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허다한 죄를 덮나?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November 27, 2021. SaturDevo

왠지 사랑과 제일 관계없을 것 같은 베드로인데,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사랑을 강조하기를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사랑’이라고 번역될수 있는  말이 헬라어(그리스어)에는 4가지 다른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어떻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였는지, 어떻게 예수님은 요한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그의 편지에서 믿는 형제들을 부르는 말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자들아 (아가페이토이)’하며 사랑이 넘칩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하며 간절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시아지역,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터어키입니다. 이들 지역에 살고 있던 1세기의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로 부터 나그네(exiles<NIV>, strangers<NASB>) 의 취급을 받고있었습니다(1:1). 네로황제의 통치아래 있으며 아직 국가적인 핍박은 받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에서 핍박을 받은것 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와 고통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보통 복음, 구원, 의나 대속같은 신학적 논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덧 붙이고 있는데 반해, 베드로의 편지는 믿음안에서 어떻게 승리할수 있는지를 말하는 신학적 주장과 충고가 댕기줄 처럼 엮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뗄레 뗄수 없이 엮인 그 두개의 주제는 거룩과 역경입니다. 베드로는어려운 사회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중요하지만 쉽게 잊혀질수 있는 진리로 격려하는 편지를 씁니다.

베드로는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라고합니다. 잔인한것 같은 말씀이 믿는 사람들에게 격려라기 보다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살아가면서 시험을 만날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통이 믿음에 신실함의 정도를 알수 있고 또 그 증거가 될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실체를 아는데 도움이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땅에서 복받고 잘사는 수단으로써 믿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기 보다 예수님을 요술 지팡이로 이해하는 변질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또한 이땅에서 축복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구별된 삶)과 고난(믿는 사람들의 고난) 사이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고난은 고난이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그의 뜻을 따라 사는 믿는 사람으로써 구별된  삶의 실체입니다. 악의 세력이 팽배한 사회속에서 살아갈때 그 갈등은 더 심할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 긴장이 조금 덜 해 질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는 자신이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을 들어 ‘서로 사랑하라,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거룩과 고난을 이야기 하며 왜 상관없는것 같은 사랑의 말씀을 더하였을까요?

죄를 덮는 사랑은 용서입니다.

죄를 덮는 사랑의 좋은 표본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볼수 있습니다 (창 50:15-21).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을 팔아 넘겼던 형제들은 애굽에 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이 두려워, 벌벌떠는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잠10:12). 그 용서는 형제들을 살렸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하는 뿌리가 됩니다. 베드로 자신 또한 자신의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마지막에 세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마26:75).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장면이 요한 복음 21절의 이야기 입니다. 용서 받은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 사람임을 압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 말씀(4:8)을 하며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죄를 덮는 사랑은 죄를 씻어줍니다.

죄를 ‘덮는다’는 말과 ‘감추어 준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죄를 덮어준다는 것은 죄지은 사람에게 회개할수 있는 기회를 주며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고전 13:4). 죄를 감추어 주는 것은 더 많은 죄를 조장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8:15-17은 죄를 씻어주는 사랑을 설명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새롭게 날수 있도록 돕는 사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20도 그것을 말합니다.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죄를 덮는 사랑은 아가페사랑입니다.

우리 중 누가 누구의 죄를 용서할수 있습니까(눅 5:21)?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랑을 준 쪽에서는 그 사랑의 양만큼이나 큰 희생을 의미합니다. 형제를 용서한 요셉은 어떤 고난을 치렀으며, 제자를 용서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한 예수님은 어떻한 고통을 치렀는지 압니다. 에로스 사랑을 하다가고 자빠지고 필리오 사랑을 하다가도 넘어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하는것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친구가 아니라,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롬5:8).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의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사랑은 우리 것을 가지고 누구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죄 (허다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적대감을 보이는 주변의 고난를 견뎌낼 믿음을 요구하고, 그 믿음은 구별된 삶을 증거합니다. 구별된 삶은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구합니다.