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확신하는 믿음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March 16, 2024. SaturDevo

“내가 만약 집과 자동차를 모두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하면 천당에 갈까요?”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뇨,”라고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교회 청소를 매일 열심히 하면 천당엘 갈까요?” “아뇨.”

“그럼 내가 반려 동물들을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면 천당엘 갈까요?” “아뇨.”

“그럼 어떻게 해야 천당엘 갈 수 있을까요?”

그때 뒤에 앉아 있던 한 사내아이가 외쳤습니다. “죽어야 갑니다.”

항간에 카톡을 통하여 떠도는 웃스게 소리입니다. 웃스게 소리이지만 단지 한번 으쓱 웃고 말 이야기는 아니기에 옮겨 적어 봅니다.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또한 이 어린아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때 어떤 사람이었건 상관없이 교회 목사가 집례하는 장례식장에서 죽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의인이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잘 돌봐 주었는지, 죽은 사람에 대한 갖가지 찬사는 이어집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이 어린아이처럼 죽어야 천당에 가겠구나라고 확식할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롬5:1)는 사도 바울의 말이 무색합니다. 사람은 오직 죽음으로 의롭게 되는 듯 합니다.

마태복음 7:2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예수님은 거짓 믿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의 공동체에서 열심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놀라운 은사까지 발휘하는 사람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고, 그들의 교회를 향한 열심이 진실하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확신하는 그 믿음이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르다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졌으나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눅10:41-42).

자신이 확신하는 믿음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6-27).

하나님의 뜻은 말씀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확신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으로 확신하는 믿음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법이 먼저 인가 사람이 먼저 인가?

마가복음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March 9, 2024. SaturDevo

RTL 프로그램에서 알게된 중국분과 같이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 분과 마가복음 2:23-28을 같이 읽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부분은 인본주의 사상을 얘기하고 있는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성경은 인본주의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사람을 위하시고, 살리시고 존귀케하시기 위하여 주신것이지, 사람을 속박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서 부벼 알곡을 먹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입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2:24).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하지 못할일은 출애굽기 20:9, “일곱째 날은…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일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자르는”일을 언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은 “안식일”과 전혀 상관없는 다윗의 얘기를 말씀하시며 촛점을 “하지 못할 일”에 맞추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2:25-26). 이 일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망가며,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들러 배고픔을 해결한 일을 말합니다(삼상 21: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어서 정당화 된것이 아니라 신명기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모세의 계명을 재 해석하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 계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주신 의도를 상고하지 않고, 무조건 그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행위는 바리새인같은 위선으로 빠져들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흠 잡기를 주특기로 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꼬투리잡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또 아히멜렉을 아비아달로 얘기하는데도 아무말도 안합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한번 쯤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보다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의도를 보고 계시지만, 바리새인들은 생각없이 그 텍스트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8). 인자(the son of man)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과 대조되는 또다른 예수님의 별칭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신 위격적 결합의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두 칭호 모두 적법합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정체성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종이심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백퍼센트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고통받는 종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영광의 왕이시며 재판장이심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살리신 우리의 주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세상의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본주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위하는 진정한 인본주의와 상통합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사무엘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March 2, 2024. SaturDevo

‘다윗과 골리앗’ 또 ‘다윗과 요나단’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단순 구성의 이야기라면, 다윗과 요압, 또는 다윗과 압살롬은 구성이 다소 얽힌 어른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입니다. 사무엘하 18장은 아들과 아버지의 왕권 다툼의 불행한 내전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등장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삼하 3:3)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압살롬은 그의 누이 다말로 인해, 이복형제 암논을 죽이는 일을, 이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다가 모의하고 실행합니다. 압살롬은 그 길로 도망쳐 자기 외가집으로 가서 삼년을 살게 됩니다. 삼년이 지나자 다윗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며, 죽은 아들은 죽은 아들이고, 산 아들을 슬그머니 그리워하게 되고, 이를 눈치챈 요압의 괴계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압살롬은 먼저 회개를 했어야 했지만 판세를 읽는데 머리를 쓴 그는 요압을 압박해 아버지와 화해를 합니다(삼하 14장). 그리고는 대권를 잡기위해 위선을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자기편으로 만들고 쿠데타로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었습니다(삼하15). 압살롬은 자신이 아버지의 왕권을 자신이 차지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는 옥상에서 아버지 다윗의 첩들과 동침까지 합니다(삼상16:22). 그리고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여야 모든 백성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자신의 왕권이 견고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죽이러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뒤를 쫓습니다.

사무엘하 18장은 드디어 아들의 군대와 아버지의 군대가 에브라임 수풀에서 전투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도망나올때 따라나온 얼마 안되는 군대를 전장으로 내 보내며, 군지휘관들 (요압과, 요압의 형제 아비새와 가드사람 잇대) 에게 압살롬를 너그러히 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삼하18:5)이라고 적고있습니다. 다윗은 형제을 죽인 살인자, 방화범, 백성을 빼앗은 사기꾼, 예루살렘성을 빼앗은 반역자, 그리고 아버지인 자신까지 죽이려고 하는 패륜아 압살롬을 위하여, 왕인 자신을 위혀여 목숨까지 걸고 싸우러 나가는 군대에게 아들을 너그러이대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전투는 아버지인 다윗의 군대가 승기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삼하 18:9)갑니다. 그리고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를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무시하고 죽이므로 전투는 끝나고, 요압은 나팔을 불게하여 군대를 불러들임으로 이런 어이없는 내전으로 인한 더이상의 죽음이 없게 합니다. 그러나 전투에 이긴 소식과 압살롬이 죽은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자 다윗은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삼하 19:1)합니다.

이스라엘의 존폐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생사가 달린 싸움에서, 패륜아들을 너그러히 대해달라고 명령하는 다윗, 그 전투에서 이겼는데 목숨걸고 싸운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대신, 무리를 일으켰던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이 다윗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겠습니까? 요압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삼하 19:5-6). 지당한 불평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요압이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음에 반하여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하여 성경은 욧점을 정리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요압같은 현실주의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감수하시며, 용서할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길을 열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세워진 우리의 죄가 압살롬의 죄보다 결코 가볍다고 주장하기 쉽지 않을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압살롬과 그가 아들이기에 자신이 멸망할 지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그 기회를 잃었을때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기회를 잘라버린 요압을 다윗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시면, 압살롬보다 더한 죄인일 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다가 그 죄인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영벌로 떨어지면 다윗처럼 우십니다. 압살롬보다 더한 죄인일지라도 그가 주께 돌아올 길을 막는 사람은 요압이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6). 압살롬보다 더한 죄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 누구도 누구를 정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화해할 기회를 뺏을 수 없습니다.†

복된 사람

누가복음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February 24, 2024. SaturDevo

사람이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사람은 분수를 아는 사람이고 복된사람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종종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왜 이땅에 왔는지를 말씀하시며, 삶의 가치와 목적의 중요성을 기억나게 하여 주십니다.

마가 복음 2:17에서 “예수께서 …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5:17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신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 그에 맞는 일을 행하십니다.

누가복음 8:26-39은 예수님이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온전케되어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자,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사람들이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우면 숨고, 복음의 진리를 보면 눈을 돌리고, 가치를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자들입니다.

귀신들렸다가 제정신이 돌아온 사람은 떠나는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께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신을 구원하여준 분이기에 항상 함께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눅8:39).

예수이 하신 말씀과 그가 행한 일, 두 구절이 일치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와 “그가 가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와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를 말하라”와 “…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학적인 사실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은 분 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진부한 사실이지만 작자의 설명없이 우연히 씌인것 같은 이런 구절(눅9:42-43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누가가 이런 구절을 통하여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이기에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말하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큰 일’을 전파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고 믿어 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존재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와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복음입니다. 그것을 ‘말하라’ ‘전파하라’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마28:19-20).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지 분명히 아는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떠나라고 하는 대신,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고, 삶에 가치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구원받는 복된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

사울의 죽음

사무엘상 31:4.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February 17, 2024. SaturDevo

사무엘상 31장은 다윗과 사울의 갈등의 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갈등의 끝은 사울의 죽음입니다. 그 갈등의 뿌리는 사울의 교만과 시기와 질투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같은 이스라엘인이기에 두 영웅이 힘을 합쳤다면, 더 위대한, 더 튼튼한 이스라엘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교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게 했고,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의 심판이 됩니다. 사울의 그 시기와 질투의 원인은 여인들의 노래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는 민심이었고, 그 민심을 읽을 줄 알았던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며 낭떨어지기로 떨어집니다. 경쟁자를 만났을때 사람은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것입니다. 선의의 도전의식으로 자기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사울처럼 시기와 질투로 그를 제거하여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시기와 질투라는 독약을 마시고 심리적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런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죽음은 될수 없습니다. 그는 지고있는 전투에서 활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31:4-5). 사울의 죽는 모습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아비멜렉의 죽음을 연상케합니다. 아비멜렉은 망대위에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집니다(삿9:53).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삿9:54). 아이러니 하게도, 아비멜렉의 마지막 숨은 무기든자의 칼에 찔려 죽었지만 결국은 여인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지만(삼하11:21), 사울의 마지막 숨은 자살로 끝나지만 후세 사람들은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싸우다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삼하 21:12). 자살은 안했지만 여인에게 죽었다는 불명예를 당하는 아비멜렉과 자살을 하며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죽는것을 면하고 전투에서 죽었다는 명예를 받은 사울중 어느것이 더 나은것일까요?

사울은 아름다운 죽음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도 끔찍한 일을 당합니다. 죽은 이튿날 블레셋사람들은 전리품을 걷으러 왔다가,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 그의 머리를 베어내고 갑옷을 벗겨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냅니다(삼상31:9). 그리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히는 일을 당합니다.

사울의 교만과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정신을 마비시킴으로 자성의 기회를 잃게 합니다. 사울에게는 몇번의 자성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사무엘선지자를 통하여, 요나단을 통하여, 그리고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을때, 사울은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의 마비된 이성은 하나님앞에 서기를 거부합니다.

자기성찰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위하여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놓고 볼때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10:12),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후10:18). 교만과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앞에 서기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늘에 있는 시민권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February 10, 2024. SaturDevo

여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운치있는 말입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해보는 경험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납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도시에 발을 들여놓고 그곳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셔 봅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나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만나고,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사람들의 냄새와 맛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도 있지만, 나의 고향에서 처럼 익숙하지 않은 삶의 방법들이 불편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이삼일 지나면 어느정도 익숙해 지게 되는데, 그러나 여행이기에 또 다른 도시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또다른 새로운 환경, 흥분과 긴장은 연속됩니다. 여행이 끝나갈 때쯤 되면, 흥분 보다는 연속되는 긴장은 스트레스가 되며 하루 속히 집으로 돌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자주 떠오르게 됩니다.

이 여행을 확장시켜 놓은 것을 베드로는 이땅의 삶이라고 일컬으며,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벧전 2:11)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팔레르모 대성당의 남쪽입구에 얼뜻보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의 그림을 동상으로 만들어 세워놓은것 같은 석상을 만나게 됩니다. 오른쪽의 석상은 왼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흡사 아테네학당의 아리스토텔레스 처럼 보였고, 왼쪽의 석상은 오른손을 치켜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는 모습이 플라톤처럼 보여서 ‘왠 철학자들을 성당에 세워 놓았을까’ 하고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고, 그들과 비슷한 포즈를 취한 베드로와 바울이었습니다. 왼쪽의 베드로는 오른손에 열쇠를 들고 왼손으로는 성경책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바울은 오른손을 치켜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의 가르키고 있고 왼손으로는 성경책을 끼고 있습니다. 그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주는 분명한 메세지는빌립보서 3:20말씀과 마태복음 16:19말씀입니다.

두 석상은 문 양쪽에 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나그네와 행인같은 (벧전 2:1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성도들, 교회는 천국 열쇠를 가진 사람들이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이것은 믿는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뿐이 없는 이유입니다(마5:44). 믿는 사람은 매는 사람이 아니라 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바울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3:20-21).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사는 믿는 사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까? †

사울이 망하는 이유

사무엘상 14: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January 20, 2024. SaturDevo

마틴 루터 킹은 비젼이 있어서 산 사람이라면, 사울은 비젼이 없어서 망한 사람입니다. 비젼은 꿈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지만, 그것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삼상 9:2). 그는 잘 생긴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핍니다(삼상10). 그리고 암몬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했을 때, 용맹을 보여 명실공히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합니다(삼상 11). 12장은 사무엘이 정계에서 은퇴하는 장면으로 채워지고, 13장, 14장, 15장에서는 사울이 망할 수 뿐이 없는 이유가 나열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람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왕이 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바라보며 행동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비젼을 보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현실주의 자입니다. 블레셋인들이 쳐들어 오자, 사람을 불러 모읍니다. 당시에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때,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묻고 일을 시작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도 사무엘 선지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8). 사무엘이 제때에 오지 않자, 사울을 따르기로 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갑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삼상 13:9)립니다. 사람을 바라보며, 엉겁결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울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험악한 가운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사울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블레셋진영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무슨일인가, 어찌해야 좋을까 갈피를 못잡은 사울은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합니다. 하나님께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손을 들어 하나님게 물으려 하는 동안, 블레셋진영에 소란이 점점더해집니다.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이 이기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삼상14:9) 이기는 전투에 뛰어들기 위해 자리를 뜹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자기의 판단으로 행동하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이기는 전투 속에서 먹지를 못하게 하고, 요나단이 이 명을 못 지켰을때 아들 요나단에게 죽음을 선고하나 백성들이 안된다고 하자, 죽이지 못합니다. 바람에 구르는 나뭇잎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사울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15장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진멸하라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진멸하라’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여 행동합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15:9).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삼상15:22-23)다라고 사무엘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렁설렁 읽고 자기좋은 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는 사람의 행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한 이유는 열방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에게 방점을 찍기 위하여 조연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성취케 하시기 위하여 가롯유다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할때 빠지는 위험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때 그분 안에 있는 비젼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비젼이 없는 사람은 경거망동합니다. 사울왕 처럼 실수하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꿈은 죽어도 죽지 않는 꿈입니다. 노인은 꿈을 꾸게 하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합니다(욜 2:2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가 누구냐?

누가복음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January 13, 2024. SaturDevo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조차도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종국는 예루살렘의 대제상장도 이 질문을 하지만, 예수님이 옳은 대답을 했을때, 예수님에 대해 죽을 죄로 정죄합니다. “이가 누구냐(who is this)?”라는 이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할수 있다는 것은 바른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며, 도무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라고 생각할 수 없는 권위있는 복음의 말씀을 하시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죄사함까지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속에 끼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묻습니다. “이가 누구냐(who is this)?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의 혼란을 아시고, 그들에게 바른 답을 위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 (눅 5:23-25)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눅8:10)합니다.

그리고 또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 7:49). 헤롯까지도 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눈이 감겨 있습니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눅 9:9). 모두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6:9) 눈 뜬 장님들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환호합니다. 그러자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who is this)?” (마21:10)합니다. 그러나 그 때도 이가 누구인지 바르게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대답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이 틀린 대답은 앞으로 닥칠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암울한 비극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 땅의 사역을 통하여 던진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 복음서도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님을 보며“이가 누구이기에”(Who is this?) (마4:41) 라고 묻습니다. 요한의 복음서도 여러가지 놀라운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고, 혼동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who is this)?”(요12:34)라고 묻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궁금하면서도 바른 대답을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 18:13, 눅9:18).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8:14). 그러자 예수님은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 18:16, 눅9:20). 예수님께서 이 땅에 믿는 사람들에게서 듣고자 하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하기 위하여 3년을 제자들과 함께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누가복음 5:21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자신들이 확실한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그들의 질문, “이가 누구냐?”는 정말 그들이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질문,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는 질문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분명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십니다 (눅5:24). 그러나 그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은 하지만, 예수님이 듣고자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허망하여지고, 어두워져서 미련하게된 마음은”(롬1:21-22)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마14:61). 이에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내가 그니라 (I am)”(마 14:62).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유로 죽음을 선고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마8:16). 예수님은 여기서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8-19).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고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약속받은 것이고, 천국의 열쇠를 손에 죈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가 누구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January 6, 2024.SaturDevo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의 모든 단어, 모든 문장이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어? 무슨 이런 말이 있어? 이건 틀린 말이네’하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최고를 권위를 갖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성경을 고치거나 변경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7-19).

그런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제일 먼저 거부 반응을 보이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하십니다’, 라고 하면, 성경에 그렇게 씌여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다 보면, 끝없는 논쟁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때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슬그머니 건너뛰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며 감정적 접근으로 믿음의 공동체로 편입시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한동안 혼란스러워 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래도 감히 묻는 사람이 있다면, 크리스천은 그것에 대한 대답은 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답은 크게 세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두번째는 성경이 어떻게 씌여 졌느냐와 정경으로의 확정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성경의 전달 과정일 것입니다.

첫째, 성경 자체가 성경(Scripture is the words of God)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그 자체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주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딤후 3:16)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살전2:13)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5-1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30:5-6)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55:1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물론 내가 노르웨이의 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토록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이 결코 중요하지 않지 않습니다” (패트릭 몰리, MIM 창립자 겸 회장). 왜냐하면, 내가 정말 노르웨이 왕이라면 나의 주장은 굉장이 중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성경이 어떻게 씌여졌고, 어떻게 정경으로 확정되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너무 분명히 모두가 알고 있는 얘기지만 반복합니다. 성경은 40여명의 저자가 1500여년에 걸쳐 쓴 66권의 책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서로 어떤 모순이 없고, 일관된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작가 모임이나, 그 저작을 지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관되게 씌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성에 의해 쓰여졌다고 뿐이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교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아름다운 진리의 성전을 형성합니다.

구약성경도 그리고 신약성경도 정경으로 결정된 말씀 이외에도 더 많은 말씀의 문서들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모든 문서들이 예배나 말씀연구에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중에 더 자주,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던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문서들은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며 자연스럽게 중요한 문서들이 남게 되었으며, 이들이 자연스럽게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결정됩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번 거치면서 하나님이 꼭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말씀들이 정경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정경이 결정되는 과정입니다. 구약은 2-3세기에 결정되었고, 신약은 그런 과정과 5-6번의 공의회를 거쳐 트렌트공의회에서 1563년에 결정되었습니다. 교회가 또는 공의회가 정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용 중인 정경을 인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약성경이 존재하게 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쓸 사람을 감독하신 하나님은 정경의 결정과정에도 분명히 역사하셨음을 믿는것입니다.

세번째는, 성경의 전달입니다. 최초에 성경은 동물가죽이나 양피지에 쓰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동물가죽과 양피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몇천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남아 있을 수 있는 동물가죽이나 양피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카피하여 새것으로 보존하고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카피하고 후대로 전달하였습니다. 성경을 카피하던 사람들이 서기관이라고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철저히 훌련받고, 통제받고 기도하며 성경을 카피하던 특별한 사람들로 유대 문서들을 그들을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카피하는 일은 아무리 조심하여도 분명히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카피하는 동안 실수로, 또는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원본과 틀리게 만들어 지곤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원본과 틀린것을 후대 성경학자들은 발견하여 variants(변형, 틀림) 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5000개의 옛날 원본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옛날 원본과 오늘날의 성경과 비교하여 틀린 부분을 발견했는데 그 수가 무려 150000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혹자는 원본 성경과 오늘날의 성경이 천양지차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많은 숫자의 variants라는 것은 단지 스펠링이 틀리는가 또는 전치사라든가, 관사같은 것이 틀린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in이라는 전치사를 쓴 원본에 비해 into라고 쓴다든가, Jesus Christ 대신 Jesus 나 Christ를 쓰고,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Mary라는 이름앞에 Virgin Mary라고 쓰는등의 variants입니다. 그 내용이 틀린부분도 몇 군데 있는데 극히 미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부분이 원본에는 없는데, 오늘날 성경에는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필사하던 사람들이 원래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생각되어 완성해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요한 복음 8:16절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원본에는 없는데 오늘날 성경에는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 내용이 예수님이 행하셨을 가능성이 많다고 인정하여 더해진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더해진 부분은 주석을 붙여 더해진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수천년을 두고 필사되어온 성경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틀리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으며, 하나님이 친히 보존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전달된 방식에 대한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이 커질수록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 믿음과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성경은 고대 책이지만, 그 진리는 수천 년 전에 처음 기록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관련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계시이기 때문에 그 원칙은 시대를 초월하며 우리 삶의 모든 질문과 필요에 대한 답을 줍니다.

“성경은 신학자들이 헤엄쳐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깊으나 너무 얕아서 어린 아이도 익사할 염려 없이 와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성 제롬). 성경은 하나님의 귀하고 거룩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진리와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초대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December 30, 2023. SaturDevo

성경의 마지막 초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은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에덴동산에서 하나 뿐이 없던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을때, 하나님은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뱀, 즉 사탄과 여자의 후손, 인간은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과 늙음과 죽음의 노예가 됩니다. 인간이 결코 떨쳐버리지 못하는 짐이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사탄을 이기고, 인간을 고통과 늙음과 죽음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구약의 성취입니다. 구약은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신 일에 대한 소식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초대하십니다. 성경은 여러가지 말로 우리를 구원으로의 초대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셨음을 믿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으라(엡2:8-9)는 초대입니다.

누가복음 14:15-24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우리에게 구원으로의 초대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고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모든 잔치가 준비되었을때, 미리 초청장을 보냈던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초청장을 받았던 사람들이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합니다. 그 얘기를 들은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눅14:24).

이 이야기에 두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초대장을 미리 받았던 사람과 초대 받지도 못하였다가 갑자기 잔치상을 받은 사람들. 미리 부터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기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린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어 영생의 잔치가 준비되고 완료되었는데, 그들은 참석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초대받지도 못했였다가 복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이방인, 세리와 한계인들입니다. 이제 잔치가 막 시작하려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한번 마지막 초대를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계 22:17).

여기서 성령은 물론 우리 중에 거하시는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말하고(요 14:26), 신부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신부되는 교회를 언급합니다(계21:9). 하나님과 교회가 마지막 순간에 초대받을 자격 없었고, 초대받지 못했던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사야서 55:6절이 기억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2023년의 에필로그를 생각하며 떠오른 말씀입니다. 한 해를 보내며 하나님의 은혜의 날, 구원을 날을 그냥 넘기지 않는 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