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November 20, 2021. SaturDevo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잠언의 주석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련, 빈곤, 부, 정의, 혀, 세속, 기도와 같은 믿는 사람들의 수많은 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심오한 조언을 주고있습니다. 구구 절절이 공감이 가는 말이고, 외우고 싶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 보석같은 말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는 잠간 잊어먹고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단지 또 하나의 잠언이며 그 잠언을 풀이해놓은 글이라면, 야고보는 무엇하러 이런 편지를 썼을까요?

야고보서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면, 야고보서는 믿음대로 사는 행함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이 책을 썼을때는 사도바울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은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에 야고보서가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나타날수 뿐이 없고, 행함은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라는 말씀은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믿음과 행함’의 뗄래 뗄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2). 실용주의자다운 결론입니다. 이들 행함을 여러가지로 설명합니다: 시련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1:2–4, 12; 5:7–12), 기도(1:5–8; 5:13–18), 말의 제어(1:19–20; 3:1–12; 4:11–12), 차별하지 말것 (2:1-13), 하늘로 부터 난 지혜의 사용 (3:13-18), 허탄한 생각에 대한 경고(413-5:6) 등. 이 모든 권고의 핵심은 오늘 말씀 4:5-6입니다.

야고보서의 총108절가운데 59개가 명령문으로 되어있는데, 이 모든 말씀이 야고보의 말 이라기 보다는 구약의 율법의 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2:8)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중에 누가 율법중 하나도 범지 않고 온전한 율법을 지킬수 있는 사람이(2:10) 있으며, 우리중에 누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식을 드리는 행위를 믿음으로 증명 할수 있는 사람이(2:21) 있겠습니까? 우리중에 누가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3:2) 될수 있습니까?  이렇게, 야고보는 사람이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가르침과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 사이에서 긴장으로 갈등하게 됩니다. 하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결국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며 우리가 실패할 때 비난하려는 훈수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눈을 돌릴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복음이라든가 십자가, 부활이나 대속같은 말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언뜻 언뜻 복음적 의도를 엿볼수 있을 뿐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우리의 죄성을 어찌할수 없음을 야고보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우리의 갈등속에서 은혜가 어떻게 승리하는지 언급합니다. 여기서 ‘일렀으되’는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모든 성경을 의미합니다 (사54:7,8, 잠 3:34, 마23:12, 벧전5:5). 이것이 야고보에 따른 복음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이 편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복음을 넘는 성화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는 형제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옷입은 사람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에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해 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주시지만, 믿는 사람도 아직은 죄성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용서 받은 죄인이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고 합니다 (엡2:8, 벧전 1:5, 롬1:17). 야고보 장로에게 ‘용서받은 죄인’이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수 있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생각과 힘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야고보가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갈때,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화의 복음’입니다.  “주 앞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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