 집의 장자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역사적 배경에서 종려주일의 사건을 보면,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선택하던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참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요1:29)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백성들에게 상징적으로 선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어린 양이 백성의 집에 들여와서 나흘 동안 머무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아버지 집 성전에 오셔서 죽으시기 전 나흘 동안 백성들과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가르치셨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종려주일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역경과 시련에서 즉시 우리를 구원시켜 주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때와 시기를 신뢰할 만큼 겸손합니까?

우리 각자는 영적인 속박 속에 있는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피로 풀려야 하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린양을 구별해 들여 놓고 나흘을 같이 지내다가 유월절 전날밤에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자신들의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 이번 종려주일이 우리 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택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에 들이는 기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호산나(Lord, Save me)를 외치며 옷을 벗듯(겸손) 우리의 모든 것을 그 앞에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로 선택하고 그분의 참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흘리신 그 피로, 사망과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승리의 입성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April 2, 2022. SaturDevo

에베소소 2장 8-9절은 기독교의 구원의 본질을 간단 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입니다. 사실 2장 1-10절까지가 풀 버젼(full version)인데 이 10절은 원문에서는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1-3절은 우리의 과거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4-7절은 “But”으로 시작하며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일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8-9절은 “은혜”라는 단어를 주어 앞에 놓는 도치법으로 강조하며 하나님이 하신일, 즉 구원의 핵심을 짧지만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10절은 구원 받은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어떻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들으며 살아 왔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떻한 환경에 놓여 있든지, 더 나아지기 위하여, 또는 목표를 가지고 당신이 열심히 노력할때 하늘도, 또는 모든 환경과 주위 사람들까지도 당신을 도울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도 돕지 못하는 자를 돕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까지도 돕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자를 도와 일으키시고 새삶을 살게 하십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길에 동물이 치어 죽어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영적으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엡 2:4-5)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보내지신 복음이십니다. 그 복음, 예수 그리스도을 듣고 믿는 사람은 모두가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죽었던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과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믿음’을 구별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혹자가 생각하고 말하는 믿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갖을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믿음도 있고, 정치적 믿음도 있고, 돈을 믿는 믿음도 있고,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도 있고, 권력을 믿는 믿음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으로 잠시 무엇인가를 얻고 이룰수 있을른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구원은 없고 모두가 결국은 실망으로 끊나게 됩니다. 성경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3:1).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은 복음(하나님의 약속이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의 도구적 원인입니다. 은혜는 믿음의 통로를 통해 흐르지만 그 통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결국 하나님께 받은 것입이다.

그래서 성경은 단언합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서 “이것”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얻은 구원”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엡2:9). 이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더하고 뺄수 있는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단적인 엉뚱한 질문에 접하게 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네 받았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Nothing. But 내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면 족합니다.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구원하신 목적을 말합니다. 이 목적은엡 2:1-10절의 하나님과 믿는자의 수직관계를, 엡2:11-14절의 우리와 이웃,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예비하신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받은 사람들이기에, 예전(엡2:1-3)과 틀린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셨다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17절은 누가 새로운 피조물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요. 당신은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마가복음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March 26, 2022. SaturDevo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한 위격, 아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100% 하나님),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고 (100% 사람) 영원히 그러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위격적 결합(Hypostatic Union)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이기 때문에, 이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이 사람이시라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예수님 자신도 그 사실을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믿게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계시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해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는듯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복음서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는데 할애된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또한 온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1:24-25, 눅2:7, 요19:28). 그리고 게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에서 많큼 예수님이 100% 사람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구절도없을 듯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3년동안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 시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사역의 정점이 되는 십자가 사건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드시며, 마지막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평소처럼 제자들과 같이 밤시간을 보냈던 감람산 (Mount of Olives)에 오십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에게 닥칠 순간을 아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게세마니의 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누 22:40-46)라고 알고 있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게 됩니다.

이곳은 정확히 올리브 라는 산에 게세마니라는 장소입니다. 게세마니라는 말은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밤에 숙소로 사용했던 장소를 감람산 (올리브 동산)이라는 말로 표현하다가 갑자기 ‘게세마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단어의 의미와 예수님의 기도와 죽음의 의미의 유사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은 복음서의 저자들의 의도가 들어 있을 줄 압니다. 부서지고 으깨어 져서 나오는 기름의 이미지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의 이미지, 세상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멸시와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한가지로 아우르는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유월절음식을 제자들과 드신 그날은 목요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긴 하루였습니다. 요한 복음 13:1절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자니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고 바쁘고 안타까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렇게 하루를 마치신 예수님은 지치셨을 몸으로 이제 게세마니동산에서 도착하시어 “고민하시고,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 이 마지막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엔 전혀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때 떠오른 영상은 차라리 아모리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보이고,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던 야곱의 모습이 보입니다. 절박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처절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떠오르고(마 6:5-15), 그 기도가 어떻한 기도여야 하는가를 100% 사람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는 기도는 공감 하지 못하면 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삼년을 제자들과 지내며 예수님의 모든것을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왜 저렇게 고민하시고, 놀라시고 슬퍼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고 하시지만, 예수님을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Inner circle의 세 제자 조차도, 예수님이 특별한 부탁을 3번씩이나 하시는 데도 졸음에 빠집니다(마 26:38-45, 막 14:34-41). 예수님이 마태복음 6:13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외워서 읍조리는 기도는 아닌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제자들이 잠에 빠지는 행동보다 나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또 부탁 받습니다. 그러나 또한 너무도 종종 막연한 기도부탁에 마주합니다. 기도 부탁을 주고 받지 말든지, 할려면 공감할수 있는 기도부탁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는 진실한 내면 표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기도합니다.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한 예수님이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26:39). 성경에서 ‘잔’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운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성경에 예언된 것을 상징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그 일을 하셔야만 하는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이 저런 기도를 드릴수 있나 의심스럽습니다. 말씀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아들이 하실수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연약해도 나보다 더 연약할것 같은 그런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꾸밈없는 진실한 연약한 사람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마6:7) 같은 기도를 세번씩이나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중언 부언의 기도가 아니고, 절실한 기도임을 압니다. 바울이 했던 세번기도를 기억합니다(고후 12:8). 안타깝고 절실한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앞에서 감출것 없습니다.

세번째,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내 의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안에서 관철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민하시고 놀라고 슬픈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아버지께 그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자신의 뜻을 기도로 아뢰지만 (막 14:36),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트레셔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완고함과 경건한 인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기 뜻이 하늘에서 이루지게 고집하는 것이고, 후자는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도록 결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Dr. W. Thrasher). 이것은 기도의 최선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의도를 맞춘다는 것은, 내가 루저가 되고, 아버지가 윈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기도했고 그렇게 된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영광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도를 맞추는 것은 윈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너무도 인간적인 게세마니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화합하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는 가르침이시며, 또한 100%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시라는 예수님의 위격이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00% 사람으로써 예수님이 하신 게세마니 기도는 우리도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