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과 그 아들들

사사기 9: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September 30, 2023. SaturDevo

기드온은 일당백을 상징하는 인물로 성경의 대표적 믿음의 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섯장을 할애하여 기드온과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사사시대에 인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혼동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내노라하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말년에 추한 모양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기드온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축복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기드온은 보통 이상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보통 사람보다 특출난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믿음도 없었던듯 합니다. 하나님을 만났을때, 그는 따지듯 묻습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사6:13). 불행을 당해 고난중에 있는 우리 중 어떤 사람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힘주시고 능을 주사 군사 삼백명으로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과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이 많은 낙타 군대를(사7:12) 쳐부수는 대승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거기까지가 하나님 손에 잡힌 기드온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도망가는 미디안의 왕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잡아온것 까지는 좋으나 이제 그 전투가 하나님의 전투인것을 잊고 자신의 전투가 됩니다. 자신의 수고를 선대하는데 실패한 (사 8:6,8) 동족인 숙곳과 브누엘을 가혹하게 대합니다(사8:16-17). 자신의 승리앞에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는 부탁에,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라며 겸손을 떠는듯했으나, 그들에게 금과 패물을 걷어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아닌 에봇을  음란하게 섬기게 잘못 인도하는가 하면, 70명을 아들을 둘 정도로 많은 아내와 첩를 두는 왕아닌 왕이 되는 기드온이 됩니다.

기드온이 죽자 첩의 아들, 아비멜렉은 발 빠르게 승계전투를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죽기전에 삶이 실제적인 왕이었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8:18과 8:21의 “as you are, so were they”는 9장의 그의 아들들을 기드온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그 아비가 어떻함 같이 그 아들들도 그러하니라 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인 자기 어머니의 고향 세겜 사람을 부추겨 이방신전의 돈을 얻어 비류들을 사서 기드온의 아들들 모두를 한 바위위에서 죽입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를 이어 공공연히 그를 왕으로 삼습니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은 불행히도 하나님이 세운 왕이 아니라, 사람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그러자 간신이 죽음에서 살아남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해 축복을 선포하라고(신11:29) 하신,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사9:19)이 아니면,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왕으로 삼았던 세겜사람들과 왕이 된 아비멜렉은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사9:23-55). 기드온과 숙곳과 브누엘의 악몽이 재현된 것입니다(사 8:6-18).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심의 능력을 주시어 미디안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시지만 그 후, 기드온은 하나님을 진실하고 의롭게 대하는일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그 아비의 어떻함은 그 아들들에게 더큰 죄악으로 유전됩니다.

미디안의 핍박에 빠져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신 천사를 보내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죄에 빠져있는 신약의 백성들에게는 그 아들을  보내 주시어 세상 죄에서 구원하시고 새 삶을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요 3:16).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요일5:5).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롬 8:17). 병고치는 은사를 주시고, 축복하는 은사를 주시고, 사랑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고전 12).  새로운 삶에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기드온의 교훈을 새겨야 합니다. 이 축복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겸손하게 의롭고 진실하게 대하며 나누며 살아갈때, 배가되는 축복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이 자기것이나 되는양, 기드온처럼, 왕이되고, 그 축복을 돈으로 바꿔 자신의 정욕을 추구할때, 추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가 됩니다 (유1:4). †

무시할 만한 죄악

사사기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September 23, 2023. SaturDevo

세탁기 같은 전자 기기를 사면, 항상 따라오는 것이 작은 사용법 책자입니다. 그러나 그 책자가 빼곡히 영어로 들어 차 있고 읽어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충 조립해서 쓰면 그런 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기기의 사용법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고 아무데나 던져 놓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1-2년 쓰다보면 어느순간 덜커덕하고 고장이 납니다. 그러면 그 때서야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기억할 수도 없는 그 사용법 책자를 뒤져 읽어 보며 무슨 일인가 조사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에게 약속한 대로(창22:17), 이스라엘 백성이 에굽에서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종이 되어 고통 받고 있을때, 그들을 종된 땅에서 구원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면서 하신 한가지 명령이 그땅 주민을 그 땅에서 온전히 몰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7:2-5, 20:16-18). 왜요?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랍니다 (신9:4-5). 그들의 죄악으로 그 땅이 더러워 졌기 때문이랍니다 (레18:25).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보호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신 12:29-32).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게 하여 몇번의 큰 전투를 통하여 그 땅을 제압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곳에는 이스라엘을 대항을 세력이 없게 됩니다. 그후 모든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여 줍니다. 각지파는 그들에게 분배된 땅에서 그 땅의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죽이고, 그들의 신당을 철저히 파괴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1장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슴을 적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진을 막을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19절부터 끝절 36절은 “쫓아내지 못하고”를 8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8지파가 그들을 완전히내 쫓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 성경에는 “쫓아내지 못하고”라고 나와 있지만, 영어성경(ESV)은 “did not drive out”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쫓아내지 못한’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것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다고(사1:27)하고 있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들 소견에 옳은 일을 한 것입니다(사17:6, 21:25). 세탁기를 사서 매뉴얼을 읽고 매뉴얼 대로 사용하지 않고, 매뉴얼을 무시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사용합니다. 기계가 새것일때는 그런대로 사용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때가 되면 고장날 소지가 다분합니다. 여호수아가 앞장 섰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였기에 그들을 막을 세력이 없었고, 그래서 가나안의 세력은 형편없었지만, 마냥 그럴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사2:1-2). 모든 일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어 일어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성실하게 대한 이스라엘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는 섬찟합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사2:3).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기에서 격어야 만 하는 파란 만장한 우여곡절을 예고합니다.

이천 오백여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시할 만한 죄악’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어 죄를 이기시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약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어 영생을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것을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안에서 우리에게는 아무리 큰 죄도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 받는 일에도 우리의 얕은 생각이 들어갑니다. 작은 죄는 용서받지 않아도 될것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작은 죄를 무시합니다. ‘이런 죄쯤이야 예수님앞에 내 놓지 않아도 내가 해결할 수 있어’하는 작은 죄는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한발은 든든히 예수안에 들여놓고 있지만 다른 한발로는 세상의 가장자리 금을 살짝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도 자랍니다(약1:15).

무시할 만한 작은 죄악이 우리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마음속에 숨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속에 있으면 자라게 됩니다. 크든 작든 죄는 음지에서 자랍니다. 밝은 해볕에 드러날때 사라집니다. 마음속에 숨겨두면 자라지만, 예수님 앞에 내놓으면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 하나가 되었던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욕심이 그도 모르게 자라나 그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나의 몫

여호수아 18: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September 16, 2023. SaturDevo

호부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을 일컬어 쓰는 말입니다. 요즘 많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도, 제 몫을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만 바라보며 갈등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습니다. 이런때 떠오르는 단어이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보면, 또한 생각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 우리는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라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종살이 하며 잘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출 3:8)고 모세를 통하여 끌고 나왔으면, 끝까지 책임 져야지,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느냐, 왜 이방신을 섬기느냐 따지면서 진노하고 사막을 끌고 다니셨을까요? 복음으로 꼬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천국까지 데려가셔야지, 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은 하실까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전쟁을 했으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주어야지 왜 아직 땅이 없는 일곱 부족에게 왜 땅을 점령하러 가지 않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수18:3)?

여기서 우리는 몫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의 몫이 있고, 자식의 몫이 있으며, 모세의 몫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의 몫이있으며, 여호수아의 몫이 있고, 각 지파의 몫이 있을 것입니다. 몫은 책임의 몫도 있고, 축복의 몫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부모의 몫이고, 어디까지가 자식의 몫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몫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을 믿는 자의 몫일까요?

“물고기를 잡아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낚시질 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 일생을 먹고 산다”는 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로봇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관계하시기를 원하시지, 그들을 컨트롤 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 일등 백성으로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우수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고,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약속(창 12:1-3)을 지키십니다.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밤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에 모래 만큼 많은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고, 그들에게 땅을 주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십니다. 그들에게 낚시 도구을 주시고, 낚시질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것입니다. 그런대도, 그들은 낚시질 할 생각을 안하고, 물고기를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그들의 삶중에 순종한 사람을 대표하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지파,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는 이미 땅을 기업으로 받고 있습니다(수 14:6-15, 19:49-51). 그러나 모세가 요단 동쪽에 땅을 준 지파를 제외한 일곱지파가 아직 땅의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책망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약속을 모두 이루어 주셨지만,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낚시대와 낚시질을 하는 방법을 자식에게 가르쳐 주었는데도, 물고기를 달라고 부모와 갈등하는 자식이 호부견자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종한 사람을 대표하는 갈렙과 여호수아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일찌기 즐길 수 있었다 (수 14:8-9,14)는 것이 땅을 분배하는 여호수아의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갈수 있는 길을 내어 주셨고, 이 세상에서 그 천국을 경험하며 살 수있는 새 삶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약속된 축복을 우리에게 성취시켜 주시었습니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축복이 현실이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 땅에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일곱지파의 사람들 처럼  축복을 받고도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낚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쓸 생각은 안하고 물고기를 안 준다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몫을 챙기십시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September 9, 2023. SaturDevo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서, 모세에게 모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것 같은 임무를 주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빙빙 돌려 말하지만, 직설적으로 하자면,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Being)과 특성(Characteristic)’를 대표합니다. 모세의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고유명사(personal name)를 통하여 당시에 회자되던 여러 신들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려 하지 않았나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영어로 하면 “I am who I am”이며 직역하면 ‘나는 나다’ 입니다. 별 의미 없는 어찌보면 장난스런 이름 같기도 하여 신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경스럽게 인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하나님의 이름은 진정 하나님의 관한 진리를 나타내는 귀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 “I am”은 “אֶֽהְיֶ֖ה”입니다. 이 일인칭이 삼인칭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Yahweh(Jehovah)”로 명칭하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것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하여 “Yahweh”라고 쓰지만  “아도니아” 즉 주(the LORD)로 읽었습니다.

“I am who I am”이라는 말은 먼저 그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신)이 존재한다’는 말은 의미없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I am”은 일차적으로 존재를 언급하는 철학적 서술입니다. “I am who I am”이라는 하나님의 personal name은 모세 앞에 실제 나타나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Who I am’(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특성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증거하십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who I am)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사랑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34:6-7)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또한 그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I am”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단순한 존재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나타난 존재’의 의미도 포함합니다.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앞에, 또는 삶속에 나타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나의 이름은 ‘I am who I am’이라고 하셨을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의미가 모세에게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였을 것 입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에서 ‘빛이 있었고’는 There was light 입니다. 여기서 was는 am과 시제만 틀리지 같은 의미입니다. 빛이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지할 수 있도록 나타났다는 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속에 임재하신 구체적인 증거는 이어지는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 3:15)의 ‘여호와’는 I am who I am, 즉 ‘Jehovah’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I am 이었고, 아삭에게도 I am 이었고, 야곱에게도 I am 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예수님이 요한 복음의 일명 ‘7 “I am” statements’에서 사용하시는 이름이 됩니다(요한 복음). 이것을 히브리서 13:8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내신 그 하나님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같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실제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그 안에 모든것과 사람을 지으신 온 창조물의 바깥에 계신 분이지만 또한 그 창조물, 특히 사람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고, 이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함께 계시며(마28:20)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그 이름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수 있으며 우리의 삶과 영혼을 맡기고 구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

신명기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September 2, 2023. SaturDevo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말씀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신명기 23:18절 말씀이 그런 말씀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보며 먼저 두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이말씀은 구약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계명인데 신약의 믿는자로써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인가? 두번째는 이 말씀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 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창기(창녀)나 개같은 자(남창)이 번돈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것이니 헌금으로 적당하지 않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돈은 교회에서 헌금으로 받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 죄인과 가난한 자와 멸시 받고 천대받는 주변인들의 친구와 구원자로 이땅에 오신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눅15:1, 7:36-50).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더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롬 7:6, 고후3:6). 이런 신약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것 같은 구약의 많은 말씀, 율법들이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이 쓰이는 주장 중에 하나가,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Moral law)과 제사법(Ceremonial law), 시민법(Civic law)으로 나누어 도덕법은 신약에서도 지켜야 하는 법이지만, 시민법과 제사법은 구약시대에만 적용되던, 더 이상 실효성이 없는 법으로 지켜질 수 없고, 지킬필요가 없는 법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지켜도 된다고 하나님 말씀에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5:1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 났다고 하십니다(롬 7:6).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제사법과, 시민법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새 언약”을 받습니다(고전 11:25; 고후 3:6; 히 8:6-13; 9:15-18; 렘 31:31-34). 그래서 신약의 믿는 사람은 구약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키면 됩니다. 십계명은 어떤가요? 그것이 구약에만 언급되었다면, 안지켜도 되겠지만, 예수님도 십계명을 중요하게 말씀하십니다(마 19:18).

그러면, 제사법, 시민법은 왜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분이고, 무엇을 원하시는 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제사법을 말씀하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주신 의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3: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구약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그 말씀에 메일 필요는 없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좋게 여기시고, 무엇을 가증히 여기시는 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의 뜻은 바뀌지 않았음을 압니다.

우리가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런 율법, 말씀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에 맞게 행동하고 살아가며 그 분을 기쁘게 하고 영광돌리는 것이 그 말씀의 적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 당시에 창기와 개 같은 자는 이방 종교와 관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신전에서 봉사하던 그들은 다산다출을 기원하며 이방신 앞에서 행위를 하게되고, 그리고 얻게되는 소득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만의 거룩하지 않는 생활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하는 짓이었습니다(민 25:3). 즉 이것은 돈 자체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개인과 민족을 파멸로 인도하게하는 돈이기 때문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말씀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뜻이고 의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통하여 같은 뜻을 알게하십니다. 나라와 사회는 망하든 말든, 개인의 사욕만을 위하여 불의한 돈을 늘려가는 사람들은 오늘도 있습니다. 그들이 창기이고, 개 같은자 입니다. 그 돈으로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직분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증한 수단으로 번 돈인줄 알면서도 모른척 받아 챙기는 교회 지도자도 있습니다(고후 2:17). 삯군(Peddlers of God’s word) 입니다.

구약에 율법이 우리를 구속하지는 않지만, 그 말씀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수 있고, 교훈을 얻고,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성도와 제자

요한 복음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August 26, 2023. SaturDevo

사람들은 자기들의 손자, 손녀를 여러가지 별칭으로 불러 말하고는 합니다. 자신의 손자를 ‘장군’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손자가 장군처럼 용감하고 튼튼하게 훌륭하게 자라기를 고대하는 마음일 것이고,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귀여워하고 있다는 것의 표현일 것입니다. 한 아이를 이렇게 여러가지로 불러 말하는 것은 자신에 마음의 표현이며 듣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가 닿기를 원하는 상황에 따를 것입니다.

성경도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단어를 여러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 성도, 그리스도인(크리스찬), 사도,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 제자등 입니다. 어느 정도는 서로 관련된 말들이기에 서로 바꾸어 써도 별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으며 어느 경우에 쓰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씌인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이중에 많은 이들이 혼동 스러워 하는 용어가 성도와 제자라고 합니다. 성도와 제자는 같은가? 교회에서도 왜 언제는 성도라고 하고, 또 언제는 제자라고 하는가 같은 혼동입니다.

성도는 영어로 하면 Saint 입니다. ‘Holy, Consecrated’의 의미로 거룩한 사람, 또는 성결케된 사람을 일컽습니다. 성도의 일차적 의미의 사용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내신 사람으로 그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게 되면 천국으로 가게 될 사람임을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분명한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은 시편 97: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입니다. “성도(성인)”이라는 말은 나중에 왜곡되어서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거룩함의 상태를 의미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롬1:7)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로 인해 “성도”가 됩니다. 성도의 원래 기독교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지지자 또는 따르는자 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의미가 혼합되어 문맥과 교파에 따라 용법과 의미에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게됩니다.

한편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의미가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제자라는 말의 의미라기 보다는 고대와 중세에 사용되던 제자라는 말의 의미와 더 가깝습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과 제자가 아니라, 생활을 같이 하며 생각과 가치, 즉 Whole Being을 전수하는 제자를 언급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 뿐 아니라(마5:1, 눅 19:39), 세례요한도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제자들을 가졌었습니다(마 9:14, 마22:16). 예수님은 직접 제자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여기서 ‘거하다’라는 말이 욧점입니다. 그릭어로는 “μένω(menou)”이고 영어에서는 Continue to follow (NET), keep on obeying (CEV)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내 말”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성경 말씀입니다. 삶 중에 ‘말씀을 지속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도 언급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대로 살겠다(마 16:24)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복음)를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배움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위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한번에 모든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하나, 하나 배워 갑니다. 어떤때는 잘못 이해하기도 하고 배운것을 따라 하는데 실패하기도 합니다(요 12:16). 제자가 되는 것은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눅 22:32, 갈2:11-17). 제자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와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인 말씀을 우리 삶에 원칙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구별된, 성결케된’사람이란 의미로 천국에 상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 임에 촛점이 맞추어진 종말론적인 언어라면, 제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현재의 삶에 촛점이 맞추어진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진정한 제자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다가 예수님이 다시오실때 영생에 들어갈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알라모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August 19, 2023. SaturDevo

자동차로 미국 남부를 여행하며, 샌 앤토니오를 들러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유명한 구조물 알라모(The Alamo)를 보고 싶어서 였습니다. 성채 같기도 하고 요새 같기도 한 돌로 지어진 알라모의 사진을 그림 엽서에서 많이 보았을 뿐,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둘러 보며 알라모와 관련된 18세기 스페인 선교와 텍사스의 초기 역사에 대해 대충 대충 부분적으로 알던 사실이 꾀어 맞춰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알라모는 샌 앤토니오라는 선교사가 1718년 선교를 시작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교회와 돌담으로 둘러쳐진 선교센터 (후에 ‘알라모’로 불려집니다)가 마련되고, 선교사들과 개종한 원주민들의 거주지가 되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삶을 가르치며 70여년동안 그 주위에 몇몇 선교 공동체와 함께 성공적인 선교공동체로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다 1793년, 스페인 권력은 그곳의 다섯개의 선교 공동체를 세속화하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800년대 초부터 스페인 군대는 이들 선교 공동체의 빈 교회와 구조물들에 주둔하게 되고, 그곳이 Cottonwood trees grove (미류나무 숲)에 위치해 있었고, 또 그들 고향의 “Alamo de Parras”를 기념하며 그곳을 Alamo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Cottonwood 가 일종의 미류나무인데 봄에 꽃이 피고 지면 씨를 담은 솜뭉치같은 것이 사방으로 나르는데 그것이 꼭 목화 솜 같아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Alamo는 Cottonwood를 이르는 스페인 말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은 1820년대 초부터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민을 받아들입니다.  그후 십여년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이 텍사스로 이사오게 됩니다. 그러는중, 멕시코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1830년대 중반 텍사스혁명이 일어나며, 텍사스와 멕시코는 갈등하게 되고, 그런 와중에 1835년 알라모는 다시 텍사스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이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멕시코의 산타 안나(Santa Anna) 장군이 대군을 앞세우고 진군해 오자, “Remember the Alamo”의 구호를 쓴 지원 요청 편지를 미국 진지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지원을 받기도 전에 알라모는 12일 동안 멕시코군에 포위된 후 13일째 새벽 90분간의 공격으로 그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으며 다시 멕시코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해 4월 산타 앤나 장군은 샘 휴스톤 장군과의 전투에서 “Remember the Alamo”를 외치며 싸운 텍사스 혁명군이 승리하게 되고, 알라모는 다시 미국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라모는 미국 텍사스 혁명의 상징이자, 스페인 선교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어 있습니다.

1700년대 까지만 해도 스페인(멕시코)는 미국보다 땅도 넓은 강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모든것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알라모는 그 역할을 충실히 행한 장소이기에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안에 한 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이 시간의 이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할을 볼 줄알고, 그 역할에 충실할때, 알라모가 미국 텍사스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억되고 보존되듯이, 하나님의 역사안에서 사용되고 하나님께 기억될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쫓아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8).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참이시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됩니다. 그럴때 토기장이가 흙으로 토기르 빗듯,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역사에 꼭 필요하신 곳에 우리를 사용하실줄 믿습니다(롬9:21).†

나그네와 행인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August 12, 2023. SaturDevo

US Route 66 는 1920년대 미국 대륙에 건설이 시작 된 미국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카고 부터 샌트루이스 미조리주를 거쳐 칸사스, 오크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로스, 와 산타 마니카까지 이어지는 2천 마일의 길입니다. 1920, 30년대 대공황과 가뭄으로 삶이 어려워지자 이 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서부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John Stainbeck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이 당시 한 가난한 가족이 어려운 삶에 쫓겨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스타인벡은 이 길이 힘겨운 사람들을 서부로 불러들였다고 해서 The Mother Road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길위에서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났기에 피의 66번(Bloody 66)라고도 불렸다고도 합니다. 소망과 애환이 함께 흐른 길입니다. 시카고에서 시작되는 이 길이 샌트루이스로 이어지는데, 샌트루이스의 거대한 아치 조형물 “Gateway Arch”는 서부로 가는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세워 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US 66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본래의 길이 여기 저기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본래의 US 66과 비슷하게 달리고 있는 길이 현재 Interstates 44(44번 고속도로)라고 합니다. 44번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던 사람들의 삶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스타인벡의 <진주(The Pearl)>이라는  소설을 들으며 이길(I 44)을 따라 미조리의 스프링휠드로 또 오클라호마, 텍사스로 드라이브를 하였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약한자와 가난자의 애환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이 세상의 죄악 이었습니다. <진주>의 주인공, 기노(Kino)는  Baja California Sur의La Paz라는 ‘평화’라는 의미의 이름의 작은 어촌 마을에 아내와 어린아이와 함께 사는 가난하지만 선한 진주잡이 원주민입니다. 그가 지금으로 치면 로터리(Lottery)당첨이라고 할 만한 크고 아름다운 값나가는 진주를 발견하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악한 세상 사람들과의  갈등과 자신의 내면의 욕망 속에서 그의 삶이 점점 파멸의 길로 내 달리게 됩니다. 죄악된 세상속에서 선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진리를기노(Kino)와 유아나(Juana)의 삶을 통해 다시한번 새겨보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는 기노 같은 사람은 이 악한 세상속에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사람을 “나그네와 행인 같은”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악한 세상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삶이고(벧전2:11),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벧전2:12). 나그네와 행인은 그들이 언젠가 돌아갈 집, 본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빌3:20). 편안하고 익숙한 그들의 본향집을 떠나있는 그들에게는 그들이 떠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본향집을 떠나 있는지도 모르고 떠나 살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메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이고, 본향집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벧전 2:12). 복음의 메세지를 거부하며 진리와 정의를 멸시하며 세상적인 기쁨만을 추구하는 세상속에서 선한 행실과 도덕적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세지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 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쁨은 그들에게 시험이고 유혹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적인 유혹과 욕심에 대항하여 갈등하며 싸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벧전2:11). 나그네와 행인은 그들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놀라지 않고 그것에 적절히 대처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벧전 4:12).

이런 삶이 스타인벡이 그리고 있는 기노와 유아나의 삶이었습니다. 가난의 학대속에서 고통받던 중에 귀하고 아름답고 값나가는 진주를 발견하며 악한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뿐만 아니라, 자신의 화려한 삶을 바라는 욕심으로 세상과 원수가 되고, 자신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베드로 사도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에게 권면하던 내용과 정 반대의 삶이었습니다. 기노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모든 악의 원인이 되었던, 값비싼 진주를 포기하며,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는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지나는 길에 일어나는 일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과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길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감수하며 세상과 평화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고 복음의 길을 따라 더 좋은 삶이 보장된 본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죽은자와 복음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July 22, 2023. SaturDevo

베드로 전서를 읽다 보면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 두세군데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베드로전서 4:6으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죽은 후에 복음을 받아드릴 기회를 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는 틀린 해석임이 두가지 이유에서 분명합니다.

첫째는 이런 해석은 성경전체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16장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을때, 그들의 위치(Status)를 변경할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눅 16:26). 그리고 또,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죽음 후에 우리에게 당할 일은 오직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것 뿐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의 앞뒤 정황을 자세히 봄으로 ‘죽은 후의 구원받을 2nd chance’라는 개념이 맞지 않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6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기꺼이 고난을 받고 옳은 일을 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6절 말씀도 그 권고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 말씀이지 다른 주제를 끄집어 내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말씀을 해석하는것이 성경적으로 부합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전서 3:19과 비교될수 있는 말입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3:19). 여기거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에 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 봐, 여기도 있잖아…’하고 쾌재를 부를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영으로 노아시대에 가셔서 복음, 즉 구원을 선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3:20). 즉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의 영은 <실제는 노아 였을지도 모른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구원의 선포를 듣고도 방주에 타기를 거부하였기에 죽어서 영으로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아시대에 믿지 않아서 지옥에 있는 영들도, 그들이 살아있을때 예수님이 영으로 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그대로 4:6절로 옮겨집니다. 3장에서 물은 베드로 당시에는 구원의 표가 되는 세례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1). 4:6절의 첫 마디, “이를 위하여”는 그 전절,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v5)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할실 때에 사람들이 설명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나에게 복음이 전해 졌고, 나는 복음(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야 할것입니다. ‘나에게 복음이 전해 졌지만, 나는 복음을 안 믿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지기 위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함을 말씀하십니다.  

6절을 영어로 하면 “For this is the reason the gospel was preached even to those who are now dead”(NIV)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해 본다면, ‘이것(사람들이 사실대로 설명해야 하는 것) 이 복음이 지금 죽은 사람에게 까지도 선포되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so that they…”입니다. 우리말은 “이는”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게하려 함이라’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은 이것이 성경 전체 내용과 일치되며, 또 베드로전서 앞뒤의 문맥이 베드로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 일관됨을 알수 있습니다. 덧 붙이자면, 사람은 죽으면 다시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구원 받아야 하는 제일 좋은 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요.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영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날, 영생하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온전한 100% 사람으로 부활하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이 갖는 소망입니다.†

화룡점정

히브리서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July 15, 2023. SaturDevo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여 믿음을 말할때 많이 인용합니다. 믿음의 정의를 말하고, 믿음의 조상들의 본 받을 만한 행적들을 기록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따라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따라 주신 믿음을 잃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아는 소망을 갖고 확신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조상, 의인과 선지자들의 믿음을 설명하고, 어떻게 이들이 고난을 견뎌왔으며,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과 학대와 수치와 멸시를 받았음에도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않고 견디었는지 말하며, 이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말하는데,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v39)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엡2:8)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약속된 것(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믿는 사람 개개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피조물에 대한 온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master plan의 완성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40). 그 모든 믿음의 조상들의 온전한 구원을 완성 시킬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터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화룡점정입니다.

화룡점정, 양승요라는 사람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이름난 사실주의 화가였습니다. 그가 주문을 받아 안락사의 벽에 용을 두마리 그려넣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너무 웅장하고 진짜처럼 보여 모두 감탄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고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물으며, 용의 눈을 그려 넣으라고 말합니다. 양승요는 만일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벽을 부수고 승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독촉하자 그는 붓을 들어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천지개벽같은 천둥번개가 치며 용이 벽을 부수며 승천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때, 그 벽에는 한 마리의 눈동자가 없는 용의 그림뿐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 은“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6:9-10)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6:11)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8:21). 지금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완성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0절은 그것을 완성할 사람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한신 사람이 아직 모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구원을 채우는 날, 예수님은 나팔을 불며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택함받은 백성들을 모으며 재림하심(마24:31)으로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계획, 온 피조물이 고대하고 성령님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기다리시는 온전한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완성할 도구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