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변할 수 없는 일

히브리서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July 08, 2023. SaturDevo

사람들은 어떤 약속을 할때 꼭 지킬것을 다짐하며 새끼 손가락을 걸곤합니다. 그 유래야 어찌 되었건 그 행위는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의식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약속과 맹세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롬3:11). 그리고 그 말은 성경의 단언이 아닐지라도 온전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땅에 보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게 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요 3:16). 믿음으로 영원한 삶(구원)을 얻게 하신것입니다. 계산에 밟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방정식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케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영생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속에 내재해 있는 죄성은 종종 믿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혼란케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다시 한번 믿음과 소망과 용기를 북 돋우며 위로하고 있습니다(6장)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먼저 알게 하십니다(암3:7).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어떤 일을 먼저 알게 하시는 말씀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처벌하시며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예수님을 보내사 이 약속을 성취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어떻게 분명히 실현될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16-18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시며 맹세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히브리서 저자는 변할수 없는 두가지 things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변할 수 없는 근거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란 사실입니다(신32:4, 딛1:2). 사람들은 약속하고 손가락걸고, 자물쇠까지 채우고 맹세하나 그것은 이벤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그 약속은 없는것 보다 나을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히7:21)신다고 합니다. 더 쉽게 영어로는 “The Lord has sworn and will not change his mind”입니다.

“네 씨(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한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믿으며 읽는 우리에게 진실로 큰 위로가 아닐수 없습니다. †

치리 권력에 앞서는 하나님의 주권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July 01, 2023. SaturDevo

동서양을 무론하고 수많은 왕들은 자신들이 신의 아들임을 자처했고,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후에는 왕권신수설이 은연중에 이용되기도 했고, 절대왕정 시대에는 내놓고 주장하며 왕권과 국가 권력에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요즘도 어떤 크리스찬들에게 로마서 13:1-7의 말씀은 ‘위에 있는 권세’앞에서 그들이 기를 못 펴게하는 족쇠로 작용하는 듯한 상황을 보기도 합니다. 크리스찬으로써 나라의 부패에 대항하는 항의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목사에 대한 비판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행위가 아닌가 하여 영혼이 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최고의 권위을 갖습니다. 저도 복음주의를 믿는 사람으로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세상에 있는 악한 권세든, 선한 권세든, 좋은 목사든, 부패한 목사든 모두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때는 AD 57년(행20:2-3, 3차 전도 여행중 고린도에서)입니다. 10년전 AD49년에는 Chrestus(그리스도)에 대한 갈등으로 일어난 소요때문에 유대인들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로마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행 18:2). 그때 부터 로마교회는 이방인(로마인)들로만 이루어진 교회가 됩니다. 그러다가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황제(54-68)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며 로마교회로 다시 유대인들이 합류되며 내부적으로 긴장하는 가운데, 로마 화제가 일어나는 64년까지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큰 핍박없이 그러나 천대와 의혹의 눈초리를 받는 한계인으로 살게 됩니다. 로마서는 이런 중에 있는 로마 교회에 보내지는 편지입니다. 바울 그런 상황속에 있는 로마를 머리속에 그리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로마 권력과 평화하며 또 믿음을 지켜나갈지를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때, 바울의 충고는 세속 권세에 대한 크리스찬들의 일반적인 대응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찬들은 세상권세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권세에 불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부하는 것처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로써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권세를 주실때,  선을 베풀게 하기 위하여 주셨다(13:4)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는 충고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 권세가 악한 권세라면 크리스찬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선이건, 악이건)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데 그것에도 복종해야 하는가입니다. 이 해답을 로마서 13:1-7에서만 찾을려고 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권력은 친 그리스도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 권력을 악한 권력으로 보아 어떤 악한 “위에 있는 권세”에도 바울의 충고처럼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권력은 믿음의 삶을 금지하지는 않았음을 기억하며, 눈을 성경 전체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권세에 항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애굽에서 나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의 권세에 반하여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하였고(다니엘 3장), 다리오의 권세를 무시하고 하루 세번씩 기도했으며(단6), 예수님은 당시 권세였던 유대 지도자들을 꾸짖었으며(마23:5-7, 막 12:38-40; 눅 11:37-52; 20:45-47),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는 공회의 명령을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며 되 묻습니다. 이들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권세지만, 그 권세들이 악으로 치닫고, 부패했을때, 그 권세들에 복종하지 않던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히틀러에게 복종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행위에 옳다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목사에게 축복기도 받으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을 의롭다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세워진 권세이지만, 악한 권세에도 복종하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세위에 계신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선한 질서를 위해서 세상에 사역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권세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악으로 치우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말미암아 그들이 지금 우리위에 존재합니다. 악한 권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요구합니다.  어떤 권세가 예수님의 말씀에 역행한다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행 5:29)합니다. 바울 자신도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June 24, 2023. SaturDevo

성경을 읽다가 당황하게 되는 부분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Are you crazy?’하고 속으로 외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보다 조금 전에 있는 말씀,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10:21)에서도 움찔 했는데, 잘못 본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5-38)하십니다. 성경을 끝까지 읽어도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닌듯 합니다. 너무 거칠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 독선적입니다. 말씀하고자 하는 욧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태복음 10장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제자에게 전도를 내 보내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 학수 고대하던 메시야인줄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모든 주권이 그의 손에 있고, 이제 이스라엘이 그를 따르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로마로 부터의 자유와 번영과 자손들이 번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있을 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으로 궁극적으로 그들의 모든 기대가 실현될 것이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그들의 기대 이상임을 알지 못했고, 그 오심은 필연적으로 세상이 둘로 갈라질 수 뿐이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심의 오심의 실제를 알게하길 원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속에 하늘에 속한 영원한 진리, 참 지혜가 오신것 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세상적인 철학은 그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합니다. 그러나 승패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 복음이 가져올 세상의 분열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가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으로 들릴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검은 싸움을 하는 칼이 아닙니다. 희랍어로 “마카이란(μάχαιραν)”으로 어부가 고기를 가를때 사용하는 큰 칼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의 “검”과 같은 말입니다. 갈라서 분리하는 칼입니다. 여기서는 세상을 쪼개서 분리하여 가르는 도구를 말합니다. 세상을 쪼개고 분리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이세상 천지에 최고의 가치로써 오셨는데, 세상에는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입니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갈등할 것이라는 말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결국 세상은 둘로 갈릴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최고의 선,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이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가치를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족관계에 더 큰 가치를 두며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국가와 사회의 평화에 더 큰 우선권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철학에 더 높은 권위를 부여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진리보다 세상적인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영원한 최상의 진리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나눌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갈림은 가족의 관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욧점은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적용해야할 가르침입니다. †

위대한 경건의 비밀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June 17, 2023. SaturDevo

진실로 바울은 복음으로 꽁꽁 뭉쳐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렇지만,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도 틈만 나면 복음을 언급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도 교회 직분자들의 자격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번에도 복음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감독의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v2-7). 집사의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v8-13). 14-15절은 교회 리더로써 디모데에게 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지를 얘기합니다. 보통 편지라면 그것으로 족할 줄 생각되는데 사족인것 같은 경건의 비밀(v16)을 덧 붙입니다. 경건이면 경건이지, 경건에 무슨 비밀이 있고, 그것이 뭐가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인가, 바울은 왜 그 말을 여기에 덧붙였을까 궁금합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행함과 태도를 말합니다. 희랍어로는 유세비아(εὐσέβεια)이고, 영어로는 godliness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성경(특히 바울과 베드로의 언급)에서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골 1:26)난 사실을 말합니다. 이 비밀이란것은 하나님이 감추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모든 비밀이란 것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눈이 보지 못했던 사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경건’이란 것을 성도들은 깨닫고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경건의 비밀’하고 콜론(:) 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콜론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경건의 비밀이 무엇인지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이 문장은 시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 부분이 ‘당시에 불려지던 찬송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복음(예수님)을 찬양한다고 보기보다는, 복음과 성도의 삶을 함께 묶어 고백하는 찬송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복음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즉 경건은 복음안에 있는 성도의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사는 성도의 여섯가지 사실을 순서대로 말하고 있는데, 처음 세가지는 복음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우리중에 오신것과, 2.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사실, 그리고 3. 부활하셔서 천사들에게 보이신것을 노래(찬송)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세가지는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사실입니다.  4.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세계까지에 전파됩니다. 그리고 5. 많은 사람들이 믿어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6. 예수님의 부활후 승천이라기 보다, 재림하시어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시는 모습으로 보는 것입니다. 미래의 사건을 믿는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복음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경외하며 살고, 미래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복음)는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었습니다.

경건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경건에는 경건한 성품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경건의 뿌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사람) 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대속적 죽음과 부활)과 그의 재림의 약속을 믿으며 사는 삶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경건은 모양만 있는 경건이 됩니다. 당시에 떠돌던 말세의 풍조(딤전 4장)에 휩쓸리지 않고 바른 복음을 굳건히 잡고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경건한 성품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핵심입니다. 디모데후서 3:5에서 말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은 내용은 없이 그리스도인인 척만 하는 사람입니다.

나다니엘 호든의 <큰 바위 얼굴>에서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큰 바위 얼굴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허영에 잡힌 사람들은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의 사람인 척 하지만 결국 모두 가짜가 되고 맙니다. 경건은 바른 복음을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복음도 모르며 예수님의 성품도 무시하며 단지 예수님인 척만 하는 사람이 경건의 모양만 내는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딤전 1:20)고 이단 목사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바른 복음을 고백하는 경건의 비밀은(딤전 3:16) 교회의 리더와 봉사자의 자격을 얘기하는(딤전 3장) 중에 사족이 아니라, 3장 전체를 요약한 욧점이라고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꾼은 ‘경건의 비밀’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구원 : 사람으로는 불가능 한 것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June 10, 2023. SaturDevo

마태복음 19:16-26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어떤 좋은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함으로 이어지는 어떤 사람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구원(Salvation)입니다.

그런데 그 대화를 보면, 그 ‘구원’이 여러가지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다(v 16), 생명에 들어가다(v17), 천국에 들어가다(v2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v24), 구원을 얻다(v25)등… 다 같은 말입니다. 먼저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마 19:20, 22), 유대인이고(마19:20), 부자(마19:22) 였습니다. ‘얻다’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의미를 갖습니다. 영어로는 ‘have, get, obtain’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대가로) ‘가지다,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공로로 축복받는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 생각 자체로 벌써 영생을 얻기엔 실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하기 위하여 말씀합니다. 십계명중 사람에 관한 계명을 말하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v19)고 말씀합니다. 후에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들어 설파한 바에 따르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 부자 유대 청년은 자신은 그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며 뭐가 더 필요하냐고 말합니다. 어이가 없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을 자신이 깨우치게 하기 위해 한 마디를 더 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인간의 불가능과 하나님의 무한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이 지점에서 돌아섭니다.

예수님이 이 부자 청년에게 하고 하시는 말은 ‘네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하자, 제자들이 놀랍니다. 성경 여기 저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던 제자들도, 이번에는 바로 이해합니다. 부자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줄 알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v25).

맞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영생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구원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놀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였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답이 없습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Hot Spring 과 복음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June 03, 2023. SaturDevo

Hot Spring 은 땅속에서 솟는 뜨거운 물인 온천입니다. Hot Springs에 Hot spring은 물에 온도가 화씨 140도 이상으로 많은 미네랄를 함유하고 있어, 여러가지 질병 치료에 아주 유용한 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뜨거워서 천연적인 노천 목욕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Hot Springs에서는 1800년대 후반 부터 1900년도 초에  Bathhouse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곳에서는 물의 온도를 사람들이 목욕할수 있는 온도로 낮추어 온천 목욕을 할수 있도록 조정하여 주는 장치가 된 온천탕이 됩니다. 즉 사람들이 그 좋은 온천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중간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무거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때는 수건을 벗고, 백성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는 수건을 써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합니다(출 34:29-35).

에베소서는 “하나님 속에 감추어 졌던 비밀”(엡3:9)을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엡3:4) 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선포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놀랍고 커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의 몸된(골1:24) 교회에는 많은 지체가 있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너무 놀랍고, 너무 큰 은혜를 사람들이 쉽게 알고 믿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교회는 그 숨겨졌던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믿게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받는 길이 오늘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은혜을 입어 복된 삶을 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길 기도합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원수와 형제를 사랑 하시는 하나님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May 27, 2023. SaturDevo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busybodies)이 있다”(살후 3:1)는 말을 듣고 바울이 내린 처방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들어 참으로 써먹기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20-21의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왜 바울은 여기서는 이런 말을 하고 또 저기서는 저런 말도 할까요?’ 거기다가 예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바울이 사도행전 20:35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신 예수님 말씀도 설교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마태복음 5:38-42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말입니까?

원수에게도 그렇게 관대하신 분이 왜 어떤 곳에서는 그렇게 야박한(Cheap)한 말을 할까요? 이렇게 저렇게 말을 바꾸고 같다 붙이는 룬도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언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한테는 관대하기 한량없는 아버지가 아들한테는 엄한 도덕군자 입니다. 경찰과 트래픽 티켓을 받는 사람이 옥신각신 합니다. 어떤 날은 교회 다니라며 사랑과 용서를 외치더니 또 어떤 날은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외치드니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바울같습니다.

히브리서 12: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일하기 싫어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은 형제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성도입니다. 그들은 “속히 오시리라”한 말씀을 내일 모레쯤으로 생각하고 일하기를 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부유한 크리스찬들의 자선을 악용하며 남는 시간을 문제를 일으키는 일로 소일하는 교회안에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과 외인을 구별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다른 사람을 구별합니다. 경찰은 공사를 구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합니다. 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말씀은 엉키게 됩니다. 바울은 믿는다고 고백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행태에 대한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을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고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부끄러운 줄 알고 고치도록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3:15)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외인은 망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시는가?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얄팍한 관용을 베푸는 하나님이신가?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죄인들을 위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떡 하나 더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 예수님을 원수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것이 하나님의 외인을 위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건, 외인이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딤전2:4)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관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진리입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May 20, 2023. SaturDevo

시간과 공간은 채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는데도 남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남는 시간을 무엇인가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남았다고 생각되었던 그 시간이 헛된 일을 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여기 저기 어질러진것이 너무 많아 모두 치우고 정리된 공간을 마련하지만, 또 조금 있으면, 그 빈 공간들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게 됩니다. 필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잘 채우고 관리하지 않으면 허접한 것으로 메꿔지는 것이 시간이고 공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었다 (마12:43-45).

생각도 마찬가지 입니다. 빈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마음을 비우기 보다 빈 마음을 지키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빈마음은 결국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어떤 생각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악한지라(막7:21-22), 좋은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이 먼저 그 빈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 16:32)고 합니다.

삶을 좌우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쓰레기같은 삶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미국 금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당신이다 (You are not what you think you are, but what you think, you are).”

모든 행동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없이 하는 어떤 행동을 했다고 말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그런 생각으로 이미 차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잠언 23:7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합니다. 열두명의 정탐꾼은 가나안땅을 같이 경험하고 같은 것을 보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탐꾼들은 크고 강한 거주민과 견고한 성읍을 생각하며 패배와 공포와 절망을 말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승리와 감사를 말합니다 (민13,14장). 생각은 항상 행동에 앞 서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 선한 생각,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생각들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채워지듯, 마음도 채워지고야 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가치있는 생각으로, 그리고 목적있는 생각으로 먼저 채우지 않으면, 허접한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채워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생각대로 되어갑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하루 중 의도적인 생각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하루 생각은 주변 환경의 필요에 따라 생각하게 됩니다. 해야될 일, 뉴스, 직장에서 맡겨진 일, 만난 사람과의 대화, TV와 인터넷에 접속하고 반응하는 생각, 운전하며 보이는것, 먹는 것 자는 것이 하루 생각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생각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삶만 쫓아갈때, 우리는 세상에 의해 만들어 지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만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번 정도는 환경에 끌려가는 생각이 아니라, 의도적이며 의식적으로 자신을 만드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잠16:20)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 4:8)고 바울은 권고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2:7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해 보는것은 생명을 얻는 더 좋은 생각입니다.†

변화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May 13, 2023. SaturDevo

봄과 여름의 구별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아내와 산책을 하며 새순이 나오는것을 발견하고 ‘봄이 되나봐!’하며 신기해 하지만 어느날 몰아치는 눈보라는 ‘아직 멀었어’하고 한숨짓게 합니다. 그러기를 여나무번은 해야 한쪽 구석에서 숨어 핀 꽃 한송이를 발견하게 되고, 안심하게 되지만 시카고의 날씨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4월이 되어도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한두번은 쏟아지는 진통을 격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날 날씨가 화창하여 걸으러 나갔는데 봄은 어디로 가고 여름이 되어있습니다. 새싹인 줄 만 알았던 움들이 어느새 자라 숲과 나무들을 푸르름으로 주위를 꽉 채우며 풍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늘로 찾아들게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날씨와 씨름만 하는줄 알았는데 ‘우와, 여름이 되었네’하며 감탄하게 됩니다. 실존입니다. 내 눈으로, 피부로 확인하는 순간이 봄과 여름을 구별합니다.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놀라게 변한것을 보며 보통 하는 말입니다. 항상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까 놀랄만큼 긍정적으로 변한 것을 봅니다.나에게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 숲과 나무는 얄굳은 날씨와 싸우며 매일 매일 변화되어 왔씀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변한 듯한 경치는 문득 내 눈을 놀라게 합니다. 내 눈에 나무가 직면하며 견뎌왔던 고난과 노력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변한 모습만 들어와서 나를 놀라게 합니다. ‘괄목상대’라는 고사의 주인공 여몽의 변화도 그냥 시간이 지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여몽이 들인 노력과 투지의 결과가 사람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변화가 마술은 아닙니다. 나무와 숲의 변화처럼 사람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고민과 어려움과 고통의 감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적이며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믿습니다.

로마서 12:2도 변화(transformation)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복음적 변화를 말합니다. 복음적 변화의 특징은 자신이 변하는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잘못쓰지 않았나 다시 봅니다. ‘너희는 변하라’ 하는 대신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변화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곳에서 갈등하며 노력해야 하는 수고가 있는 것처럼, 변화를 받는것에도 변화를 주기 위해서 변화를 보상하기 위한 댓가를 지불하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말이 조금 애매합니다만, 영어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be 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음으로 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대신 치르신 고난과 죽음과 부활, (복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2:5-9). 자연과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자라고 변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우리의 노력으로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변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복음의 비밀”(엡6:19)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을 거스르지 않는 마법입니다.

사람이 변화를 받을 수 있는데,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치른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변화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리석은 자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두려워 하는 자에서 담대한 자로, 가난한 자에서 부한 자로, 미워하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 투덜대는 자에서 만족자 자로, 세상에 속한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를 위하여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안에 있으면 변화가 주어진다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변화는 이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변화는 단순한 변화(change)가 아니라 변화(transform)입니다. 더 좋은 방향으로, 그리고 더 향상된 형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변화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노력으로 변화하는 여몽의 위상에 변화도 사람을 놀라게 할진대,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변하는 변화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과 천사도 놀라게 할 줄을 확신합니다. 변화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오십시요. 복음을 믿으십시요. †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May 6, 2023. SaturDevo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은 특정 장소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관습에 적응하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 월남인 영어 선생이 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면 태국학생들은 제때에 숙제를 제출하는 사람이 몇 안되었습니다. 그 선생은 숙제를 내 줄때 마다 제출 날짜를 맞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하루 늦을때 마다 1점씩 감점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늦게 제출하면서도 감점을 피하기 위하여 핑계를 댔습니다. 선생은 어떻게든 이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늦게 제출하는 학생들에게 핑계에 상관없이 규칙에 따라 감점을 하였습니다. 항의 하는 학생에게 그는 “I don’t care”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선생의 작전은 성공이었습니다. 늦게 제출하는 학생들이 더 이상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선생은 코스가 끝날 때 자신의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 결과를 받고 실망합니다. 그들의 평가는 그가 무엇을 가르쳤느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대신 그가 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무자비하게 면전에서 그들을 거부 했으며, 그가 태국의 특정 교사 윤리 강령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국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 사도 바울도 때와 장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복음전파에 적용하며 걸림이 없이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은 그가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우나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 목표(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위하여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써 로마법외에는 무엇으로 부터도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써 하늘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하늘의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한 사도 바울의 열정을 봅니다.

그는 유대인 이었을 지라도 유대 율법에 얽메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그는 율법없는 이방인들처럼, 율법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율법없는 이방인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는 약한자들 처럼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약한 사람과 함께하며 그들을 구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습니다(고후 11:22, 갈 1:13, 빌3:5). 그리고 그는 유대인으로 유대의 유산을 가치있게 여겼습니다(롬9:3-5).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가치있게 여기고 지켰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계명과 약속이 성취된 것을 알았습니다(엡2:14-15). 그래서 그 계명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직 모르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때 율법에 매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고전 19:20)

그는 이방인과 다르게 하나님으로 부터 율법과 약속을 받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과 함께 있어 복음을 나누어야할때, 율법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 처럼 행동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고전 19:21).

바울은 약한자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12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는 빈약을 뛰어넘은 진정 풍요한 자였습니다.  지식과 믿음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지식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할때, 그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 낮은 사람, 믿음없는 사람의 눈 높이 에서 행동합니다(고전 19:22). 젠체(snobbery)를 좋아하는 몇몇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말로 충고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월남인 영어 선생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는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특정한 장소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순적히 그들을 얻기위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에 참여”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지혜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는 은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