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길을 가는 사람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January 8, 2022. SaturDevo

2021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즐겨 읽은 구절은, YouVersion에 따르면,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었답니다. 2020년는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었다고 합니다. 2020년은  Covid 19이라는 약도 없고 백신도 없던 새로운 바이러스의 급속한 전파로 관공소와 비지니스가 문을 닫는 상황에 사회적 불안 심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며 위로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말씀에 눈을 돌린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리고, 2021년을 지나며 사람들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삶이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 상황에서 사람들의 인식은 두려움(사 41:10)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인 의와 진리 안에서 소망(마6:33)을 찾는 여정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그러면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라고 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1:14). 당시 최고의 부를 누리며 인생을 즐긴 솔로몬이 전도서의 서두에서 하는 말입니다.  솔로몬 보다 훨씬더 진보된 부와 사치를 누리며 하늘 높은줄 모르던 21세기 현대인들도 팬데믹을 지나며 이 말씀을 기억한것 같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듯, 과학과 의학이 죽음도 고칠줄 알았던 현대인들이 손을 쓸수 없었던 COVID 팬데믹에 막히자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모든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으니,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전5:14) 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소망의 원천이십니다 (롬11:36, 대상 29:12). 소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말씀(요1:1)이신 예수그리스도(요1:14)로 우리 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두려움, 죄의식, 분노, 물질주의, 사회적 인정(approval) 같은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뛰어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모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앞에 주어진 문제들을 풀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달려가고 있는 길이 과연 바른 길인지 새해를 맞는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길이라는 말은 로버트 후러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나게 합니다. 시인은 풀이 더 많고 발자취가 적은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가지 않은 다른길은 다음날을 위해 남겨 놓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길에 연해 끝이 없어서 훗날 가야겠다고 남겨놓은 그길을 결국 가보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그가 인정할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모든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우선 순위(Priority)에 놓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든것은 달라지게 됩니다. 감사하고 고무적인 소식은 1억 3천 만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바른길, 의미있고 가치있는 길을 찾으며 성경 말씀 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YouVesion의 보고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는 또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발짝을 뗄때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합니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거짓과 진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어려운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확인하고 배워야하고, 분별하고 결정하여야 할 것들, 유혹인지 기회인지 분명하지 않은것들이 너무 많이 우리의 길에 널려있습니다. 아차 잘못하면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 되십니다. 바른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길입니다. 진리의 길이며, 의의 길이고(시 23:3), 생명의 길이고, 형통한 길, 영원한 길(시 139:24)입니다. 시편 97:11은,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합니다. 등대불이 밤배를 인도하듯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흑암 중에 빛”(시 112:4)으로써 바른 길을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방향을 잡아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되는 2022년을 살아 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시119:11). 하루 한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수 있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무슨 일을 만날때 제일 먼저 하나님과 상의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당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요한 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January 1, 2022. SaturDevo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일에 대하여 열번 생각해 줄 때, 나 자신은 나의 일에 대하여 백번도 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일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속속들이 제일 잘 알며, 자신의 유익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사람은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 새해를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세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1.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십니다.
  2. 당신이 당신을 아는것 보다 당신을 더 잘 아십니다.
  3. 당신이 당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어야할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또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16).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되시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겸손이시고 (빌2:6-8),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헌신의 사랑입니다(롬5:8).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목숨을 내어 주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건 상관없이, 현재 어떤 사람이건 간에 당신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롬 5:20).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자신의 자식이라고 하며 아끼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축복하시고, 임무를 주시고, 먹을것을 주시고 ,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7-31). 사람이 그림 하나, 책한권 써놓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신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을 안 사랑하실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을 죽음에 내어 주실 만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두번째, 당신이 하나님을 믿어야할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을 당신이 당신을 아는것 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Johari window model 이란것이 있습니다.  ‘조하리 윈도우 모델’은 여러 분야에서 응용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가 자신을 아는것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나도 나를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는 부분(Unknown)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공정하게 본다고 해도 사람의 눈으로는 사람의  ¾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부분까지 나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은 이것을 고백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나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나의 속속들이를 알고 계시고, 나의 말하는것 뿐만아니라, 나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나의 장점도 알고 계시지만 나의 단점도 알고 계시고, 내가 숨기고 싶어하는것도 알고 계시고, 내가 남몰래 지은 죄도 알고 계시고, 내가 기억도 못하는 과거도 알고 계십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나의 어머니 뱃속에서 지음받을 때의 일도 알고 계시고, 내가 죽은 후의 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앞에서 이렇게 모든것이 벗겨진 상태라면,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되지만, 진실은 정 반대입니다. The meaning of Marriage, 의 저자 Timothy Keller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비록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도, 사랑 받는것은 위로가 되고 힘은 되지만 피상적이다. 그러나, 나를 충분히 알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나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것은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것 만큼이나 벅찬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본적도 없고, 찾은 적도 없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계속해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속을 모두 아는 사람은 당신에게서 돌아설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것을 아시고, 당신을 향한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또 사랑하시는 분입니다(렘29:11).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상의하고,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당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복음은 다른말로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초청이십니다.

릭 웨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삶의 목적은 당신 자신의 개인적 성취, 마음의 평강이나 행복보다도 훨씬 더 높은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삶의 목적은 당신의 가족, 직업, 또는 당신의 열정적인 꿈이나 야망보다도 훨씬 더 크고, 높고 위대합니다. 왜 당신이 이땅위에 놓여졌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놓여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모든것을 알고 계시며, 당신이 예수님 안에서 당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익한 삶을 살아 가도록,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마10:29-31). 당신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복음이 당신에게 들려지고 있는 이 순간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뜻입니다.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당신 자신이 자신을 아는것 보다 당신을 더 잘 알고, 당신의 유익에 대해 당신보다 더 좋은 결정을 내려 주고 당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84:12). 이 사실이 믿는 자로써 책임지고 자신있게 권하는 기독교의 진리이며 ‘당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될 이유’입니다.†

크리스마스, 왜 기뻐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December 25, 2021. SaturDevo

매해 크리스마스만 되면 온 세상이 들썩거립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신날이란 것은 압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추리를 만들고, 집을 색깔 전구로 치장하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주고, 자선을 베풀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생일을 기뻐하고 축하할까요? 무슨 상관이 있길래?

예수님 탄생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동정녀 탄생’일 것입니다(마 1:23, 사7:14). 어떤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신,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건(요3:16)으로 설명하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에 촛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감사와 찬양이라는 감정적 사랑을 넘는 하나님의 계획된 의지적 사랑인 복음의 첫번째 실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막1:1).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것입니다 (The gospel is all about Jesus Christ). 그리고 넓은 의미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히브리 약자로, TaNaK(Tora 모세오경, Nevi’im 선지서, Ketuvim 시문서), 즉 히브리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고 따르고 본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매일 읽고 교회에서 매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소개한다고 할때 (즉, 복음을 나누거나 또는, 전할때) 성경을 다 들려줄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다 읽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약하여 예수님을 소개하여야 합니다. 그 요약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입니다. 즉 이 다섯가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나신날이 12월 25일입니다’라는 말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을 통해 잉태”(마 1:18)케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동정녀 탄생의 교리적 중요성은 3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1.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100% 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신 예수님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3.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수 있는 죄없는 사람의 나심을 가능하게 합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수천년을 지내며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중에 한 사람도 죽음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분 예수그리스도가 그 죽음을 이기는데, 그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아담의 죄를 통하여 이세상에 들어온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라고 여자의 후손이 죄를 이길것이라고 약속 하신대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이 일을 성취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약속대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4:4-5).

예수님이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단번에 대속하실 분으로써, 100%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어야 하고, 또 죄가 없는 분이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건으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십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100%하나님이시며 100%사람이신 예수님이 가능한 이유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동정녀의 몸을 빌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다면 우리는 그를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남자와 여자를 통하여(모세나 사무엘이나 삼손처럼)  예수님을 보내셨다면,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데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가 잉태케 하신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100%하나님이시며 100%사람이 되시는 타당한 근거가 될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분 예수님 안에는 온전한 사람의 본성과 온전한 하나님의 본성이 함께하고(Hypostatic Union 위격적 결합)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100% 사람이시며 100%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이고 두째는 대속의 문제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예는 ‘원죄’ 라는 유전적인 죄성를 갖게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케 됨으로 아담의 후예로 부터 단절되게 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1:35). ‘거룩(Holy)’과 죄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원죄가 없는 죄짓기 전 아담과 같은 사람으로 태어 나십니다. 그러나 ‘100%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100%사람이며 100%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을 받을수 있었지만 한분 예수님안에 있는 신성은 결코 죄를 지을수 없었습니다(히 4:15). 죄는 하나님(거룩)과 공존 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죄 없으신 100%사람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피를 흘리십니다. 구약은 사람의 죄를 동물(양)이 대신 죽음으로 대속(죄을 대신 값는것)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대속은 효과는 1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매해 대 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양의 피를 뿌리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으나 죄는 없으신 사람으로써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게 되고 그 효력은 완전한 대속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칩니다.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중에 오심이 예수님의 나심, 동정녀 탄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태어나실때 하늘에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며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눅2:13-14)며 는 잔치가 있었지만, 이땅에서는 실제로그의 나심을 알고 기뻐하고 찬양한 사람들은 천사에게 소식을 들은 양치던 목자들 몇명과(눅2:20) 동방에서 온 박사셋만 그를 경배하였을(마2:11)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땅에는 ‘크리스마스’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전세계가 떠들썩 하지만,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왜 저들이 기뻐하야 하는줄도 모르면서 법썩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하실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00% 하나님), 모든 믿는 사람의 죄값를 대신 값아 주시는(대속) 죄없는 온전한 사람이시기(100%사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십니다. 기쁜 소식이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어려운 계시록 꼭 읽어야 합니까?

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December 18, 2021. SaturDevo

계시록은 성경중에서 가장 읽기 힘든 책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사실을 이론적이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비유적 상징적으로 쓴, 묵시록의 특성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한두번 통독하신 분이 계시록을 가만히 두세번 정독해 보신다면, 우리가 듣고 믿고 아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수있게 쓴 귀한 성경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습니다.

계시록은 교회가 참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폭로합니다. 한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다른 한쪽은 사탄과 그의 악한 동맹자들(악마와 인간) 사이의 우주적 갈등입니다. 이 갈등에서 어린 양 예수는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박해, 거짓 가르침, 물질적 풍요와 문화적 인식의 유혹 (그것은 죽어가는 용, 사탄의 몸부림과 같은 것입니다)을 통해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 교회의 시련과 시험의 배후에 있는 영적 실재를 드러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 승리의 확실성을 극적으로 확증함으로써 요한에게 주어진 이상은 교회에게 경고하며 어려움을 견디고 현 세계 질서의 더러운 유혹으로부터 순수함을 유지하도록 힘을 북돋우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전체적인 장르는 예언서입니다 (22:19). 성경의 다른 예언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의미 전달 방식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입니다. 영화의 효과처럼 환상의 퍼레이드로 펼쳐집니다. 더욱이 실제 인물과 사건이 묘사되는 방식은 사실적이지 않은 상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책의 제목은(1:1)은 묵시록 유형의 글이란것을 언급합니다. 요한은 매 장면에 이미지, 은유, 직유 및 암시와 같은 시의 형태을 사용합니다. 그런가하면, 시작과 끝은 서신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구성은 발달, 갈등, 진행 및 해결 이 포함되는 스토리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역사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그 사건과 결과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의 공개입니다.  또한 미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일 뿐만 아니라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기도 합니다(1:3, 22:7).

예수께서 요한에게 계시록을 쓰게하신 궁극적 이유는 위협적인 폭력(짐승), 기만적인 이단과 풍요(거짓 선지자, 창녀)의 형태로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의 간계에 저항하도록 그의 교회를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한 information을 우리에게 주신것은 그 인포메이션을 오늘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어려운일을 만날때라도 굳세게 믿음을 잃지 않게 하는 근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점은 인포메이션 그 자체가 아니라, 적용에 찍혀야 합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도 이 점에 중점을 두는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이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며 묵시적인 글이기 때문에 그 이해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고, 또 모두가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해석 방법이 옳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래 도형은 대환란전 전천년설의 도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 대환란 전, 천년왕국 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과 끝은 편지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1:1-8, 22:6-21).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말하고, 그의 분명한 경고와 약속을 언급합니다.

1-3장은 현실(1세기 당시)교회의 상황입니다. 4 – 9장까지는 현실 교회의 상황속에서 하늘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건데 현실 교회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한 세대로 변하고 믿음을 지키기가 힘들어 집니다 (말세의 증조, 마24).

10-11장: 앞으로 진행될 사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오시는 날 믿는 사람들과 믿음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합니다(살전 4:16-1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 들려올라가고(휴거) 그동안 이땅에서는 7년 대환란을 당합니다. 그리고 일곱번째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이땅으로 내려오시어 천년왕국의 통치자로 취임하시게 됩니다.

12 -18장: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우주적 갈등의 사건과 국면을 상호 보완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기 위해 땅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복음적인 또는 하늘 나라의 관점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땅에 복음(예수 그리스도)이 들어오고 세상의 모든 사탄의 세력과 싸움이 시작되고 또 결국 모두 진압됩니다.

19-20장: 하늘에서는 어린양(예수님)의 혼인잔치가 있게 되고 모든 믿는자들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년이 찼을때 갇혔던 사탄이 놓이고 이방 압제자를 상징하는 곡과 마곡과 싸우게 되나 다시 완전히 제압하고 그들을 영원한 벌로 처리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부활과 심판, 그리고 영원한 벌을 선고하여 불타는 유황 연못에 던집니다(고전 15:26).

21장: 믿는자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삶과 같은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창2).

정경(the canon)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완성을(재림) 언급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속히 (다시)오리라”(22:20)는 약속은 우리로 소망을 갖게하고, 믿음 생활을 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견뎌낼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시대를 통하여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할수 없는 환란은 (휴거를 통하여) 하나님이 피할수 있게 하십니다(고전10:13). 그리고 설사,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예수님이 오시면 살아서 믿는 사람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날수 있고(살전 4:16-17), 영생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진리의 책이며(22:17-18) 희망과 용기를 주는 축복의 책입니다.†

은혜가 죄를 지을수 있는 특권이 됩니까?

유다서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December 11, 2021. SaturDevo

이단과 정통의 시비는 기독교 초기부터 이제까지도 끊이지 않고 바른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는 우리 중에 존재하는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처음 인종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동양인 흑인 백인으로만 구별하던 때의 일입니다. “Thank God, Thank God, Praise God”을 연발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정말 열심히 믿는 사람이로구나’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엇인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찬인데, 당신은 종교가 무엇이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자기는 ‘알라신을 믿는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나님’하지만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는, 믿느냐 안 믿느냐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초대 교회의 유다(예수님을 배반하여 판 유다가 아니라, 예수님과 야고보의 형제이고 ‘유다서’를 쓴, 유다를 말합니다)도 이런 문제인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해 그의 서신서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가만히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즉 거짓 선생들, 즉 경건치 않은 사람과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 그리고 주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할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많은 배교자의 이미지와 행한 일들을 들어 비유하며, 그들과 같이 심판받을것이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 (벧후2:1) 이니,  너희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 고 말합니다.

유다의 주장은 1) 거짓 선생들이 존재한다(4절) 2) 그들의 가르침은 매혹적이나 위험하다(12-13절) 3) 그들은 분명히 정죄 받는다 (15절)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을 팔아 먹는 삯꾼 목자며(12절, 요12:12),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방탕한 삶을 정당화 시키는데 사용하며(롬6:1), 하나님의 영광을 업신여기고 비방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삶을 삽니다(8절). 예수 그리스도을 의지하는 대신, 근시안적인 이득과 정욕에 눈이 멀어 멸망의 길을 스스로 택한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교회)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부도덕한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신다’는 왜곡된 단편적인 사실입니다. 디도서 1:16절은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들의 부당한 행위에 근거는 유감스럽게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행위라고 책망합니다.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하며 은혜가 덮지 못한 죄가 없다는것을 천명합니다. 그러나 이 풍성한 은혜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죄를 지을수 있는 라이센스로 사용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교회는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사회의 압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침입하려는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관대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상쾌한 목소리를 내고있습니다. 진리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포틀랜드에 있는 어떤 장로교회가 교회 예배에 알라와 무슬림 관습을 포함시키기 시작했거나, 몰몬 토크쇼 진행자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묘사하여 전국의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4:16)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 싸우라는 부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할 것이 없는 영원한 구원의 완전한 진리입니다.

유다서의 마지막 두절은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축도 중에 하나로 꼽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은 영원한 진리인 복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십니다. 즉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할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요 19:30)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보호하시고,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사 흠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어, 마지막에는 담대하게 즐거움으로 하나님앞에 서게 하실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안믿느냐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유다서는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어떤 죄도 용서하시고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가 죄를 지어도 되는 우리의 권리는 되지 못합니다.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죄에 빠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권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길 권리입니다.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3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바른 믿음 테스트 해 보셨습니까?

요한1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December 4, 2021. SaturDevo

14세기에 과학자들은 이끼에서 얻은 색있는 유기 화합물의 혼합물인 리트머스(Litmus)가 산성 용액에서는 빨간색으로, 알칼리성 용액에서는 파란색으로 변하여 산-염기 구분약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6세기 후, 사람들은 리트머스 테스트를 비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것은 어떤 것의 진정한 성격을 확립하거나, 어떤 범주에 속되도록 하는 어떤 특징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종종 이것은 누군가 또는 어떤 것이 수용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예: 정치적 또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타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반세기 정도 지난후에 이 편지를 그가 살고 있던 에베소 주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냅니다. 당시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영지주의로 알고 있는 신비주의 사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던 사람들이 그 사상에 물들어 바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을뿐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서 그 사상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2:19). 이런 상황은 요한으로 하여금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하고 가르쳐야할 필요가 있게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편지는 소요리 문답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주제를 두세절 내지 길게는 네 다섯절내외에서 나열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의 주제를 한번으로 끝내지 않고, 몇 주제가 넘어간후 다시 그 주제를 언급하는 식으로  ‘순환적’ 또는 ‘음악의 교향악’ 처럼 정열하여 배치하고 있습니다. 주요 주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는 테스트,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믿음과 태도입니다. 다섯장의 그렇게 길지 않는 편지에서 요한은‘만일’이나 ‘누구든지’같은 진위를 가리는 단어를 53번이나 쓰면서 우리의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를 리트머스 테스트 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알아보는 테스트는 3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도덕테스트, 교리테스트, 사랑테스트입니다. 그리고 이 테스트들은 편지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도덕과 교리와 사랑이 엮여지며 참 복음으로 변화되는 통일된 삶에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덕 테스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는가? 교리테스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가? 그리고 사랑테스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가?

요한은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으로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이 기본이 되는 다양한 신념을 지정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선한 것으로 여겨졌고, 육신을 포함한 물질적인 세계는 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적 견해는 그러한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거부한 초대 교회 교부들의 작품, 콥트어 저술, 나그 함마디 도서관, 헤르메스 및 마니교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문학적 출처에 반영되어 있습니다.영지주의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사상으로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보고 영적인 것은 선한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도 악에 속한다고 보며 오직 영만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신자중에도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믿는자들 가운데서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첫번째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질 세계가 악하다고 믿으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했습니다. 즉, 그분의 참 인성을 부인했습니다(요일 4:1-3).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으로 “보여졌다”고 하고(Docetism),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에게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는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요한이 분리주의자들이 행한다고 비난하는 죄악된 행동(요일 3:6, 10)은 사람이 몸으로 하는 것은 사람의 영이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세계의 일부인 인간의 몸을 악으로 여겼기 때문에 몸을 가혹하게 다루는 금욕적인 행위를 택한 반면,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하는 것이 영적인 삶과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고 음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인성, 즉 육체를 가진 인간이란 사실을 부인하게 되면 대속이 문제가 됩니다. 성경은 단편만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가 진리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려면 성경전체와 일치해야 합니다. 이들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주장은 예수님은 100%사람인 동시에, 100% 하나님이라는 성경 전체의 주장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몸을 악한 것으로 여겨 악한 일에 내 맡기다 보면 성도의 삶이 구별될수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것도 또한 성경전체와 주장과 맞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필요로 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 답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게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마 24:5).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22).   그러면서 옳은 믿음을 테스트 할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를 줍니다.    

  1. 예수님은 100% 사람이고, 100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4:2) 
  2.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7-38).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2:5)
  3.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9-4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4:7).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5:4).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인 영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5:13).†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허다한 죄를 덮나?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November 27, 2021. SaturDevo

왠지 사랑과 제일 관계없을 것 같은 베드로인데,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사랑을 강조하기를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사랑’이라고 번역될수 있는  말이 헬라어(그리스어)에는 4가지 다른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어떻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였는지, 어떻게 예수님은 요한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그의 편지에서 믿는 형제들을 부르는 말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자들아 (아가페이토이)’하며 사랑이 넘칩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하며 간절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시아지역,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터어키입니다. 이들 지역에 살고 있던 1세기의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로 부터 나그네(exiles<NIV>, strangers<NASB>) 의 취급을 받고있었습니다(1:1). 네로황제의 통치아래 있으며 아직 국가적인 핍박은 받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에서 핍박을 받은것 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와 고통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보통 복음, 구원, 의나 대속같은 신학적 논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덧 붙이고 있는데 반해, 베드로의 편지는 믿음안에서 어떻게 승리할수 있는지를 말하는 신학적 주장과 충고가 댕기줄 처럼 엮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뗄레 뗄수 없이 엮인 그 두개의 주제는 거룩과 역경입니다. 베드로는어려운 사회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중요하지만 쉽게 잊혀질수 있는 진리로 격려하는 편지를 씁니다.

베드로는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라고합니다. 잔인한것 같은 말씀이 믿는 사람들에게 격려라기 보다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살아가면서 시험을 만날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통이 믿음에 신실함의 정도를 알수 있고 또 그 증거가 될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실체를 아는데 도움이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땅에서 복받고 잘사는 수단으로써 믿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기 보다 예수님을 요술 지팡이로 이해하는 변질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또한 이땅에서 축복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구별된 삶)과 고난(믿는 사람들의 고난) 사이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고난은 고난이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그의 뜻을 따라 사는 믿는 사람으로써 구별된  삶의 실체입니다. 악의 세력이 팽배한 사회속에서 살아갈때 그 갈등은 더 심할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 긴장이 조금 덜 해 질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는 자신이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을 들어 ‘서로 사랑하라,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거룩과 고난을 이야기 하며 왜 상관없는것 같은 사랑의 말씀을 더하였을까요?

죄를 덮는 사랑은 용서입니다.

죄를 덮는 사랑의 좋은 표본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볼수 있습니다 (창 50:15-21).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을 팔아 넘겼던 형제들은 애굽에 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이 두려워, 벌벌떠는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잠10:12). 그 용서는 형제들을 살렸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하는 뿌리가 됩니다. 베드로 자신 또한 자신의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마지막에 세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마26:75).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장면이 요한 복음 21절의 이야기 입니다. 용서 받은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 사람임을 압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 말씀(4:8)을 하며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죄를 덮는 사랑은 죄를 씻어줍니다.

죄를 ‘덮는다’는 말과 ‘감추어 준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죄를 덮어준다는 것은 죄지은 사람에게 회개할수 있는 기회를 주며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고전 13:4). 죄를 감추어 주는 것은 더 많은 죄를 조장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8:15-17은 죄를 씻어주는 사랑을 설명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새롭게 날수 있도록 돕는 사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20도 그것을 말합니다.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죄를 덮는 사랑은 아가페사랑입니다.

우리 중 누가 누구의 죄를 용서할수 있습니까(눅 5:21)?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랑을 준 쪽에서는 그 사랑의 양만큼이나 큰 희생을 의미합니다. 형제를 용서한 요셉은 어떤 고난을 치렀으며, 제자를 용서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한 예수님은 어떻한 고통을 치렀는지 압니다. 에로스 사랑을 하다가고 자빠지고 필리오 사랑을 하다가도 넘어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하는것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친구가 아니라,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롬5:8).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의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사랑은 우리 것을 가지고 누구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죄 (허다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적대감을 보이는 주변의 고난를 견뎌낼 믿음을 요구하고, 그 믿음은 구별된 삶을 증거합니다. 구별된 삶은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구합니다.

‘하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November 20, 2021. SaturDevo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잠언의 주석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련, 빈곤, 부, 정의, 혀, 세속, 기도와 같은 믿는 사람들의 수많은 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심오한 조언을 주고있습니다. 구구 절절이 공감이 가는 말이고, 외우고 싶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 보석같은 말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는 잠간 잊어먹고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단지 또 하나의 잠언이며 그 잠언을 풀이해놓은 글이라면, 야고보는 무엇하러 이런 편지를 썼을까요?

야고보서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면, 야고보서는 믿음대로 사는 행함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이 책을 썼을때는 사도바울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은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에 야고보서가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나타날수 뿐이 없고, 행함은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라는 말씀은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믿음과 행함’의 뗄래 뗄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2). 실용주의자다운 결론입니다. 이들 행함을 여러가지로 설명합니다: 시련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1:2–4, 12; 5:7–12), 기도(1:5–8; 5:13–18), 말의 제어(1:19–20; 3:1–12; 4:11–12), 차별하지 말것 (2:1-13), 하늘로 부터 난 지혜의 사용 (3:13-18), 허탄한 생각에 대한 경고(413-5:6) 등. 이 모든 권고의 핵심은 오늘 말씀 4:5-6입니다.

야고보서의 총108절가운데 59개가 명령문으로 되어있는데, 이 모든 말씀이 야고보의 말 이라기 보다는 구약의 율법의 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2:8)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중에 누가 율법중 하나도 범지 않고 온전한 율법을 지킬수 있는 사람이(2:10) 있으며, 우리중에 누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식을 드리는 행위를 믿음으로 증명 할수 있는 사람이(2:21) 있겠습니까? 우리중에 누가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3:2) 될수 있습니까?  이렇게, 야고보는 사람이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가르침과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 사이에서 긴장으로 갈등하게 됩니다. 하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결국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며 우리가 실패할 때 비난하려는 훈수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눈을 돌릴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복음이라든가 십자가, 부활이나 대속같은 말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언뜻 언뜻 복음적 의도를 엿볼수 있을 뿐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우리의 죄성을 어찌할수 없음을 야고보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우리의 갈등속에서 은혜가 어떻게 승리하는지 언급합니다. 여기서 ‘일렀으되’는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모든 성경을 의미합니다 (사54:7,8, 잠 3:34, 마23:12, 벧전5:5). 이것이 야고보에 따른 복음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이 편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복음을 넘는 성화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는 형제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옷입은 사람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에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해 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주시지만, 믿는 사람도 아직은 죄성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용서 받은 죄인이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고 합니다 (엡2:8, 벧전 1:5, 롬1:17). 야고보 장로에게 ‘용서받은 죄인’이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수 있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생각과 힘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야고보가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갈때,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화의 복음’입니다.  “주 앞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무엇인가?

스가랴 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November 13, 2021. SaturDevo

한때 시카고 이민교회들에게 성전 구입 붐이 있었습니다. 아직 자체 교회건물을 갖지 못한 교회는 교회건물을 사기 위해서 건축헌금을 걷었고, 다운페이를 준비한 교회는 론을 얻어 교회 건물을 구입해 놓고 건축헌금을 걷어 드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들은 입심세고 재밌는 부흥사들을 초대해 부흥회를 종종 내지 매해 열었고 그럴때 마다 부흥사들은 건축헌금을 하는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 따르는 일인지를 열변하였습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선지자는 포로이후의 선지자들입니다. 학개 선지서와  스가랴 선지서의 전반부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있고, 말라기 선지서는 성전 건축 후 헤이해져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지적하며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것과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증거합니다. 포로이후 선지서들을 이렇게 기억한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교회에 열심히 다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역사서에서 보다 이들 선지서에서는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학개 1:6, 11은 이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말하고 있고, 학1:14은 사기저하를, 슥8:10은 사회적 문제를 말라기는 제사장, 지도자들의 부패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여러가지 어려움과 싸우며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이민자들의 상황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상황에 말씀의 메세지는 분명한것 처럼 보입니다. 너희들에게 닥친 이런 어려움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학 2:19). 스가랴는 성전을 가진 백성과 지도자를 9번의 비전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말3:10). 이런 메세지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했을지는 분명합니다.

진실한 믿음은 사건(event)이 아니라 과정(process)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말씀을 사건과 상황에 적용시켜 해석할려고 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중심적 종교심리로 하나님을 조종하는 식으로 그 메세지를 왜곡시킬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그 왜곡된 메세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며 기복신앙을 외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이들 포로 이후 선지자들의 말씀은 성전을 지어야 하는 일회성 사건을 배경으로 읽기보다는 더 큰 배경인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또는 하나님의 인류을 향한 구원 계획같은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자신을 속이는 인간중심적 종교심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위해 너희를 바쳐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부자로 만들어 줄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학개 선지자 뿐만 아니라 많은 이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날을때, 어찌되리라는것을 말씀합니다 (학2:17, 신28:63-68).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고통중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할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신 30:5-6)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것은, ‘네’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합니다(학2:9). 복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너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가 욧점입니다. 비전을 보여주며(스가랴서) 나가야 할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전은 지었지만 신앙에서는 실패합니다. 이벤트는 잘 치루지만, Process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그날”을 바라봅니다 (슥9-14장). 예수 그리스도의 날를 기다립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이벤트에 성공하고 과정에서 퇴행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말1:9-10). 그러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3:1).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에서를 제치고 야곱을 사랑하였음을 말합니다 (말1:2-3). 야곱을 사랑하였다함은 그가 온전하여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끊쳐내지 못하였던 것 처럼, 우리의 죄와 실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사건과 상황에만 눈이 멀어 하나님의 사랑을 인지하지 못하고,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돌아선줄 모르고 돌아선 이스라엘입니다.

믿음은 과정입니다. 이벤트의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죄와 실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로 부터 영원히 걷어내지도 못합니다. 이벤트는 필요할때 축복받는 수단이 아닙니다. 과정을 견고케하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것이 믿음입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에 축복이 있씁니다.†

크리스찬을 크리스찬되게 하는것은?

에스라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느헤미야 8:8,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November 6, 2021. SaturDevo

에스라-느혜미야서를 읽고 있으면, 전쟁 후 복구에 매달리고 있는 패전국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런 주제의 영화들은 대개 그 구성이 비슷합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들은 미국의 도움으로 복구에 매달리는데, 그들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폐허속에서 그 폐허를 걷어내고 다시 도시를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노력 가운데는 항상, 새로운 건설의 주변에서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권에만 눈이 멀어있는 악한들이 있고,  부패한 관리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배만 채우려고 하고, 자신들의 세력만 늘리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과 몇명만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바른 나라 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려졌던땅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70년은 느브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브사라단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헐어 폐허로 만든 BC 585년부터 (왕하 25:8-12) 포로에서 돌아와 천신 만고끝에 성전을 다시 세워 봉헌한 BC 515년까지(스6:15-16)를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헐리고 백성들은 거의 모두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왕하 25:12)된 몇사람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버려진 땅이 되고, 가나안땅의 중심지는 사마리아가 됩니다. 고레스의 포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온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70년동안 버려졌던 땅, 사는 사람도 없던 곳 이었습니다.

이민을 와도 사우스타코타같은 황량한 곳으로 가지 않고, 시카고나 LA, 뉴욕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땅으로 갔다는 말은 사명없이는 불가능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1차 귀환이라 불리는, 스룹바벨과 돌아온 사람의 수는 49,897 명입니다(스2:64-66).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스3:1). 각각 흩어져 살던 귀환 이스라엘 사람들은 7달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그러나 지금은 폐허의 땅에 모입니다.

이들은(1차귀환)  성전을 세우고, 에스라(2차귀환)는 컴뮤니티를 정화하려고 노력하고, 느헤미야(3차귀환)는 성벽을 쌓습니다. 이 이야기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100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재건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사건과 되어지는 일들속에 하나님이 끝까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긍휼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사랑(steadfast love)를 인지하는 사람은 단지 포로 귀환의 영웅들뿐입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악 조건을 극복하고 불타고, 무너진 잔해 밖에 없던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벽을 쌓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대로 성전 중심의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꿈꾸며 내노라 하는 백성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못했습니다. 사람의 죄성은 바뀌지 않았지만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포로에서 자기땅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아직도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의 통치아래 있습니다. 그런 중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편리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꾸만 이방 사회속으로 들어갑니다 (스9:1). 백성의 방백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늑탈합니다(느5:7). 이스라엘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느5:2-5). 제사장들이 부패하고 백성이 성전을 떠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형식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말라기서에는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에스라가 결심한것은 말씀을 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back to the basic).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7:10).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지키는 것은 말씀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에스라가 결심은 3가지로 요약됩니다. 율법의 연구(studying)와 준행(doing)과 가르침(teaching)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뿐만아니라 오늘날에도 모든 믿는 사람들이 적용해야할 가르침입니다. 크리스찬이 크리스찬 되기 위한 기본입니다.

COVID 19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멀리한다고 합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믿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에스라와 같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성전과 제사장들만의 소유였고, 글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던 당시에는말씀을 공부하고 행하고 가르치는 일이 제사장이나 에스라같은 학사의 일이 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찬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크리스찬의 정체성은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전하데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